[그 청춘의 초상] 김익상(1895~1941), 조선총독부와 황푸탄 의거의 주역이었던 청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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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일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나 사진을 찍고 그걸 갈무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거친 해상도에다 낡아서 여기저기 구겨지고 흠집이 있는 사진 속의 독립운동가를 바라보는 마음은 먹먹하다.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 카드 속의 사진들은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감시와 탄압의 시간을 실증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12310’의 번호가 매겨진 카드 속의 양복을 입은 옆 모습을 보이는 이는 의열단원 김익상이다. 감시 대상 인물 카드는 일제 경찰이 감시 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의 신상 카드로 김익상의 카드는 참고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배된 적도 국내에서 복역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다른 단원의 수형기록카드로 남은 투사의 초상

김익상의 사진은 의열단원 정이소의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1920년 3월께로 추정되는 의열단 창립 초기 단원들의 모습 속에도 있다. 단장 김원봉과 부단장 곽재기를 비롯해 강세우·김기득·이성우 등 창립 초기 단원들이 모여 찍은 이 사진은 의열단 초기 단체 사진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진 속에 김익상은 조그만 원형 사진으로 김원봉 아래 편집되어 있다.
시대도 시대였지만, 의열단원은 신분 노출을 꺼려 사진을 거의 찍지 않은 거로 알려졌다. 암살과 파괴 활동이 중심인 의열단은 당시 일본 경찰의 최우선 추적·수배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진으로 얼굴이 드러나면 작전 수행 뒤 탈출과 도피에 지장을 주므로 사진을 좀처럼 찍지 않았고 찍더라도 원판은 철저히 회수하는 게 원칙이었다.
1919년 거족적으로 펼쳐진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데는 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의 타협주의적 독립운동 노선을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으로 일제의 타도하겠다는 전술을 채택했다.
1919년 11월 중국에서 조직된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의 항일 비밀 결사 ‘의열단(義烈團)’은 조선 총독 이하 고관 및 친일파 거두와 밀정 등을 ‘7가살(七可殺)’로 규정하고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 대상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미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1920.9.)와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1920.12.)가 각각 수행된 바 있었다. [관련 글 :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출범]
청년 노동자, 비행사를 꿈꾸다 의열단원이 되다

김익상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문 공덕리(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 출신이다. 어려서 삼호 보성소학교에 다녔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져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평양과 서울 등지에서 철공소 공원과 전기수리공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1919년 담배 회사인 광성연초회사로 직장을 옮긴 뒤 1921년에 중국 펑톈(奉天)지점의 기계 감독으로 발령을 받았다. 비행사의 꿈을 지니고 있던 그는 중국으로 건너간 뒤, 비행학교에 들어가고자 광둥(廣東)으로 갔지만, 당시 광둥의 호법 정부*는 북벌에 바빠 비행학교를 운영하지 않아서 꿈을 접고 베이징으로 갔다.
* 중국국민당이 광저우에서 중화민국 북양 정부의 수장 돤치루이의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군사정부
김익상은 베이징에서 김창숙의 소개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는데 이는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김익상은 김원봉과 함께 일제 식민 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하였다. 곧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아 1921년 9월 10일 베이징을 떠나 다음 날 경성에 도착하였다.

1921년 9월 12일은 월요일이었다. 오전 10시 20분께, 전기수리공 차림의 젊은이가 서울 남산 왜성대에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나타났다. 전기 시설을 수리하러 온 것처럼 태연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온 청년은 2층으로 올라가 비서(祕書)과에 폭탄을 던진 다음, 회계과장실에도 폭탄을 던져 넣었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굉음과 함께 폭발했고,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 올라왔다. 청년은 대담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이들에게 “아부나이(위험하다), 아부나이”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갔다.
이상이 이튿날, <동아일보>가 ‘총독부에 폭발탄!’이라는 제목으로 특종 보도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다.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이는 다음 해인 1922년 3월 말이 되어서야 밝혀졌는데,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처단하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김익상이었다.
뒷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익상은 조선 총독의 집무실로 판단하고 폭탄을 던졌지만, 그곳은 애석하게도 비서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폭탄마저도 불발했다. 뒤이어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터졌지만,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지방 외유 중이었다.
최고 식민 통치 기구인 총독부, 대낮에 뚫리다

실제로 다친 사람 하나 없는 거사였지만, 이 사건은 최고의 식민 통치 기구인 총독부가 대낮에 뚫린 사건으로 일제를 긴장시켰다. 그의 거사는, 일제가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를 펴 식민 통치 체제가 안정되어 가고, 더 나아가 식민 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숙지고 있다는 선전이 허황한 현실임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멀쩡한 대낮에 조선총독부가 받은 폭탄 세례로 총독부는 혼란에 빠졌다. 보도 통제가 되지 않아 사건 당일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하여 사건 발생을 보도했고, 다음 날 조간에는 주요 신문들이 현장 사진을 곁들인 기사를 대서특필한 것이다.
폭탄으로 입은 물리적 피해는 가벼웠지만, 식민 통치의 심장부 총독부가 침입자 1인에게 유린당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지방에서 돌아온 사이토는 대수롭지 않게, 상하이나 블라디보스토크엔 배일(排日)하는 사람이 매일 폭탄을 만들고 사고파는 형편이니 폭탄 한두 개 몰래 들여오는 일쯤이라며 호기를 부렸지만, 그건 사실상 허세일 뿐이었다.
뒤늦은 보도 통제로 후속 기사를 낼 수 없게 된 <동아일보>는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의 논평을 인용해서 총독부의 허세를 비꼬았다. 총독부는 “인심은 안정”하고 “민정은 평온”하다고 선전하지만, “육군 위병이 있고 수십 명의 순사로 경호하는 총독부에서 백주에 공공연히 폭탄을 투척”당한 것은 어떻게 변명할 거냐고 물은 것이다.
범인을 잡으면 사건은 간단히 정리될 수 있었지만, 총독부는 범인이 누군지는 물론, 그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한 달쯤 뒤에 황임성이라는 남자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다. 황은 사실상 일제 경찰의 밀정으로 활동한 자였는데, 예심 단계에서 비로소 자신이 폭탄 범인이 된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가 총독부 폭탄 범인이라고 자백한 이유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의 협박과 설득 때문이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눙쳤지만, 경찰로서는 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의 부담과 압박 때문에 범인 조작이라는 상황까지 연출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황은 예심 면소 판결을 받고 서대문 구치감에서 풀려났는데, 공교롭게도 진범인 김익상이 상하이 황푸탄에서 다나카 처단에 실패하고 일경에 붙잡힌 것은 그 나흘 뒤였다.
김익상은 거사 뒤 곧바로 도주하지 않고 전차를 타고 경성을 돌아다니며 경찰의 동향과 민심을 살폈다고 한다. 그는 한강 변에서 옷을 갈아입고 일본인 목수 차림을 하고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서 며칠 머물렀다. 다시 기차로 신의주로 이동해 국경을 유창한 일본어로 통과하여 비상이 걸린 펑톈과 톈진을 거쳐 9월 17일에 베이징의 의열단 본부로 돌아갔다. 의거는 출발에서 귀환까지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듬해 일본군 대장을 노린 황푸탄 의거에 투입


1922년 3월 말, 김익상은 일본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거사에 그는 이종암(1896~1930, 1962·독립장), 오성륜(1898~1947) 등과 함께 3인조로 투입되었다. [관련 글 : 의열단원 김익상의 조선총독부·황푸탄 의거]

거사는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도착해 황푸탄(黃浦灘) 부두에서 하선하면 곧바로 오성륜이 첫 저격을 맡기로 했다. 만일 실패할 때는 김익상이 뒤이어 그를 사살하고, 김익상마저 실패하게 되면 군중 속에 숨어 있던 이종암이 폭탄을 던져 그를 폭사시킨다는 계획이었다.
3월 28일, 오후 3시 예정대로 배가 황푸탄 하구 공공 조계(租界)* 부두에 닿았고 다나카 기이치가 하선했다. 3시 30분, 첫 저격을 맡은 오성륜이 곧바로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실탄은 다나카 기이치에게 다가간 한 미국인 여성의 등에 총이 맞았고, 이 여성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조계(租界)는 19세기 후반에, 중국의 개항 도시에 있었던 외국인의 거주 지역. 또는 그 거류 지구 안의 경찰 및 행정을 관리하던 조직.
당황한 다나카가 우왕좌왕 허둥대며 급히 자동차에 타려 할 때 2번째 저격을 맡은 김익상이 역시 권총을 발사했으나, 탄환은 다나카 기이치의 모자를 꿰뚫는 데 그쳤다. 이에 세 번째 저격을 맡은 이종암이 군중 속을 헤치고 나와 다나카가 탄 자동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이마저 바로 터지지 않아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 넣어 버렸다. 거사는 꼼짝없이 실패한 것이다.
이때 이종암은 즉시 외투를 벗어 던지고 군중 속으로 숨어들어 체포를 면했으나, 도주하면서 권총을 들고 있던 오성륜은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김익상은 도주하던 중 추격하던 영국 경찰 톰슨이 쏜 총탄을 손발에 맞아 중국 순경에게 붙잡혔다.
김익상은 체포되면서 그 전해에 자신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장본인임을 밝혔고, 오성륜과 함께 일본영사관 감옥에 분리 수감되었다. 5월 2일 오성륜은 함께 수감된 일본인 죄수와 함께 감옥 문을 부수고 탈옥했지만, 김익상은 실패하여 결국 다음날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김익상은 이른바 ‘절도,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 건조물 파괴, 살인 미수 및 상해치사’ 등 혐의로 기소되어 1922년 6월 30일 나가사키재판소에서의 첫 공판이 열렸다.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출정해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 취체(取締) : 『법률』 규칙,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
“나는 2년 전에 경성에서 철공장 직공 노릇을 하였는데, 중간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을 말함)에 가입하여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금년 정월에 상해로 와서 일본의 동지에게 다나카 대장이 상해로 온다는 말을 듣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며, 우리 동지는 3백50 명가량인데 일본의 대관과 군인 윗 두목 가는 자를 암살할 목적이라. ‘우리는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바’이니 이 일로 형벌을 당하게 되면 처음부터 달게 받은 셈 잡고 한 일이라.”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의 김익상, 제3의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정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1922년 11월 6일 나가사키 공소원의 1심에서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23년에 있었던 상고심에서는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어 나가사키, 후쿠오카, 구마모토, 가고시마 등의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복역 중에 자신의 의거로 일경에게 고초를 겪었고, 짐마차 마부로 형의 식솔까지 부양하던 아우 김준상은 극심한 생활고로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내도 어린 딸을 데리고 개가하는 등의 개인적 고통도 견뎌야 했다.
김익상은 1936년 8월 총독부 의거 15년 만에 가고시마 형무소에서 출옥해 이태원의 조카 김기복의 집으로 돌아왔다.* 스물여덟 청년이 불혹을 넘겨서야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출소 이후 김익상의 행적과 사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해방 뒤 귀국한 의열단장 김원봉이 조카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 김익상의 출옥 시기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1936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보훈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자료에선 1943년 만기 출소했다고 적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귀향 뒤 일본인 고등경찰에게 연행된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다고만 서술하고 있고, <디지털 동작문화대전>에서는 사망 연도가 다른 두 사람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 임경석 교수의 <독립운동 열전> 1권에 실린 내용으로 이는 <조선일보> 1945년 12월 5일 자 기사를 근거로 한 것이다.
처와 딸을 두었지만, 김익상은 무덤도 후손도 알려지지 않았다

김익상은 일본 황태자의 혼인, 천황의 즉위 등을 계기로 세 차례 감형을 받아 1936년에 출옥했지만, 이후에도 예비검속, 요시찰 감시 등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그는 1941년 8월에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맞닥뜨려 경찰과 결투를 벌이다가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한강에 몸을 던졌다. 이는 1941년 2월에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라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서 사상전향에 응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감옥에 재수감돼야만 하는 것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조카 김기복은 김익상의 아내 송씨와 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김익상은 한 살 아래의 아내 사이에 ‘점석’이라는 이름의 딸을 두었다. 황푸탄 거사 이틀 전에 그가 동지들에게 남겼던 유언은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라는 것이었다.
임경석 교수는 <독립운동 열전>에서 김익상이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을 이행할 책임은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한정되지 않”고, “해방된 세상에 살고 있는 공동체 성원들이 마땅히 지키고 이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라고 쓰고 있다. 때로 오래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투쟁이 되는 것이다.
김익상은 출생 연도도 정확하지 않아서 의거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다고 해서 역산하여 1894년으로 쓰고 있다. 무덤도, 후손도 알려지지 않아 김익상은 국립서울현충원 무후(無後) 선열 제단에 위패로 봉안되어 있다. 그나마 1962년 정부가 추서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한 생애를 온전히 조국에 바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유일한 표지가 되었다.
2025. 11. 28. 낮달
참고 문헌
· 김익상, 디지털동작문화대전, 동작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용달, 김익상의 생애와 의열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4.
· 조한성, 황임성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이 된 이유, 민족사랑 2023.11. 민족문제연구소
·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익상, 공훈전자사료관, 2010.06.
· 임경석, 불발에 그친 의열단의 황포탄 의거, 독립운동 열전 01, 푸른역사, 2023.
· 임경석, 혁명가로 키우려던 김익상의 딸은 어디로 갔는가, 독립운동 열전 01, 푸른역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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