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샌프란시스코의 총성, ‘의열투쟁’의 첫 장을 열다

[역사 공부 오늘’] 1908323, 장인환·전명운 의사 스티븐스를 처단하다

 

 

▲ 의거 현장인 샌프란시스코 항의 페리 빌딩. 스티븐스는 여기서 장인환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08323일은 월요일이었다. 오전 930, 샌프란시스코 항 페리호 부두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시 귀국 중이던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총을 맞고 쓰러졌고, 현장에서 두 명의 한국 청년 전명운(25)·장인환(33)이 체포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총성, 장인환·전명운 의거

 

후송된 스티븐스는 이틀 후 총탄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고 두 사람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9년 특사로 풀려났다.

 

이 사건이 바로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사건으로 통칭하기도 하는 상항(桑港) 의거. 이는 의열투쟁의 첫 장을 여는, 해외 거주 한인 최초의 의거로 이듬해(1909) 1026,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거로 이어졌다.

 

상항 의거로 처단된 스티븐스는 미 국무부에서 근무하다가 워싱턴 주재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 외교무대에 등장한 것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한성조약(1885)이 체결될 때였다. 그는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를 자문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욱일장(旭日章, 훈장)’을 받았다.

 

1904년에는 한일 외국인 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를 강제 체결케 하여 1227일 대한제국 외부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을사늑약(1905),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등에 관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외교 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샌프란시스코에서 울린 총성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강제 병탄에 골몰하고 있는 일본과 이를 묵인하고 있는 강대국 미국의 주의를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의거는 세계 주요 매체로 타전되었고 특히 샌프란시스코 언론들은 다투어 은둔의 나라에서 온 열혈 청년에 관한 기사를 이어갔다.

 

당시엔 서구 강대국들도 일제의 한국 병탄 논리였던 한국은 근대화하기에 능력이 떨어지므로 선진 일본의 도움과 보호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논리에서 한국에 도움을 주고 있던자국인 고문이 한국 청년들에게 응징당한 사건을 통해 이들은 한일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한국 청년들의 항변과 거사를 주목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 콜(San Francisco Call)>은 이들을 애국자들(Patriots)’이라고 지칭했으며 이들의 거사가 샌프란시스코 코리안의 공모는 성스러운 전쟁에 신명을 바쳐 모든 일본인을 근절하라의병(Righteous Army) 선언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하는 등 의거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것이다.

[관련 기사 참조]

 

스티븐스는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틀 전인 321, 일본 선편 니폰마루(日本丸)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선상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Japan’s Control, A Benefit to Corea)’는 제목의 친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제의 한국 침략의 하수인 스티븐스

 

▲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당시 한국은 1년 전(1907) 7월 이완용이 통감 사저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1905)에 이어 이 조약으로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이 이루어지면서 일제의 한국 병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스티븐스는 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적 보호를 다음과 같이 왜곡 선전하였다.

 

1.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 사람 사이에 교제가 점점 친밀하며,

2.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 백성을 다스림과 같고,

3. 한국 신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치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시골의 농민들과 일반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아니함으로 농민들은 일본사람을 환영한다.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등에 이 회견내용이 보도되자 한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는 하와이 사탕 농장에 이민을 왔다가 미주 본토로 들어온 노동자와 유학생, 우국 망명자들이 한인의 권익 신장과 조국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인 공동회를 개최하고 최정익·문양목·정재관·이학현 등 4명의 대표를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호텔(Fairmont Hotel)에 보내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대표들은 다음 날 스티븐스를 찾아가 망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지만, 스티븐스는 간단히 이를 거부하였다.

 

한국에는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요 동양에 대행(大幸, 큰 행운)이다. 내가 한국 형편을 보니 광무황제의 실덕(失德)이 크고 완고한 무리들이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러시아에 빼앗겼을 터이라고 일본 정책을 도와 말하며 신문에 낸 것이 사실이니 다시 정정할 것이 없다.”

 

분개한 한인 대표들이 스티븐스를 난타하는 등의 한 차례 승강이가 벌어진 뒤, 대표들은 호텔에 있던 사람들에게 스티븐스의 폭언과 망언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물러났다. 대표들에게 스티븐스의 망동을 전해 들은 교민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상항 의거의 주역 장인환(좌), 전명운 의사

그들 가운데 분노하는데 그치지 않고 즉각적인 응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이가 전명운과 장인환이었다. 두 사람은 1905년에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가 이듬해 본토로 이주해 온 젊은이였다. 장인환(1875~1930)은 평양 출신으로 철도 공사장, 알래스카 어장 등에서, 서울 출신의 전명운(1884~1947)은 철도 쪽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이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온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면서도 이들은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모아 설립한 공립협회에 각각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들은 각각 스티븐스를 저격해 처단하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지만 아무도 이들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암살 계획을 각각 따로 진행했으며, 서로 같은 목적이 있었는지는 물론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조직 차원의 정교한 계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기도 했다.

 

의거 당일,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 주재 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역에 들어서던 스티븐스를 향해 손수건으로 싼 권총을 발사했지만, 그의 리볼버는 발사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후려치고 달아났고 스티븐스가 피를 흘리며 그를 추격하려는 순간이었다.

 

▲ 두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뜻밖의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장인환은 침착하게 자기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 총알은 몸을 피하던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고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의 몸을 관통했다. 전명운의 상처는 위중했지만 회복되었던 반면, 스티븐스는 이틀 후 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전명운 무죄, 장인환 2급 살인으로 25년형 선고

 

두 사람이 재판에 회부되자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고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애당초 이승만에게 통역을 맡기고자 했으나 그는 두 사람의 행위를 살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두 사람이 법정 최고형을 받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전명운은 공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25년형을 선고받았다. 배심원들은 최소한도 거사가 애국적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걸 참작했던 것일까.

 

나는 특별한 학식이 없어 나라를 별달리 보국할 방책이 없으나 언제든지 우리나라가 일본과 독립전쟁을 개시하는 날에는 나는 반드시 칼을 차고 총을 메어 떨어지는 날 가을 풀에 말머리 행오(行伍, 행렬) 앞에서 나의 한 창자 더욱 피를 솟을 뿐이다.”

 

미국에 온 뒤 조국에서 들려오는 을사늑약과 고종의 퇴위, 군대 해산 등 후 일제의 침략 만행 소식에 분개하면서 장인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살기 위해 이국땅으로 이민을 왔던 무명의 젊은이는 조국을 위한 선택으로 11년 동안 복역해야 했다.

 

▲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장인환(위)과 전명운(아래) 의사의 묘.


장 의사는 한때 귀국에서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우울증을 앓다가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1975년 장인환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전명운 의사는 훗날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살았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는 1947년 타계해 LA에 묻혔다가 199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면서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앞서 밝혔듯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는 살기 위해서 하와이로 건너온 이들이었다. 독립운동을 목표로 망명하거나 유학을 온 유복한 젊은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행동으로 일제 침략의 하수인 스티븐스를 응징함으로써 각기 대한의 청년임을 증명했다.

 

이 무명 청년들의 의거는 국내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거는 한국 병탄을 목표로 한 일제의 침략과 그 하수인인 스티븐스의 비열한 행위를 국제여론에 알렸다. 또 민족의 항일 의지를 가다듬어 효과적인 항일민족운동 추진의 계기가 되면서 미주 한인사회를 국민회로 통일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본산 구실을 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상항 의거는 국내외에서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강우규의 사이토 총독 저격(1919), 김지섭(1924)과 이봉창의 일왕 저격(1932), 윤봉길의 홍코우 의거(1932) 등이 이어졌던 것이다.

  

▲ 상항 의거는 후속 의열투쟁을 촉발했다. 이듬해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의열투쟁테러라고?

 

뉴라이트 계열의 극우 인사들은 이 같은 의열투쟁을 테러로 규정하면서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지칭하기도 하는데 김기승 교수(순천향대)는 이러한 견해를 강력히 부정한다. 그는 의열투쟁은 소규모 조직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희생적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을 지칭하는 역사학적 개념으로 정립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관련 기사 참조]

 

김기승은 테러 혹은 테러리즘은 서구의 역사적 전통 속에서 형성된 용어인데 서구 근대 역사에서 현 체제나 가치를 부정하는 반대세력의 정치 사회적 행위에 대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오늘날 테러리즘은 평화와 안전을 해치는 집단적 폭력 시위, 정치적 목적으로 두려움을 야기하는 폭력적 범죄 행위, 의식적 계획, 온건한 테러리즘, 혁명을 추구하는 정치적 테러, 공식 기관이나 국가에 의한 테러리즘 등 다양한 형태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사회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테러 혹은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를 원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또 테러 혹은 테러리즘 용어는 약소민족과 국가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침략하여 인류공동체를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만든 제국주의에 부과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한국의 독립운동은 제국주의적 테러리즘에 저항하여 민족의 독립과 세계 평화라는 휴머니즘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의열투쟁이었다고 보는 게 온당하다는 것이다. 굳이 학술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세계에서 이어지고 있는 테러와 피식민지 국가가 독립 투쟁 과정에서 행하는 일련의 투쟁을 동궤에 올리는 게 결코 온당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 일반의 상식일 터이다.

 

 

2016. 3. 22.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