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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 단신으로 일경 수백 명과 벌인 전설적 총격전

by 낮달2018 2026. 1. 11.

 

▲ 상하이 망명 시절(1920~1922) 사진관에서 찍은 김상옥 의사 독사진. 전하는 유일한 사진이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께, 서울 한복판 종로경찰서 서편 유리창을 뚫고 폭탄 하나가 날아들어 터졌다. 일제 식민 통치를 뒷받침하는 경찰력의 본산으로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 온 종로경찰서를 폭파하려는 이 의거에 일제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폭탄이 터지면서 경찰서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었지만, 당시 일경은 이 투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일경이 ‘범인’을 알아낸 것은 의거 닷새 후인 1월 17일이었다. [관련 글 :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주인공이 바로 서른세 살의 청년 김상옥이다. 지금 전하는 유일한 사진은 상하이 망명 시절(1920~1922)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그림으로 된 배경 앞에 뒷짐을 진 양복 차림의 청년은 앳되어 뵈는 미남자다. 마치 곱게 자란 양갓집 도련님 같은 모습의 이 청년이 ‘경성 피스톨’로 불린 권총 명사수로 일제 경찰 수백 명과 시가전을 벌인 그 사나이라고 여기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김상옥은 그 곱상한 용모만큼이나 차분하게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면학의 길을 열어갔다. 가난으로 여러 차례 학업을 중단해야 했지만, 그는 그런 사유로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 유학을 꿈꾸면서 영어를 배웠고, 스스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YMCA에서 활동했고, 물산장려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두 명의 목사로부터 훈도를 받은 듯 보인다. 그가 다닌 동대문감리교회의 담임 손정도(1881~1931, 1962·독립장) 목사는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을 지냈고, YMCA 활동을 벌일 때 만난 이필주(1869~1942, 1962·대통령장) 목사는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활약한 이다.

 

학교 대신 공장에서 일하던 소년 명사수가 되다

 

김상옥은 1890년 서울 동부 건덕방 어의동(지금의 종로구 효제동 72번지)에서 구한국 군인 김귀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다. 학교 갈 나이인 8살 때에 학교 대신 아버지가 운영하는 체 공장의 체불(체의 그물) 수리를 시작했고, 열네 살부터 말굽을 만드는 대장간에서 일했다. 환경은 불우했으나 성품이 영특하고 몸은 다부져서 주어진 삶에 순응하기보다는 스스로 심신을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낙산과 남산, 북악산 등을 번갈아 오르며 체력을 길렀고, 특히 늘 방바닥을 두드리며 주먹을 단련하여 돌덩어리 같은 손아귀 힘을 갖게 되었다. 상하이 망명 시절에도 주먹 단련을 계속하여 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총장 이시영에게서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백발백중 권총 사격술을 연마하는 악력 강화 훈련”이라고 대답하였다. 실제로 그의 권총 사격술은 상하이에 있던 미국인의 ‘리볼버클럽’에서 백발백중의 명중률을 보였다고 한다.

 

16세가 되어 서구 열강의 부와 문명의 원천이 기독교라 여겨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동대문교회에 가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듬해에는 교회 안의 야학교에서 공부했고, 이 야학이 폐지되자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에 다니며 서당에서는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19살에 이도 중퇴하여야 했다.

▲ 김상옥 의사가 동대문 교회에서 도를 받은 손정도, 이필주 목사.

20세에는 주위의 도움으로 스스로 동흥야학교를 열어 배움을 이어갔는데, 21세가 되던 1910년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현실을 겪으며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 그래서 경성 기독교 청년회관(YMCA)에 있는 경성영어학교에 다니며 국제정세와 서양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그러나 그는 이 공부 역시 마치지 못한다.

 

이듬해인 1911년에는 당시 YMCA의 체육 교사로 재직하던 이필주 목사의 지도로 YMCA의 청년부장으로 활동했다. 1912년에는 동대문 안(현 종로6가)에 교회 서점을 내고 책을 권하는 활동과 함께 전도를 목적으로 삼남 지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도하고 약을 파는 행상을 병행하여 상당한 수입을 거두기도 했다.

 

이 삼남 지방을 다니는 과정에서 일제의 무단 통치와 함께 일제 상품이 범람하는 현실을 깨닫고 일본 상품을 배척하는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의열단원으로서 암살과 파괴 활동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준 김상옥은 장사에서도 숨은 재능을 유감없이 펼치기도 했다.

 

1912년, 스물세 살에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김상옥이 연 영덕철물상회는 한때 종업원이 50여 명에 이를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1917년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말총 모자를 창안, 생산해 보급하였고 농기구·장갑·양말 등도 아울러 생산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 데 앞장섰다.

 

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결성된 풍기광복단에 입단하였고, 1920년 4월, 김상옥은 한훈(1968·독립장)·유장렬(1968·독립장)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 민족 반역자 2인을 처단하고, 화순의 오성(烏城) 헌병대 분소를 습격해 군도와 권총을 탈취하였다.

 

* 풍기광복단 : 1913년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1963·독립장)이 결성한 항일운동단체. 대한광복단이라고도 한다. 1915년에 조선국권회복단과 영남의 항일 세력을 규합하여 ‘대한광복회’로 발전했다. 전투적인 항일 조직으로 전국적 지부 망을 갖추고 국내 항일운동을 선도하였다.

 

3·1운동 때 일경에게서 일본도를 빼앗은 청년

 

1919년 3월 1일 오후 철시하고 직원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상인들의 만세 시위 참여도 독려하였다. 그날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일경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하고 일본도(장검 1, 단검 2개)를 빼앗았다. 그가 노획한 일본도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3.1운동 때 김상옥 의사가 일경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하고 빼앗은 일본도. 독립기념관 사진.

그해 4월, 제암리학살사건에 분노한 청년 학도들과 함께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 임정 동향 등의 소식을 알리는 기관지 <혁신공보>를 펴냈다. 시민에게 배포하던 이 공보가 일경에게 탐지되어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체포·구금되어 고문과 고초를 겪었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아 40여 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제암리학살사건 :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질렀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사망하였고, 인근의 고주리 주민도 6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1919년 12월, 혁신단 조직을 바탕으로 동지들과 암살단을 꾸렸다. 이듬해(1920) 8월에 미국 상하의원단 42명이 조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5월부터 윤익중(1990·애국장)·서대순(1990·애족장)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의원단을 영접하러 나오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과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당일, 예비검속 차 일경이 김상옥의 집에 들이닥치자, 김상옥은 피신하였지만, 경찰의 사무실로 쓰던 방을 수색하여 암살 관련 문건을 찾아냈다. 곧이어 총과 탄환을 전달하러 온 한훈이 체포되면서 거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물거품이 되었다. 김상옥은 이필주 목사의 다락방에 은신해 있다가 수사망이 좁혀져 10월에 펑톈(奉天)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김상옥은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에서 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정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한 김상옥은 1921년 7월, 귀국해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정에 전달했다. 1922년 11월 중순 상해에서 임정 요인 이시영·이동휘·조소앙과 의열단 김원봉 등과 의논해 일본 총독과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세웠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1923년 1월, 일본 제국의회 참석차 도쿄로 가는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김상옥은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경성에 들어갔다. 장도에 오르며 그가 동지들에게 남긴 말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본 듯 비장하고 결연했다.

 

상하이를 떠나면서 농부로 변장한 김상옥은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며 경비 경관을 사살하였고, 신의주의 세관 검문소를 지나면서 보초를 때려뉘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경성에 들어와 김한과 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거사 계획을 점검했으나 상하이 주재 일경의 정보를 받은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거사는 계속 연기되었다.

 

단신으로 일경 수백 명과 벌인 긴박한 총격전

▲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경찰력의 본산이었다.

1월 12일,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은신처를 역에서 가까운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의 매부 고봉근(1992·건국포장)의 집으로 정한 까닭은 사이토 처단을 염두에 두어서였다. 또 총독부 폭파에 앞서 폭탄 성능 시험을 겸한 첫 의거로 종로경찰서를 택한 것도 독립 투사들을 체포하여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던 일경의 심장부를 응징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월 17일은 거사 당일,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출석하려고 남대문 역에서 경성을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김상옥을 추적하던 일경은 새벽 3시, 그가 삼판통에 은신해 있음을 탐지하고 종로경찰서 우메다와 이마세,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1명의 무장경찰로 은신처를 포위했다.

 

일경 체포조가 그가 은신한 방을 덮치자, 방안에서 발사된 총탄이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순사부장 다무라 죠시치(田村長七)를 쓰러뜨렸다. 가슴을 맞은 다무라는 즉사했고, 이어 이마세 긴타로(今瀨金太郞)는 오른쪽 손목과 왼쪽 옆구리를 맞았으며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는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일경이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 이미 김상옥은 은신처에서 탈출한 뒤였다.

 

경성 시내는 물론 인근 지방 경찰서에서 차출된 정복 순사 1,000여 명이 동원된 남산의 수색망은 ‘쥐새끼 하나 도망하여 나갈 틈이 없’이(당시 신문 기사) 촘촘했다. 남산 자락의 모든 거주지에 대한 가택수색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종적은 묘연했다. 김상옥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맨발로 뛰쳐나와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사찰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있었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당시 남은 폭탄. 독립기념관 사진

절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하산한 김상옥은 18일은 무내미[수유리(水踰里)] 이모 집에서 잤고 19일 새벽에는 삼엄한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어릴 적 생가의 옆집인 이혜수(1990·애국장)의 집으로 옮겨 은신에 들어갔다. 탈출하면서 걸린 동상을 치료하면서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도 일경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 효제동으로 온 서신을 전해준 전우진(1990·애국장)이 일경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문초당한 결과였다. 삼판통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기마대와 무장 경관 수백 명이 은신처 주변 일대를 네 겹으로 포위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은신처를 급습한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 쿠리다 세이조(栗田淸造)가 이끄는 결사대 5명과 맞서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효제동 생가 주변 다섯 집의 지붕을 넘나들면서 3시간여 걸친 총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고 지쳐 버린 그는 쿠리다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분전했으나 탈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신은 참혹했다. 발가락은 물론 무릎까지 동상에 걸려 있었고, 머리와 가슴, 왼쪽 발가락에 총상이 있었다.

 

김상옥의 순국을 알리는 자료들은 대부분 그가 마지막 탄환을 자신에게 발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는 남은 탄환 8발과 9연발 ‘모젤’식 권총 한 자루와 6연발 구식 권총 한 자를 쥔 채 죽었다. 검시관은 그가 오른손 검지를 방아쇠에 걸고 권총을 힘 있게 쥐고 있었다고 썼다. 향년 33. 의열투쟁으로 식민 지배자를 응징하고 대중 의식의 혁명화를 꾀하고자 했던 두 아이의 아비는 그렇게 짧고 불꽃 같았던 삶을 마감했다.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 서른셋에 장렬히 지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 출처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 일제가 보도통제를 풀자, 두 달여가 지난 동아일보 호외(3월 15일 자)에 실린 김상옥 의사 의거 기사
▲ 1923년 효제동 총격전을 목격한 화가 구본웅은 1930년 시화첩에 이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일제는 이 사건이 민심에 미칠 영향을 저어하여 1개월 20일이나 보도를 통제하다가 일반의 관심이 식을 즈음에야 해제하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즉각 3월 15일 자로 양면에 걸쳐 전면 호외를 발행하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수백 명의 무장경찰과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인 예는 일제 35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김상옥의 장렬한 죽음이 알려지자, 임시정부에서는 1923년 2월 1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3월 1일 자 <독립신문>에 그의 생애와 장렬한 서거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 독립신문 : 서재필과 독립협회에서 1896년 창간한 한국 최초 민간 신문을 이르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8월 21일에 창간한 기관지다. 첫 이름은 《독립(獨立)》이었다가 옛 <독립신문>을 계승하여 이름을 고쳤다. 1932년 휴간, 1933년 복간하여 1943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다.

 

당시 중학생으로 효제동 총격전을 목격한 화가 구본웅(1906~1953)은 그의 시화첩 <허둔기>(1930)에 스케치와 추모 시를 함께 실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독립 투사의 순국 장면을 생생히 그린 그림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 영화 <밀정>(2016)의 초반부에 일제와 맞서다 자결하는 김장옥(박희순 분)이 바로 김상옥을 모티브 한 캐릭터다.

김상옥은 ‘사격’은 물론, ‘변장과 잠적’의 명수로, 일제 관헌의 추격을 여러 차례 따돌려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이란 별칭이 전국에 널리 퍼졌다. 이에 많은 청년이 그를 따라 항일 독립투쟁의 길로 나섰다고 한다. 영화 <밀정>(2016)의 초반부에 일제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에 맞은 발가락을 스스로 잘라내고 끝내 자결하는 김장옥(박희순 분)이 바로 김상옥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총격전은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허구가 뒤섞여 있다. 1992년 국가보훈처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시리즈 사업을 벌일 때 최초로 선정한 독립운동가가 김상옥이었다.

 

1924년, 김상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1887~1958)이 그의 전기를 써서 펴냈다. 임정의 주요 간부가 몸소 전기를 쓴 것은 그와의 연이 남다른 탓도 있지만, 김상옥은 일제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 마로니에 공원에 세운 김상옥 의사 동상
▲ 서울시 종로구에 세운 김상옥 의거 터 표석

김상옥의 투쟁은 독립투쟁 극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사례

 

김상옥은 이문동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가족과 지인들의 잦은 성묘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의 강요로 다시 화장해 유골을 집에 모셨다. 1962년 정부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면서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1988년 서울 종로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고, 1998년에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2010년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고시로 인의동 101-8에서 종로 6가 28-1까지를 잇는 도로를 ‘김상옥로’로 명명하였다.

 

대체로 의열투쟁은 단신으로 일제 고관을 저격하거나 행사장에 폭탄을 던지는, 짧고 돌발적인 순간으로만 기억되기 쉽다. 그러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쫓고 쫓기는 극적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독립투쟁이 감추고 있던 극적인 역동성을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김상옥 의거의 여진이 가시기도 전에 1923년 3월,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등 일제 관공서와 총독 사이토 등 일제 고관을 대상으로 하는 제2차 암살파괴계획의 실행에 들어갔다. 김시현(1883~1966)이 경기도 경찰부의 한국인 경부 황옥과 함께한 폭탄 반입 거사는, 단원의 밀고로 모두 11명이 체포되면서 수포가 되었다.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불온 문서 900여 장에다 이들이 수화물로 위장해 반입하려던 무기는 대형 폭탄 6발, 소형 폭탄 30발, 권총 5정, 실탄 155발, 뇌관 6개 등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였다.

 

* 황옥 : 당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지금의 경감)였던 황옥은 김시현과 다른 의열단 단원들과 협력해서 국내 폭탄 밀반입하려다가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다. 의열단원인지, 일경의 밀정인지도 여전 논쟁 중이다. 영화 <밀정>(2016)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배우 송강호가 황옥 역을 맡았다.

 

36개의 폭탄은 용도에 따라 파괴용, 방화용, 살상용 등 세 종류였고, 그 위력도 놀랄 만했다. 일경은 대경실색했지만, 이 폭탄들이 군용 기성품이 아니라 사제 폭발물로 추정된다는 점만 확인했을 뿐 그 출처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김상옥 의사 묘소.

뒷날 의열단장 김원봉의 술회에 따르면, 의열투쟁의 전제였던 성능 좋은 폭탄을 만들기 위해 자금과 기술이 필요했는데,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원조로 이를 해결했다고 한다. 의열단은 4만 6,700원(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3억에 해당하는 거금)을 받아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서양식 주택을 빌려서 폭약 전문가인 헝가리 청년을 고용하여 폭발물을 제조했다.

 

제2차 암살파괴계획은 실패했지만, 의열단의 투쟁은 1924년 김지섭(1885~1928)의 니주바시(二重橋) 투탄 의거와 1926년 나석주(1892~1926)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투탄 의거로 이어졌다. 

 

독립운동가들은 의열투쟁을 일제의 식민 통치 기반을 뒤흔들고 독립운동의 침체 국면을 타개할 중요한 계기로 평가하며, 희생은 최소화하면서 효과는 극대화하는 효율적 방법이자 ‘정의를 위한 맹렬한 투쟁’으로 인식했다. 실제로 의열투쟁은 일제에 큰 타격을 주며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의열투쟁은 개인적이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투쟁 방식, 대중적 지지 기반이나 조직력의 부족, 투쟁의 성패 등 돌발변수에 좌우되며, 일제의 강력한 탄압 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의열단 내부에서 대규모 병력을 기반으로 한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는 조선의용대 창설(1938)과 임시정부 군사 조직 합류(1942) 등으로 발전하면서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운동 조직들은 차근차근 1945년 광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5.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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