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사(1872~1919), 스스로 등불이 된 근대 여성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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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으로는 이름도 낯선 데다가 그 성도 ‘김’과 ‘하’를 오가니 그도 생소하다. ‘하란사’로 불리기도 한 김란사. 1872년에 태어났으니, 김구(1876)나 안창호(1878)보다 손위다. 세련된 양장에 목에는 스카프를 감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시기는 미국 웨슬리안대학교 입학할 때라 하니 스물여덟이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앙다문 입술에 서린 결기가 만만찮아 보인다. 스물한 살에 혼인하고 스물세 살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는데, 수차례에 걸친 입학 거절에 교장에게 가지고 간 등불을 끄고 다음과 같이 간청하여 입학을 허가받은 당찬 여인이다.
“자신의 앞날이 이렇게 어두우며 조선의 현실이 이렇게 어두우니, 꺼진 등에 불을 켜게 해주는 게 어떠냐?”
억압을 넘는 불을 밝히라고 외친 신여성

뒷날 교육자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김란사는 “꺼진 등불에 불을 밝혀라(Light up the extinguished torch)!”를 자기 삶의 지표로 삼아, 억압받는 조선 여성들과 민족에 불을 밝히는 삶을 추구했다. 1920년대 이후 교육받은 여성이 늘고 직업여성이 출현하는 등 근대적인 사회 변화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을 ‘신여성’이라 일렀는데, 그보다 앞서 19세기의 끝자락에서 억압을 넘는 불을 밝히라고 외친 김란사야말로 신여성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김란사는 1872년(고종 9)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1893년(고종 30) 인천 감리서 별감 하상기(1852~1920, 2020 건국포장)와 혼인하였다. 이태 뒤인 1895년(고종 32)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세례명 ‘Nancy’(낸시)을 받았는데 음역하여 ‘난사’로 불리었다. 일본을 거쳐 미국에 입국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 ‘란사 하(Nansa Ha)’로 기록한 이후 하란사(河蘭史)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본래의 성을 따라 김란사로 기록하는 추세다.
*감리서는 조선 말과 대한제국 시기에 존속했던 관청. 조선 후기에 개항장과 개시장(開市場)의 행정 사무와 대외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아.



김란사는 일본에서 1년간 공부한 뒤 1897년(광무 1) 다시 미국에서 유학하였는데 그는 최초의 자비 유학생이었다. 1900년(광무 4)부터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에서 공부하고 1906년(광무 10)에 문학사 학위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는 비록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사인 셈이다.
* 국내에서는 1914년 제1회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식에서 이화숙, 신마실라, 김앨리스에게 한국 여성 최초의 학사학위가 수여되었다.
김란사는 귀국하여 여름부터 이화학당 총교사(교감) 겸 기숙사 사감을 맡았으며, 1910년 대학과가 개설된 뒤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교수로 임명되었다. 하란사는 1907년부터 학생 동아리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선각자의 삶을 강조했다. 이문회에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한 류관순도 있었다.
* 1886년 개교한 이화학당은 1904년 중등과, 1908년 보통과와 고등보통과, 1910년 대학과를 신설하였다.


1911년 7월, 당시 개화파 정치인인 기독교계 인사 윤치호는 영문 선교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한국 선교 현장)>에 학당에 다니는 신여성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그는 1910년의 미국 방문 당시 목격한 미국의 공교육 직업교육체계를 소개하면서 국내 여성 교육의 불만 사항 6가지를 나열하고 “(신)여성들이 요리, 바느질, 빨래, 다림질을 할 줄 모른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윤치호(1865~1945)는 대한제국기 중추원 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조선 말기에 일본·미국 등에 유학했고 갑오개혁에 동참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의 주역이었으나 뒤에 변절하여 친일 부역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조사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하고 <친일 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이에 김란사는 1911년 12월 같은 잡지에 실은 ‘항의(A Protest)’라는 제목의 글로 윤치호의 의견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당시 유명한 남성 정치인과 벌인 이 논쟁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여성의 덕목을 우선시하는 윤치호의 남성 권위주의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윤치호의 글을) 조심스럽게 정독해 보니 그가 슬프게도 정보를 잘못 알고 있거나 맹목적인 편견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학당 졸업생들이 요리할 줄 모른다고 해서 비난받아서는 안 되며, 옷감 재단, 바느질, 빨래, 다림질을 모르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필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요리와 바느질을 잘하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김란사는 이화학당에서 미국 북 감리교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을 도와 성서와 영어를 가르치며 여성 계몽운동을 벌였다. 또 ‘자모회’를 구성하여 가정의학과 육아법 등을 지도하고 여성의 자각을 계몽 강연을 통해 촉구하였다.
세례명을 이름으로 삼은 데서 드러나듯 김란사에게 신앙은 ‘자신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교회는 당시 사회 개혁 운동과 근대적인 민족운동과 이어져 있었으며, 그 가치관은 ‘근대’의 지표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김란사는 기독교와 교회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했다.
이화학당 학생 자치 동아리인 이문회를 지도하며 민족 현실과 세계 정세를 가르치고 강연을 통해 여성 계몽 활동을 이어간 것도, 그가 꿈꾼 새로운 세상을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1916년 미국에서 베풀어진 세계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 그는 1918년 미국순회 강연을 통해 모금한 돈으로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기도 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고종의 통역도 맡았던 김란사는 자연 세계 정세를 살피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지피고 있었다. 그는 여성 교육과 계몽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구국운동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종이 1919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을 파견할 때 오하이오에서 유학한 이강과 교류한 바 있는 김란사도 동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한일 강제 병합의 부당성과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한 이 계획은 고종의 승하(1919.1.21.)로 무산되었다. 왕실 차원의 파견은 중단되었지만, 김란사는 기독교계와 중국 교포들의 후원으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월에 출국했다.
파리강화회의로 가는 길, 베이징에서 급사

베이징에서 잠시 머무르던 중 김란사는 3월 10일 베이징의 미 감리교회 부속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향년 45. 유행성 독감과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일제의 독살설이 제시되는 등 정확한 사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김란사는 우리나라의 근대 여성 1세대다. 그는 기혼자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고, 일본을 거쳐 자비로 미국에 유학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은 첫 여성이었다.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꺼진 등에 불을 켜라”라고 말했던 그는 스스로 등불이 되었다. 그는 류관순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알려주고 ‘선각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해 마지않았다.

유일한 혈육이던 딸이 18세에 사망해 남은 직계 혈족이 없었던 데다가 26년 뒤에 광복을 맞이하면서 꽤 오랫동안 김란사는 잊힌 존재로 남아 있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봉건적·가부장적인 인습이나 제도에 맞서고, 광복을 위한 김란사의 헌신이 다시 조명된 것은 친정 종손자가 김란사 애국지사 기념사업회를 결성하면서였다. 이에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2018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그의 위패가 봉안됐다.
자칫하면 유실될 뻔하다가 되살아난,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불꽃 같은 삶의 연대기는 이 난만한 21세기에도 적지 않은 여운으로 다가온다. 그는 여전히 “꺼진 등에 불을 켜라”고 뒷사람들에게 깨우치고 있지 않은가.
2025. 12.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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