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세죽, 두 혁명가 남편을 ‘반혁명’ 처형으로 여의고, 유배까지 되어야 했던 ‘꼬레예바’의 비극



*1975년 UN이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하기 전, 일제강점기에는 ‘국제 무산부인데이’ 곧 ‘국제 무산부인의 날’로 불리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선임

* <콤뮤니스트>는 중국 상하이에서 김단야·박헌영 등 ‘화요파’ 공산주의자들이 당 재건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위하여 발행한 회보이자 기관지다.

주세죽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1934년 1월 24일 김단야와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같은 해 김단야와 결혼했다. 그 무렵 김단야는 조선공산당의 최고위급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고,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소련에 사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1933)와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었는가>(1934) 등의 팸플릿을 외국 노동자 출판부에서 펴냈다. [관련 글 : 혁명가, 사회주의 소련에서 ‘반혁명’ 혐의로 처형되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5개월 남짓 공부한 뒤 외국 노동자 출판부에서 일하며 아들을 낳은 주세죽과 김단야는 지하운동 시절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박헌영과 함께 딸을 안고 찍은 1929년의 사진에 비길 만한 단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봄날은 너무 짧았다.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가 폐지되면서 김단야는 가족이 살던 관사를 비워달라는 독촉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러시아 전역에서 스탈린의 숙청이 진행 중이었다. 대대적 숙청이 이어지던 1937~1938년 2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158만 명, 처형으로 목숨을 잃은 이는 68만 명이 넘는 공포의 시대였다. 숙청의 광풍은 러시아에 망명한 외국인 혁명가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폐지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 김단야는 내무인민위원부로부터 ‘인민의 적’ 혐의를 받았다. 그가 ‘일제의 밀정’이 아니냐는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동료로부터 의심받는 차원이 아니라 숙청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서슬 푸른 추궁이었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9년 조공 재건 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할 때 적지 않은 동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는데 그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점, 그가 혁명가후원회 업무를 맡긴 김한(1887~1934, 2005 독립장)이 밀정으로 처형됐는데, 당시 왜 그의 정체를 몰랐던가 등을 캐어물었다.
김단야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이를 증명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코민테른 동방부의 임직원들이 구명에 나섰고, 이들의 제안에 따라 김단야는 장문의 해명서를 써서 제출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단야는 자신을 혁명 일선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코민테른은 내무 인민위원부에 조공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하고자 그 집행 여부를 물었는데, 회신은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로써 여러 달 동안 이어진 구명운동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1937년 9월, 언론인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모스크바에 망명해 있던 이성태가 코민테른에 낸 의견서는 낭떠러지에 버티고 선 김단야를 떠밀어버렸다. 그는 김단야가 화요파 출신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 중에는 밀정으로 전락한 자로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을 지목했다.
김단야의 처형 뒤 카자흐스탄으로 유배

그리고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 인민위원부는 김단야를 전격 체포했다. 김단야는 마침내 조공 지도자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내몰린 것이다. 1938년 2월, 소련 최고 인민 재판소 군사 법정은 그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고 판결하고 당일 바로 김단야를 처형했다.
비극은 김단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내인 주세죽의 삶도 만리타국 모스크바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백일을 갓 지난 아들 김비딸리이는 곧 죽었고, 보육원에서 자란 딸 비비안나는 9살로 1933년부터 이바노브에 있는 정치적 망명자를 위한 국제어린이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 체포된 주세죽은 두 달여 심문 끝에 사회적 위험 분자로 지목돼 5년간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지금의 알마티)로 유배됐다. 그는 유배지에서 피혁공장 개찰원과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그는 1943년 5월 형이 만료된 후에도 유배지에 잔류하였다. 1946년 7월부터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주 공업기업소에 있는 봉제 작업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남편의 친구, 혹은 친구의 아내와 결합은 동지들로부터 적잖은 비난을 받았지만, 주세죽은 남편의 체포 이후, 그의 생환을 기대하지 못했던 거로 추정된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박헌영이 1933년 다시 상하이에서 검거된 것을 그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최고 수뇌부인 남편이 일경의 가혹한 심문을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주세죽이 박헌영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46년 <프라우다> 신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주세죽은 열여덟 살이 된 딸에게 <프라우다>에 실린 기사를 오려 보냈다. 신문엔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 관련 기사가 있었는데 그는 ‘박헌영’ 아래에 밑줄을 긋고 딸에게 그가 아버지라고 말해줬다. 1946년 주세죽은 크질오르다에서 스탈린에게 간절하고 절박한 청원서를 써서 보냈다.

청원서는 자신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박헌영 동지의 처’라고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남편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조선에서 비합법 활동에 종사하다 1934년 박헌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김단야와 함께 일제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1937년 김단야가 체포됐고 자신도 카자흐스탄으로 5년간 추방되어 1943년에 유배 형기를 마쳤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지난 12년 동안 남편 박헌영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올해 1월에 <프라우다>를 통해 남편 박헌영이 살아 있으며 다시 혁명 활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진정 충실하게 일할 것이며 제 남편을 이전과 같이 보필할 것이라며 다시 혁명 활동에 종사하게끔 자신을 조선으로 파견해 달라고 간청했다.
만일 자신이 조선으로 가는 게 불가능하다면, 모스크바에서 살며 136학교에서 제9학년 과정을 밟고 있는 딸 박비비안나를 양육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빈다. 어려서부터 춤에 천부적인 재능을 선보였던 비비안나는 모이시예프 발레연구소의 차이코프스키 발레과에 재학 중이었다.
주세죽의 청원은, 공적인 삶이 모두 부정되는 숙청을 당함으로써 망명지 소련에서 사회주의자의 자격은 물론, 어머니의 권리조차 잃은 주세죽이 보내는, ‘사회주의자와 모권의 복권’을 호소하는 마지막 요청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조국은 그의 요구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헌영도 처형, 두 남자의 극적 생애
해방 후 북한에서 부수상과 외상을 지낸 박헌영은 1953년 3월 체포돼 1955년 재판에서 ‘미 제국주의 고용 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사형과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7월, 그는 김일성의 긴급 처형 지시에 따라 약식으로 처형됐다. ‘일제’냐, ‘미제’냐가 달랐을 뿐 주세죽과 살았던 두 남편, 김단야와 박헌영은 각각 간첩 혐의로 극적 생애를 마쳤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방직공으로 일하며 살던 주세죽은 1953년 말 박헌영이 국가기밀 누설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딸의 신변을 걱정하여 크질오르다에서 모스크바로 가던 도중에 폐렴에 걸려 모스크바에 도착 직후에 사망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은 1989년 주세죽을, 해체 후 러시아연방은 2001년에 김단야를 복권했다. 한국 정부는 2005년 김단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2007년에는 주세죽에게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1928년 주세죽과 박헌영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도피하던 함경선 기차 안에서 태어나 러시아 이고르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의 유일한 한인 무용수와 소련 국립 민속무용학과 교수를 지낸 박비비안나(1928~2013)는 2007년 부모의 나라에 와서 어머니의 훈장을 대리 수령했고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 해방을 꿈꾼 젊은이들이 교직해 낸 역사와 사랑은 그러나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주세죽이 사랑했던 두 남자, 김단야는 사회주의의 조국 소련에서, 박헌영은 한반도 북쪽에 수립한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각각 적의 간첩으로 몰려서 처형됐다. 같은 사회주의자였지만 하나는 해방 전에 죽임을 당해 조국의 기림을 받았고, 하나는 스스로 한반도 북쪽을 선택했지만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됐다.

주세죽이 복권되고 난 2년 뒤,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그들이 혁명의 전범으로 따랐던 소비에트연방도 붕괴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이념이 갈라놓은 남북의 대립과 갈등, 분단 76년의 현실 앞에서 주세죽이 박헌영과 함께 나누고 살랐던 혁명의 열정은 지금 그들의 낡은 가족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바래어 가고 있다.
2026. 1.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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