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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의 ‘모던걸’, 또는 ‘코레예바’의 사랑과 혁명

by 낮달2018 2026. 1. 31.

주세죽, 두 혁명가 남편을 ‘반혁명’ 처형으로 여의고, 유배까지 되어야 했던 ‘꼬레예바’의 비극

▲ 1929년 모스크바의 주세죽. 남편 박헌영과 1928년 함경선에서 낳은 딸영(비비안나)과 함께.

부부가 아기를 안고 찍은 가족사진이다. 1929년 모스크바, 박헌영(1900~1955)은 국제레닌대학에,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두 대학은 코민테른이 운영하는, 세계 각국의 혁명 간부를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주세죽이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식민지 약소민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고, 국제레닌대학은 코민테른* 비서부가 직영하는 최상급 간부를 위한 학교였다.

 

* 코민테른은 세계 각국 공산당 및 대표적 공산주의 단체의 연합체이자 지도 조직으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칭이다. ‘제3인터내셔널’로 불리기도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승리로 이끈 레닌과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경험과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전 세계에 확산시키고, 새롭게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정립하기 위하여 코민테른을 만들었다.

 

혁명가 부부의 단란했던 시절

 

입학이 허용된 학생들에게 두 대학은 기숙사와 장학금, 의복과 음식 등을 제공했다. 코민테른이 제공한 정치 망명가들을 위한 집에서 생활비 지원을 받으며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음은 두 사람에 대한 코민테른의 신임이 두터움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조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혁명가의 미래는 쉽게 점칠 수 없을 만큼 극적이었고, 곳곳에 위험과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살면서 아이를 기르고 대학에 다니는 단란한 생활은 그러나 길지 못했다. 그는 1932년 당 재건을 위해 상하이로 갔고, 이듬해 남편이 체포된 뒤 다시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후의 삶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3·1운동 시위 기획자, 여성해방운동의 주역으로

 

▲ 박헌영(1900~1955)은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주세죽은 1899년 함경남도 함흥의 중농(中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관북 제일의 명문, 함흥 영생여학교 고등과에서 2년간 공부했다. 1919년 함흥에서 3·1운동 때 시위를 기획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개월 동안 유치장에 갇혔다가 공소가 끝나 석방되었다.

 

1921년 4월 중국 상하이로 가서 안정씨여학교에 입학하여 영어와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로 음악에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이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허정숙*을 만나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고 고려공산당 청년 조직 준비 모임에 참여했다. 1922년 5월 귀국한 뒤, 상하이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자 박헌영(1900~1956)*과 결혼하였다.

 

* 허정숙(1902~1991)은 일제강점기 때,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등을 지냈다.

 

*박헌영(1900~1956)은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하였다. 1925년 그가 속한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고려공산청년회를 창설하였다. 1946년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을 거쳐 1948년 9월 북한의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으나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던 시기에 미국의 첩자·정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1956년 처형되었다.

 

1924년 5월, 주세죽은 허정숙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종래의 계몽적 여성 교육론을 비판, 지양하고 사회주의적인 여성해방론을 주장하였는데, 선언문에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여자는 가정과 임금과 성의 노예가 될 뿐이오, 생활에 필요한 각 방면의 일을 힘껏 하여 사회에 공헌하였으나 횡포한 남성들이 여성에게 주는 보수는 교육을 거절하고 모성을 파괴할 뿐이다. 더욱이, 조선 여성은 그 위에 동양적 도덕의 질곡에서 울고 있다. 비인간적 생활에서 분기하여 굳세게 굳세게 결속하자.”

 

주세죽은 여성해방을 주제로 한 강연의 강연자로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4년 12월에는 신흥청년동맹 주최의 ‘연말 대연설회’에서 ‘여성과 반역’이라는 주제로, 1925년 3월 8일* ‘국제 무산 부인의 날’ 기념 대강연회에서는 ‘부인 해방의 원동력’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75년 UN이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하기 전, 일제강점기에는 ‘국제 무산부인데이’ 곧 ‘국제 무산부인의 날’로 불리었다.

 

같은 해 8월에 그는 조선여성동우회 간부인 허정숙·김조이와 함께 ‘단발’을 감행하였는데, 당시 단발은 여성해방을 상징함과 동시에 낡은 제도의 구속을 타파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어서 같은 달 잡지 <신여성> 제3권 8호에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를 발표하는 등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강연이나 기고로 그는 여성해방운동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주세죽은 1927년 5월 김활란·박순천·박차정 등과 함께 여성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결성에 참여했고, 같은 해 10월 잡지 <별건곤> 9호에 ‘제일 미운 일, 제일 보기 싫은 일-남자의 자기만 사람인 척하는 것’이라는 글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 근우회는 1927년에 조직되었던 민족주의 계열 및 사회주의 계열 여성 운동가들을 망라한 식민지 시기 최대의 여성 단체다.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된 항일 여성 단체들이 1927년 신간회의 탄생을 계기로 통합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고자 조직하였다. 강령으로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운동 목표로는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성 자신의 해방과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양대 방향이 제시되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선임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김재봉(1890~1944)을 책임 비서로 선임한 조선공산당(조공)이 창립되었고, 다음날,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총지도기관 고려공산청년회(공청)가 조직되었다. 박헌영이 공청의 책임 비서로, 김단야(1901~1938)가 중앙위원으로, 주세죽은 중앙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연말,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신의주사건)’이 터지면서 공청의 책임 비서 박헌영과 주세죽을 비롯한 당원 1백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의주뿐 아니라 간도의 조공 근거지까지 털렸다. 주세죽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듬해 6월부터 8월까지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관련자로 다시 체포되었고 8월 20일경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은 1926년 6월 10일 마지막 황제 순종 장례식을 계기로 당시 공청의 책임 비서인 권오설의 주도하에 민중봉기를 계획하였는데,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의 100여 명의 당원이 체포된 사건이다.

▲ 동방노력자공산대학(왼쪽 건물)은  아시아 식민지 및 소비에트 소수민족 혁명가를 양성한 2년제 교육기관이다. 가운데 건물은 이스베시티아 신문사다.

1928년 8월, 주세죽은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과 함께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요양하던 중 일경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하였으며, 함경선 기차에서 딸 영(影, 비비안나)을 출산하였다.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주세죽 부부는 코민테른이 제공한 정치 망명가들을 위한 집에서 들었고 이듬해 각각 국제레닌대학과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박헌영이 지어준 러시아 이름 ‘꼬레예바’로 비비안나를 기르며 공부하는 단란한 시간은 짧았다. 1932년 1월 그는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 지령을 받고 4살이 된 딸을 모스크바 근처 이바노바에 있는 정치적 망명자를 위한 국제어린이집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기고 박헌영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넘어갔다.

 

그들은 프랑스 조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먼저 상하이에서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김단야로부터 잡지 <콤뮤니스트>* 업무를 인수했다. 박헌영은 김단야와 함께 <콤뮤니스트>를 국내로 들여오고 이를 고리로 당 재건의 기반을 닦아, 국내에 20개 남짓한 비합법 조직을 유지했다.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이두수’라는 가명을 쓰며 활동하였으나 1933년 김단야를 추적하던 일경에게 미행당하다가 7월 5일 상하이 부두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박헌영의 체포된 이후 국내의 모든 연결망이 무너졌다.

 

* <콤뮤니스트>는 중국 상하이에서 김단야·박헌영 등 ‘화요파’ 공산주의자들이 당 재건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위하여 발행한 회보이자 기관지다.

 

박헌영 체포 뒤, 김단야와 함께 모스크바로

 

▲ 김단야(1901~1938)는 1930년대 조선공산당 최고위급 지도자였다.

주세죽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1934년 1월 24일 김단야와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같은 해 김단야와 결혼했다. 그 무렵 김단야는 조선공산당의 최고위급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고,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소련에 사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1933)와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었는가>(1934) 등의 팸플릿을 외국 노동자 출판부에서 펴냈다. [관련 글 : 혁명가, 사회주의 소련에서 반혁명혐의로 처형되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5개월 남짓 공부한 뒤 외국 노동자 출판부에서 일하며 아들을 낳은 주세죽과 김단야는 지하운동 시절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박헌영과 함께 딸을 안고 찍은 1929년의 사진에 비길 만한 단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봄날은 너무 짧았다.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가 폐지되면서 김단야는 가족이 살던 관사를 비워달라는 독촉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러시아 전역에서 스탈린의 숙청이 진행 중이었다. 대대적 숙청이 이어지던 1937~1938년 2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158만 명, 처형으로 목숨을 잃은 이는 68만 명이 넘는 공포의 시대였다. 숙청의 광풍은 러시아에 망명한 외국인 혁명가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 모스크바에 있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건물. 김단야는 이 대학 조선학부장으로 근무했다

갑작스레 폐지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 김단야는 내무인민위원부로부터 ‘인민의 적’ 혐의를 받았다. 그가 ‘일제의 밀정’이 아니냐는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동료로부터 의심받는 차원이 아니라 숙청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서슬 푸른 추궁이었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9년 조공 재건 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할 때 적지 않은 동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는데 그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점, 그가 혁명가후원회 업무를 맡긴 김한(1887~1934, 2005 독립장)이 밀정으로 처형됐는데, 당시 왜 그의 정체를 몰랐던가 등을 캐어물었다.

 

김단야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이를 증명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코민테른 동방부의 임직원들이 구명에 나섰고, 이들의 제안에 따라 김단야는 장문의 해명서를 써서 제출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단야는 자신을 혁명 일선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코민테른은 내무 인민위원부에 조공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하고자 그 집행 여부를 물었는데, 회신은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로써 여러 달 동안 이어진 구명운동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1937년 9월, 언론인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모스크바에 망명해 있던 이성태가 코민테른에 낸 의견서는 낭떠러지에 버티고 선 김단야를 떠밀어버렸다. 그는 김단야가 화요파 출신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 중에는 밀정으로 전락한 자로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을 지목했다.

 

김단야의 처형 뒤 카자흐스탄으로 유배

▲ 국제레닌대학 시절의 김단야와 주세죽.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단야, 가운데 줄 왼쪽 세 번째가 주세죽이다.

그리고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 인민위원부는 김단야를 전격 체포했다. 김단야는 마침내 조공 지도자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내몰린 것이다. 1938년 2월, 소련 최고 인민 재판소 군사 법정은 그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고 판결하고 당일 바로 김단야를 처형했다.

 

비극은 김단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내인 주세죽의 삶도 만리타국 모스크바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백일을 갓 지난 아들 김비딸리이는 곧 죽었고, 보육원에서 자란 딸 비비안나는 9살로 1933년부터 이바노브에 있는 정치적 망명자를 위한 국제어린이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 체포된 주세죽은 두 달여 심문 끝에 사회적 위험 분자로 지목돼 5년간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지금의 알마티)로 유배됐다. 그는 유배지에서 피혁공장 개찰원과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그는 1943년 5월 형이 만료된 후에도 유배지에 잔류하였다. 1946년 7월부터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주 공업기업소에 있는 봉제 작업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남편의 친구, 혹은 친구의 아내와 결합은 동지들로부터 적잖은 비난을 받았지만, 주세죽은 남편의 체포 이후, 그의 생환을 기대하지 못했던 거로 추정된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박헌영이 1933년 다시 상하이에서 검거된 것을 그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최고 수뇌부인 남편이 일경의 가혹한 심문을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주세죽이 박헌영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46년 <프라우다> 신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주세죽은 열여덟 살이 된 딸에게 <프라우다>에 실린 기사를 오려 보냈다. 신문엔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 관련 기사가 있었는데 그는 ‘박헌영’ 아래에 밑줄을 긋고 딸에게 그가 아버지라고 말해줬다. 1946년 주세죽은 크질오르다에서 스탈린에게 간절하고 절박한 청원서를 써서 보냈다.

▲ 1949년 8월 박비비안나가 평양을 방문하여 아버지인 박헌영(당시 50세)와 함께 찍은 사진.

청원서는 자신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박헌영 동지의 처’라고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남편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조선에서 비합법 활동에 종사하다 1934년 박헌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김단야와 함께 일제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1937년 김단야가 체포됐고 자신도 카자흐스탄으로 5년간 추방되어 1943년에 유배 형기를 마쳤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지난 12년 동안 남편 박헌영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올해 1월에 <프라우다>를 통해 남편 박헌영이 살아 있으며 다시 혁명 활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진정 충실하게 일할 것이며 제 남편을 이전과 같이 보필할 것이라며 다시 혁명 활동에 종사하게끔 자신을 조선으로 파견해 달라고 간청했다.

 

만일 자신이 조선으로 가는 게 불가능하다면, 모스크바에서 살며 136학교에서 제9학년 과정을 밟고 있는 딸 박비비안나를 양육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빈다. 어려서부터 춤에 천부적인 재능을 선보였던 비비안나는 모이시예프 발레연구소의 차이코프스키 발레과에 재학 중이었다.

 

주세죽의 청원은, 공적인 삶이 모두 부정되는 숙청을 당함으로써 망명지 소련에서 사회주의자의 자격은 물론, 어머니의 권리조차 잃은 주세죽이 보내는, ‘사회주의자와 모권의 복권’을 호소하는 마지막 요청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조국은 그의 요구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헌영도 처형, 두 남자의 극적 생애

 

해방 후 북한에서 부수상과 외상을 지낸 박헌영은 1953년 3월 체포돼 1955년 재판에서 ‘미 제국주의 고용 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사형과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7월, 그는 김일성의 긴급 처형 지시에 따라 약식으로 처형됐다. ‘일제’냐, ‘미제’냐가 달랐을 뿐 주세죽과 살았던 두 남편, 김단야와 박헌영은 각각 간첩 혐의로 극적 생애를 마쳤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방직공으로 일하며 살던 주세죽은 1953년 말 박헌영이 국가기밀 누설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딸의 신변을 걱정하여 크질오르다에서 모스크바로 가던 도중에 폐렴에 걸려 모스크바에 도착 직후에 사망했다.

▲ 기차 안에서 태어나 jd고르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의 유일한 한인 무용수와 소련 국립 민속무용학과 교수를 지낸 박비비안나(1928~2013).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은 1989년 주세죽을, 해체 후 러시아연방은 2001년에 김단야를 복권했다. 한국 정부는 2005년 김단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2007년에는 주세죽에게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1928년 주세죽과 박헌영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도피하던 함경선 기차 안에서 태어나 러시아 이고르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의 유일한 한인 무용수와 소련 국립 민속무용학과 교수를 지낸 박비비안나(1928~2013)는 2007년 부모의 나라에 와서 어머니의 훈장을 대리 수령했고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 해방을 꿈꾼 젊은이들이 교직해 낸 역사와 사랑은 그러나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주세죽이 사랑했던 두 남자, 김단야는 사회주의의 조국 소련에서, 박헌영은 한반도 북쪽에 수립한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각각 적의 간첩으로 몰려서 처형됐다. 같은 사회주의자였지만 하나는 해방 전에 죽임을 당해 조국의 기림을 받았고, 하나는 스스로 한반도 북쪽을 선택했지만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됐다.

▲ 주세죽의 삶을 그린 조선희(세 여자)와 손석춘(코레예바의 눈물)의 장편소설.

주세죽이 복권되고 난 2년 뒤,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그들이 혁명의 전범으로 따랐던 소비에트연방도 붕괴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이념이 갈라놓은 남북의 대립과 갈등, 분단 76년의 현실 앞에서 주세죽이 박헌영과 함께 나누고 살랐던 혁명의 열정은 지금 그들의 낡은 가족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바래어 가고 있다.

 

 

2026. 1.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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