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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대한 독립’과 결혼한 조선의 ‘혁명 여걸’

by 낮달2018 2026. 2. 3.

독립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담대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 1927년 5월 미국 파크(Park) 대학을 졸업하면서 찍은 사진(35살)

그는 평생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한 독립과 결혼하였다”라는 진부한 표현마저 그의 삶을 아우르는 데 모자란다. 그는 두 차례의 투옥 중에 여성으로서 치욕적 고문을 받아 한쪽 가슴을 잃고 늘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특별한 저고리를 입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3·1운동의 투사로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참혹한 고문을 견뎌냈고, 무장투쟁을 염두에 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로 불린 사람이었다. 그는 여성 교육의 초창기에 30년간,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에서 7개의 해외 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한시도 독립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래고 힘겨운 공부조차 ‘인재 양성과 경제력 진흥’,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었다.

 

김마리아, 1927년 5월 미국 파크(Park) 대학을 졸업하면서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 속의 그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 시기가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 실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고문으로 얻은 지병을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아야 했던 이 강골의 독립운동가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 전경. 김마리아는 이 교회에서 서구적 근대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김마리아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소래교회)가 설립된 황해도 장연 소래 출신이다. 아버지는 한학자로,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대지주였다. 그는 학교와 교회를 통해 서구적 근대교육을 받고 기독교적 인생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1887년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였던 엘레스(A. J. Ellers)가 설립한 연동여학교(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를 다니면서 안창호, 김규식 같은 독립운동가와 절친한 숙부 김필순과 고모 김순애의 영향을 받아 남다른 민족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는 정신여학교에서 독실한 신앙심과 애국심, 그리고 남녀 평등을 지향하는 여권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1910년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그는 18912년 가을에 1년간 일본 히로시마 고등여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년 후 그는 귀국하여 모교인 정신여학교 수학 교사로 부임했다. 1915년 그는 루이스 교장의 주선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학원에서 공부했다.

▲ 일본여자학원 본과 졸업 사진. 김마리아는 당당하게 한복을 입어 조선인임을 알렸다. 둘째 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마리아.
▲ 2·8독립선언서(1919년 2월 8일)
▲ 상하이 임시정부가 펴낸 <독립신문>에 실린 2·8독립선언 관련 기사(1919년 8월 26일)

김마리아는 재일본 유학생들이 추진하고 있던 2·8 독립선언 등 3·1운동의 준비 단계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도쿄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의 회장으로 재일 조선 청년독립단의 2·8 독립선언 대회에 참가해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은 없었다. 그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독립운동에서 여성들의 참여 확대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1919년 2월 17일, 졸업을 포기하고 김마리아는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서 유학하던 정신여학교 후배 차경신(1993·애국장)과 함께 일본 여인으로 변장하여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기모노의 허리띠에 숨겨 귀국했다. 그는 3·1운동의 격랑 속에서 여학생의 조직화에 주력했다. 도쿄 여자 유학생 그룹과 경성의 여학교 대표자들의 연합 기구를 조직하려는 시도는 비밀이 새어 나가 그는 모교 기숙사에서 일경에게 체포됐다.

 

총독부 경무 총감부에 끌려간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른 동지들과 함께 혹독한 신문과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여성으로서 참을 수 없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다. 김마리아는 출소 후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코의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고질병인 유양돌기염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평생을 위턱뼈 축농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그러나 내 정신은 똑똑해서 ‘너희가 할 대로 다 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빼내리라’ 하고 생각했어.”

▲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고 살아야했던 김마리아는 오른쪽 섶 길이가 짧게 지어진 저고리를 입어야 했다.

  그는 가혹한 신문을 받으면서도 시종 당당하기만 해서, 당시 일본 검사는 “너는 영웅이다. 너보다도 너를 낳은 네 어머니가 더 영웅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김마리아는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김마리아는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 동안 수용되었다가 7월에 예심의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고문으로 몸은 망가졌지만, 그는 출옥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1919년 10월 정신여학교 부교장인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L.D.Miller) 사택 2층에서 비밀리에 이혜경, 황에스더, 장선희, 이정숙, 김영순, 신의경, 백신영 등 여성 지도자 16명을 모아 지난 3월 투옥 지사에 대한 옥바라지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 애국부인회 임원들.1.김영순, 2.황에스터 3.이혜경 4.신의경 5.장선희 6.이정숙 7.백신영 8.김마리아 9.유인경

애국부인회는 서울에는 본부, 지방에 지부를 두고 본부 부서를 대폭 개편하였다. 군자금 모금과 송달을 최대 임무로 보고 재무부장과 재무주임을 두어 주력하던 종래의 부서와 달리 적십자 부장과 결사 부장을 각 2명씩 두고, 지부에도 결사대를 편제하여 항일 독립전쟁에 임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한 것이다. 애국부인회는 궁극적으로 부인들을 각성시켜 민주주의 이념 아래 국권과 인권의 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옛말에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 사랑하듯 하라 하였거니와… 국민 모두가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니… 아,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다. 빼앗긴 인권을 찾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적을 향해서 우리 부인들에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서’ 중에서

 

배신……, 기소된 간부들에 가해진 끔찍한 폭력

 

애국부인회는 활동한 지 두 달 만에 약 6천 원이라는 거액의 군자금을 거두어 상하이로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교회 지도급 여성과 여교사·간호원 등이 주축인 백수십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말께 한 간부*의 밀고로 경성과 지방의 간부와 회원들이 경상북도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일제히 체포됐다. 52명이 체포돼 대구경찰서에 압송되어 조사받았으나 김마리아 등 9명만 기소되었다.

 

* 밀고자는 애국부인회의 전신인 혈성단애국부인회를 주도해 조직한 오현주(1894~1989)다. 그는 독립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했고, 1949년 반민특위에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 대구교도소에서 출옥한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임원들과 함께한 김마리아(원안).

혹독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는 김마리아의 기상은 여전히 드높아서 그를 심문한 일본 검사는 “김마리아는 인격과 재질이 비범한 천재나, 대담하고 거만하며, 가증한 것은 ‘나는 일본의 연호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니 그의 눈에 일본제국이란 것은 없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경찰의 끔찍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특히 김마리아는 여기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육신과 정신의 파괴를 겪어야 했다. 발가벗기고, 인두와 쇠꼬챙이가 쓰이는 끔찍한 고문은 여성의 영혼을 짓밟는 폭력이었다. 그가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특별한 저고리를 입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흉터를 남긴 것도 여기서였다.

 

그는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내몰렸다. 살아서 나갈 가망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일 만큼 망가진 그의 모습을 보고 기독교 선교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사경을 헤매는 그의 상태는 일제로서도 보석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의 선교사 사택 등으로 주거 제한을 받은 상태로 풀려는 김마리아는 생명을 위협하는 병증, 귀와 코에 들어찬 화농을 치료하기 위하여 무려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1921년 4월, 김마리아는 사가(私家)에서 요양하고자 경성 성북동의 농가에 월세방을 얻었다. 6월 20일에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었고, 아흐레 뒤에 김마리아는 농가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하여 인력거에 오른 그는 다음 날 새벽 인천으로 갔고 7월 초에 상하이 망명자들의 가족과 함께 밀항선에 올라 7월 21일에야 산둥반도 웨이하이(威海) 항에 닿을 수 있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진행된 망명은 망명과 정착 비용으로 4천 원의 거금을 지원한 선교사 맥큔(G.S.McCune)과 임시정부 교통부 소속 요원 윤응념의 도움으로 성사되었다.

 

상하이로 망명, 국민대표회의에서 개막 연설

 

그의 탈출 소식은 국내에 널리 알려져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고, 친지와 동료는 물론, 그를 지켜본 국민도 그의 망명을 기뻐해 마지않았다. 상하이의 망명자들도 김마리아를 열렬히 환영했고,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환영회를 개최해 주었다. 그는 3·1운동을 즈음하여 여성의 투쟁과 수난을 대표한 상징적 인물로 부상해 있었다.

 

당시 임정에서는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제청되었다. 김마리아는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고, 국민대표회의에는 애국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안창호 등 지도급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민 대표자 수백 명 앞에서 개막 연설을 하였는데, 이는 한국 여성의 위상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역사적 장면이기도 하였다.

▲ 상하이의 모이당(목은당, 현 무어교회),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국민대표회의에는 임정의 존속을 주장하는 김구·이동녕이 불참한 가운데, 임정의 정통성을 근거로 임정을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는 안창호·여운형 등의 개조파와 임정을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나아갈 것은 주장하는 신채호·박용만 등의 창조파가 대립하였다. 김마리아는 시종일관, 임정이 수만의 유혈로 성립한 국민의 정부이므로 잘못이 있다면 개조하여 통일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5개월의 난상 토론 끝에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지만, 김마리아는 이를 회의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쪽 주장이든 모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노력이고 활동이라고 평가하면서 민족 독립의 희망적인 과정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으로의 두 번째 망명길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의 결렬 직후인 1923년 6월 중국 여권을 가지고 미국 유학을 위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와 대한 여자애국단* 주최의 환영회 겸 기념식 등에 참석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실력 양성과 독립 의지의 통일이라고 역설하였다.

 

* 대한여자애국단은 3·1운동 직후 캘리포니아 지역의 애국적 한인 여성들을 결집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대규모 항일 여성 단체다.

 

그가 다뉴바(Dinuba)*에서 한 교포 대상의 연설에서 밝힌 대로 ‘실력 양성’의 독립론을 실천하였다. 그는 10여 년간 파크대, 시카고대, 컬럼비아대, 뉴욕신학원 등에서 사회학, 교육행정학, 종교 교육학을 공부했고 현지에서 만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다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 미국 중부 캘리포니아의 도시.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다뉴바에서 3·1운동 기념식을 통해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각종 명목의 독립운동 모금에 앞장서서 이를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만주에 있는 민족지도자들의 안전을 위한 민중 기도회를 개최했다.

▲ 김마리아가 공부한 미주리주 파크대학의 교회.

 미주리대학에서 여름 계절학기 수강을 포함하여 파크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와 평생 교사 자격증을 따고, 시카고대학원,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 뉴욕신학대학 종교교육학과에서 공부했다. 유학이라고 하지만,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가정부, 요양병원 간호 보조원, 대학 도서관의 사서 보조. 쿡, 가사 돌보기, 여급, 점원 행상 등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932년까지 약 9년간 미국에서 학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현지에서 만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다시 여성 동포의 대동단결과 재미 한인사회 운동의 후원을 목적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해서 활동을 벌였다.

▲원산의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에서 강의하던 시절의 김마리아. 앞줄 왼쪽 끝이 김마리아.

1932년 7월, 고국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 교수로 취임했을 때, 김마리아는 마흔이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기독교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던 중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성경을 통해 조국과 민족 사랑을 가르치는 데 진력했다.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하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하고,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까지 신사참배에 나섰지만, 그가 이끄는 여전도회는 공식적 모임을 회피함으로써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수저 한 벌만 남기고 떠나다

 

1944년 3월 13일, 김마리아는 광복을 1년여 앞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두 차례의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향년 52.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이 담대한 여성은 수저 한 벌만 유품으로 남겼다. [관련 글 :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수저 한 벌만 남기고 떠나다]

▲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보라매청소년수련관 앞에 세워진 김마리아 동상.

김마리아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대동강에 뿌려졌다. 해방 뒤 정부는 1962년 김마리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어록비가 세워졌다. 그것은 1931년 2월, 미국 한국학생연맹(북미대한인유학생 총회)에서 한 연설을 줄인 것이었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원문은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지도력과 사상의 독립이 필요합니다.”)

▲ 서울 종로구 연지동 옛 정신여학교 교정에 세워진 김마리아-동상

강건했던 독립운동가도 총독부의 집요한 공작과 회유 앞에서 흔들리고 변절하는 예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혹독한 고문과 지속적인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가 떠나자 도산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 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보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2007년 ‘여성 인물을 화폐에!’라는 이름의 여성 단체는 류관순·허난설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10만 원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하자며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마리아는 지폐의 도안으로 오르기에 충분하고 위대한 민족 해방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2026. 2.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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