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9일, 인혁당재건위 피고 8명, 형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
‘1975년 4월 9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프고 슬픈 야만의 시간이었다. 그날 새벽, 서울구치소에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4월 8일, 판결이 확정된 후 불과 18시간 만이었다.
1975년 4월 9일의 ‘사법살인’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에서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한 것은 그것이 유신 독재정권에 의한 명백한 ‘사법살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국가에 의해 살해된 서도원(53·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41·경기여고 교사), 이수병(40·일어학원 강사), 우홍선(46·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48·양봉업), 여정남(32·전 경북대 학생회장), 하재완(44·건축업), 도예종(52·삼화토건 회장) 등 여덟 명은 4월 혁명을 거치면서 사회변혁 운동에 나선 이들이었다.
이들은 5·16 쿠데타 이후 일관되게 박정희 독재와 싸워온 통일운동가들이었다. 서도원과 이수병 등은 쿠데타 직후에, 도예종·김용원·우홍선·송상진·하재완 등은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 각각 투옥된 바 있었다. 여정남은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내면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청년이었다.
1964년은 박정희가 주도한 한일회담이 재개되자 그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시기였다. 제1차 인혁당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검찰이 증거가 없다며 기소를 거부하는 등 무리한 수사로 국민의 지탄받으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사건조작의 배경이었던 한일협정은 1965년에 체결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1969년에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1972년에는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로 치닫기에 이르렀다. 유신독재에 대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1974년에 정권은 다시 2차 인혁당 사건을 일으켰다. 1차 인혁당 사건 발생 10년 만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그랬던 것처럼 유신정권은 2차 인혁당 사건을 통해 정치적 위기를 넘고자 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맞섰던 이들 민족 민주 운동가들을 처형함으로써 체제의 장애를 없애고자 했던 것이었다.
유신 이후, 체제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화되자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담화의 요지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이하 ‘단체’라 한다)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1항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수사상황을 발표하며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천 24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고, 그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되었다. 유신정권의 반대세력에 대한 전방위적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5월 27일, 비상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발표한다. 조작으로 얼룩졌던 1차 인혁당의 망령을 다시 불러낸 것이었다. 검찰부는 이들이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곧 세칭 인혁당 재건위원회(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유신정권 아래서 긴급조치란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초헌법적 권리를 국가에 부여한 것이었다. 긴급조치 4호 위반자들이 민간인인데도 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긴급조치 4호에 민청학련 등 단체에 가입하거나 관련 활동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 수색해 비상 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11일, 비상 보통군법회의 재판부는 군 검찰부의 구형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7월 13일에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32명 중 이철, 유인태 등 7명에게는 사형, 나머지 관련자에겐 무기징역(7명), 징역 20년(12명), 징역 15년(6명) 등이 선고됐다. 이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에 의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형 확정 18시간 만의 사형집행
이듬해인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등 39명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법정엔 피고인은 물론 변호인조차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법원 전원재판부(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는 10분간 판결문을 읽은 뒤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을 발표하고 퇴정했다.
우리 역사에서 서슬 푸른 독재 권력 앞에서 사법부는 늘 무력했다. 결심에서 ‘법은 권력의 시녀’라고 성토한 강신옥 변호사를 구속한 것이 그들의 응답이었다. 여덟 명의 생사가 걸린 재판은 이렇듯 간단히 확정되었다. 분노한 가족들의 절규와 항의가 이어졌지만 18시간 후 사형이 집행된다는 걸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앞두고 이들의 사형집행 계획은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사건 수사를 지휘한 중앙정보부 국장 이용택은 뒷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곧바로 (사형)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한 것이다. 서울구치소의 교도관들도 4월 8일부터 퇴근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세계 최악의 사법살인, 조작부터 사형까지 ‘박정희 작품’]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1963~1969)을 지내다 미국으로 망명했고 1979년 실종되었던 김형욱도 자신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1977)에서 제2차 인혁당을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그의 심복 이용택이 10년 전에 문제 되었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
정권은 주검까지 빼앗았다. 경찰은 사형집행 뒤 성당으로 향하던 일부 희생자들의 시신을 크레인까지 동원해 탈취해 일방적으로 화장했다. 이는 고문 흔적을 감추고 장례미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인혁당 사건조작 의혹’이 증폭되는 것과 국민적 항의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국외의 여론도 한국에서의 야만을 성토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NYT)>는 “박정희의 근대민주주의는 조지 오웰의 1인 전제정치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 주일 미국대사 라이샤워의 기고 ‘비참한 길을 걷는 한국’(1974. 6. 8.)을 실었다.
또 ‘한국에 있어서의 탄압’(7. 22.)이란 사설을 게재, “북한과 구별하기 힘든 독재가 계속된다면 주한미군이 장기 주둔할 수 없다. 워싱턴과 도쿄가 공동으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와 <타임스>도 유신정권의 독재와 민주화 운동 탄압 실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이 같은 외국 언론의 보도는 검열 때문에 국내 언론에 실리지는 못했지만, 유인물 등으로 대학과 개신교·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대해 유신정권은 형법 제104조의 2에 ‘국가모독죄’(제정: 1975.3.25. 폐지: 1988.12.31.)를 신설해 대응하였다.
유족들의 삶, 진상 규명 운동
가장을 잃은 유족들의 삶을 ‘필설’로는 형용하지 못한다. 그 자신 해방 공간에서 좌익 활동에 참여한 부친을 둔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작가 김원일은 2005년 ‘인혁당 사건’을 다룬 연작소설집 <푸른 혼>(이룸)을 펴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되었다는 작가는 “당면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한다는 데 각성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엄혹한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관망하게 되었다’는 그는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의식했던 것 같다. [관련 기사 : 32년 만의 신원(伸寃), 인혁당 희생자들의 <푸른 혼> ]
중편 여섯 편 가운데 하나인 ‘임을 위한 진혼곡’은 하재완의 부인을 서술자로 한 작품이다. 작품은 유족들이 ‘간첩’이거나 ‘빨갱이’로 손가락질받으며 살아야 했던 통한의 세월, 죽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등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개하고 있다.
“그런 당신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간첩이라니! 당신이 절대로 빨갱이일 리는 없다고 확신했던 저로서는 갠 날에 만난 날벼락이었습니다. 간첩이니 빨갱이라면 보통 인간이 아닌 흉악무도한 폭도요 상상 속의 횡포한 괴물로 인식되는 세상이라, 이웃들은 우리 집을 마치 시한폭탄 저장고나 전염병 환자의 주거처럼 취급했습니다.
(……) 만든 음식을 돌려먹으며 사이좋게 지냈던 이웃들이 어느 날 하루부터 우리 집 출입은커녕 우리 집 앞에선 고개를 돌린 채 잰걸음으로 지나쳤고 우리 집을 피해서 다른 길로 둘러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저는 하루아침에 간첩 마누라로, 빨갱이 여편네로 둔갑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대구 집으로 돌아와 있는데 이웃 할머니가 바깥에 나가 보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싶어 놀라 뛰어나갔더니, 동네 꼬마들이 이제 걸음마 정도나 제대로 떼던 네 살 난 막내아들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니며 때리다 못해 나무에 묶어놓고, 빨갱이 자식이나 총살시킨다며 끔찍한 놀이를 하고 있지 뭐예요.
철없는 아이들이 그런 짓궂은 장난을 벌이는데도 동네 아주머니들은 말리기는커녕 팔짱 끼고 구경하며 웃고 있더라고요. 우리 집을 감시하던 사복형사까지 그 작태를 다 보았으니깐요. 그때 이 어미 심정이 어떠했겠어요.
그 며칠 뒤, 초등학교 2학년 둘째 딸아이가 학교 소풍을 가서 점심밥을 먹는데, 너희 아버지 간첩 맞제? 하며 도시락에다 개미를 집어넣고 돌팔매질을 하자 마침 자식 소풍에 따라왔던 학부모가 말려, 딸아이는 나무 뒤에 숨어서 울며 도시락을 먹었다고 합니다.”
작품의 행간마다 흥건히 고인 피눈물은 단지 몇 줄의 글로 줄일 수 없다. 이들에게 ‘나라’는, 그리고 ‘역사’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제2 인혁당 사건의 진실, 그 야만적 국가 범죄가 수면 밖으로 나오는 데는 적어도 27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1998년 11월, ‘민주화운동 유가족 협의회’ 소속 가족들은 ‘민족 민주열사 명예회복 위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앞 농성을 시작했다. 이 농성은 이듬해 12월 29일까지 422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명예회복법’과 ‘의문사 진상규명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직권으로 인혁당 사건 구속자였던 ‘장석구 선생 옥중사망 사건’을 조사해 2002년 9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2월 10일, 서울지방법원에 사형당한 8명에 대한 재심이 신청되었다.
“대체 국가는 무엇이며 역사는 또 무엇인가”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가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의 고문 조작 사실을 인정하자 20일 후, 서울지법은 2차 인혁당 사건의 재심을 결정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23부는 사형수 8인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다. 이듬해 1월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생존자 9인에 대해서도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앞서 2006년에는 ‘민주화운동 심의위원회’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16인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고 2007년 8월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사형수 8인에 대해 국가배상을 판결했다. 그러나 유족과 생존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의 횡포는 계속되고 있다. [관련 기사: 물고문·전기고문에 사형도 모자라 ‘이자 고문’]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의 조사, 관계자들의 증언 등에 따르면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가 개입, 주도한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박정희는 만년에 술만 취하면 울면서 인혁당 관련 8명을 사형시킨 것을 후회했다’고 전하는데 그건 악어의 눈물이었을까. 그러나 박정희는 인혁당 사형수가 처형되고 난 고작 4년 후에 자기 심복의 총격을 받아 비명에 갔다.
그의 딸인 박근혜는 이 사법살인의 책임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결론 난 사항이라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부친의 유신 시대에 대해서도 ‘역사학자와 국민의 몫’이라며 언급을 피했다. 2005년 12월 8일에는 국가정보원의 인혁당 관련 발표에 대해 가치가 없고, 모함이며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오자 이에 대한 입장은 표명하지 않았다.
부친의 책임을 그 자식에게 물을 수는 없다. 우리 헌법은 연좌제 금지 조항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에게 부친의 과오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은 그가 자연인이 아닌 정치인이었고 지금은 국민의 위임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는 정권의 주체이기 때문이었다.
2016년 4월 9일은 인혁당 사형수들의 41주기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 인혁당의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기실 세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은 당시 절대권력의 친딸이고 지난 3년 동안의 재임 기간은 흔히 ‘유신 시대’의 재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큼 퇴행적이다.
정치적 자유와 인권, 표현의 자유 등 모든 민주주의의 지표가 퇴보하고 있는 가운데 나흘 후면 총선거다. 후보들은 눈물을 흘리고, 삭발을 하고, 유권자에게 큰절을 하는 등 온갖 방식으로 유권자에게 표를 구한다.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는 고전적 명제 앞에서 오늘의 우리 정치의 풍경은 어쩌면 전도(顚倒),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2016. 4. 8. 낮달
* 이 글은 4·9통일평화재단 누리집과 <위키백과> 등을 참고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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