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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다 ‘안중근 의사’를 빗대는가, 저열한 ‘내란 옹호’ 세력들의 역사 인식

by 낮달2018 2025. 2. 17.

하 수상한 시국, 내란 수괴 옹호 세력의 망발들

▲ 요즘 헌법재판소에선 윤석열 탄핵 소추에 대한 변론이 이어지고 있다. 보도되는 변론을 시청하면서 국민은 윤석열의 탄핵을 확신하고 있다.

시국이 하 수상하다 보니, 별 같잖은 인사들이 뉴스에 오르내리며, 위대한 인물을 욕되게 하는 일이 잦다. 먼저 국민의힘 조중훈이라는 위인이 저지른 망발이다. 그는 여당 지도부의 윤석열 구치소 면회를 두둔하면서 ‘택도 없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례를 언급하여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국힘 의원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내란수괴 윤석열 비교

 

“김대중 대통령이 수감되셨을 때 민주당 의원들 면회 간 사람 명단 뽑아보면 수십은 넘을 겁니다. 그거랑 면회를 간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이 무죄라고 주장하고 조국 대표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까?”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어디 위헌·위법적인 비상계엄 선포 당사자인 윤석열과 그를 면회한 의원들을 옹호하겠다며, 계엄 피해자인 김 전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을 동렬에 놓고 비교한 것이다. 1980년 전두환과 신군부가 비상계엄령 아래서 김 전 대통령을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서 사형을 선고받게 하였다. 이때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김대중 구명운동이 벌어진 것은 모두가 아는 바다.

 

신군부의 쿠데타 이후 3개월간 가족들은 김 전 대통령의 생사도 알 수 없었고, 면회가 허용된 뒤에도 직계 가족 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고 한다. 그런데 내란수괴 윤석열을 무슨 순교자처럼 떠받들며 면회한 국회의원을 옹호하느라고 고인이 된 위대한 정치가를 소환했으니, 더 말할 게 없다.

 

“내란 수괴와 민주 투사를 동일 선상에 놓는 천박한 역사 인식”과 그래서 “국민의힘이 내란 정당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게 당연하다(민주당 채현일 의원)는 비판이 나오고도 남음이 있겠다. [관련 기사 : 접견두둔하며 김대중도기막힌 아들 어디다 비교?”]

 

천박한 역사 인식, 현직 검사장이 ‘바통’을 받았다

 

여당 국회의원이 벌인 망발의 바통을 받은 이는 현직의 검사장, 이영림이라는 춘천지검장이다. 그는 일찍이 2020년 수사권 조정 논란 당시 이프로스 글로 “검찰을 다루는 저들의 방식에 분개한다”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바 있었고, 2023년 윤석열의 대통령 취임 뒤인 2023년 9월, 검사장으로 승진한 ‘친윤 검사’라고 한다.

 

이영림은 지난 12일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 ‘일제 치하 일본인 재판관보다 못한 헌재를 보며’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재판받을 때, 1시간 30분 동안 최후 진술했던 사례를 언급하면서 “(일제) 재판부는 안 의사가 스스로 ‘할 말을 다 하였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할 때까지 주장을 경청했다”며 헌법재판소 공정성을 문제 삼았다.

 

이영림은 헌재에서 탄핵 심판 중인 윤석열이 변론 과정에서 요구한 ‘3분 발언’을 재판부가 불허한 것을 문제 삼아, “절차에 대한 존중이나 심적 여유가 없는 헌재 재판관의 태도는 일제 치하 일본인 재판관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다. 또, “헌재가 반헌법적·불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국민의 판단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라며 헌재를 겁박하기도 했다.

 

이는 <경향신문> 사설이 지적한 대로 용서할 수 없는 ‘궤변과 망언’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검사 동료 윤석열에 대한 ‘서푼짜리 의리’가 아니라, 내란을 획책하다 구속된 피의자 윤석열이 망가뜨린 나라를 걱정하고 그를 말미암아 훼손된 법치주의를 염려하는 공직자의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일제 재판관과 헌법재판소를 동급으로 빗댄, ‘일제강점기 순사보다 못한’ 검사장

 

“현직 지검장이라는 자의 가치 판단과 역사 인식 수준이 일제강점기 순사보다 못하다. 일제 원흉을 사살한 뒤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진 독립운동가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거짓말로 면피하려는 내란 수괴를 동급에 올리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 위 ‘사설’ 중에서

 

어디 비교의 대상이 없어 감히 안 의사의 이름을 거기 올리는가. 이영림이 찬미한 일제의 재판관이 한 일은 다음과 같다. [관련 사설 : 윤석열이 안중근인가, 일제 순사보다 못한 현직 검사장]

 

일본 법원이 안 의사 재판을 공정하게 했다는 건 전형적인 일제의 논리다. 안 의사는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안 의사가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형식적으로 진행됐고,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이 선고됐다. - 위 ‘사설’ 중에서

 

적절한 비유는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겠지만, 이영림 검사의 비유와 수사는 매우 부적절했다. 그는 압제자였지만, 식민지 독립 투사에게 시혜를 베풀 듯 최후 진술 시간을 넉넉하게 배려했던 일제 재판관을 헌재의 재판관과 겹침으로써 헌재의 불공정과 비정한 재판 운영 방식을 고발하게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황도, 비교하는 인물도 잘못 골랐다.

 

내란 수괴면서도 부하들에게 책임을 미루면서 온갖 법률 지식으로 법망을 회피하고자 기를 쓰는, 이른바 ‘법꾸라지’ 윤석열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동양을 넘어 세계 평화를 주장한 안중근 의사에 비기는 ‘뻘짓’을 저지른 것이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인 자신을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한 안 의사와 반헌법적인 내란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국민을 배신한 가짜 민주주의자 윤석열에 어찌 비길 수 있으랴. 그 저열한 역사 인식이 일제의 순사보다 못하다는 비판이 오히려 과분한 정도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옥중 생활 가운데서도 그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평화에 대한 신념이 형무소의 간수를 감화시키는 등 적지 않은 일본인들의 존경과 기림을 받고 있다. 그의 의거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혁명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최근 그에 관해 쓴 글의 일부를 붙여서 그가 100년 뒤에 뒷사람에게도 기려지는 까닭을 공유하고자 한다.


▲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1879~1910)

1910년 3월 26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1909년 10월 26일)한 지 꼭 다섯 달 만이요,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1910년 2월 14일)받은 지 한 달 열흘째였다. 안중근의 사형 집행 현장에 참석한 사람은 미조부치 검찰관과 구리하라 전옥(典獄, 교도소장)이었다. 오전 10시에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11분 후 재판 과정에서 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숨이 끊어졌다. 향년 32.

 

그가 순국한 뒤, 둘째 동생인 안정근이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일본 당국은 “유해는 다른 사형수와 동일하게 감옥이 관리하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될 것”이라며 요청을 거부했다.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간수가 감옥 뒷산에 매장하였다.

▲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교수형으로 순국한 뤼순 형무소.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김태빈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 투사들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봉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백범은 일본에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삼 의사의 유골을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하면서 네 번째로 안중근 의사의 ‘허묘(虛墓)’를 만들었다.

허묘는 바로 안 의사의 시신을 반드시 찾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백범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에 흉탄에 스러졌다.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 의거에 대한 기림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세계로 타전되면서 각국에서 의거 경위에 대한 사실 보도와 아울러 훼예(毁譽)가 엇갈리는 논평기사가 상당 기간 이어졌다. 그중에 관계국인 한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에 각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륙침략에 공을 들여오던 일제는 이토의 피살 소식에 경악하였고, 일제와 한만 침략 정책을 협상하려던 러시아는 안중근과 우덕순 등 관련 인물을 체포하여 일제에 인도하였으나,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 쾌거를 매우 기꺼워하였다.

▲ 안중근 의거를 각별히 평가한 당시의 주요 인물들. 레닌도 안 의사의 의거를 20세기 초반기의 중요한 대사건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특히 한국과 중국 지도자와 문인 등은 안중근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격찬하면서 양국 항일 공동 전선의 계기로 삼으려 하였다. 다투어 이어진 안중근의 의열(義烈)을 기리는 시문은 중국 국가주석 위안스카이(袁世凱), 뒷날 신해혁명의 지도자로 떠오른 쑨원(孫文), 중국의 저명 학자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참여했고, 혁명가 장빙린(章炳麟)은 ‘안중근 비명(碑銘)’을 지어 그의 고향 해주에 세우려고까지 하였다.

 

저명인사의 찬사도 이어져 사상가, 혁명가인 장타이옌(章太炎)은 ‘안중근은 조선의 안중근, 아시아의 안중근도 아니요, 세계의 안중근’이라고 기렸고, 중국의 대표적 문인이자 아나키스트인 바진(巴金)도 ‘안중근은 나의 젊은 날의 영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전의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레닌은 그의 저술 <제국주의에 대한 노트>에서 “일본인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한국 민족의 용맹성과 이토 히로부미 살해 사건을 20세기 초반기의 중요한 대사건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앞다투어 펴낸 안중근 전기들

 

중국에 망명한 유학자 김택영과 독립운동가 예관 신규식(1879~1922)은 시문으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안중근 의거를 숭고한 의열로 기렸다. 그에 대한 기림은 그의 순국 뒤 국내는 물론, 중국과 연해주, 미주 등지에서 안중근 전기 간행으로 이어졌다. 서간도에서는 양명학자 이건승, 상하이에서는 역사학자 박은식, 연해주에서는 국학자 계봉우, 미주에서는 홍언이 각각 <안중근전>을 펴낸 것이다.

 

2010년에는 안중근 연구자 윤병석 교수가 중국학자 예톈니(葉天倪)가 1914년경 상하이에서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80여 쪽 분량의 평전 <안중근전>을 발굴해 공개하기도 했다. 예텐니는 이 평전에서 안중근에게 ‘열사’나 ‘의민’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으로는 다른 애국지사들과의 구분이 힘들다며 ‘세계 위인’으로 칭하고 있다고 한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대해 당시 민중들이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 크게 환영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 친일파들의 반응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고종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해야 하고 주범·공모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실제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는 일본에 조문단을 파견하였고, 일진회에서 꾸린 ‘국민 사죄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국내의 민중뿐 아니라 나라 밖에서도 안중근 의거에 대한 기림과 전기 발간 등의 형태로 이어진 것은 안중근의 의거가 단순히 일제의 침략에 대한 일회적 저항에 그치지 않고, 나라 사랑을 바탕으로 ‘세계 평화와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고자 한 인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미완성 <동양평화론>에 담긴 보편적 가치

 

그가 남긴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은 ▲ 동양의 중심지인 뤼순을 영세중립 지대로 정하고 분쟁을 방지할 상설위원회 운영 ▲ 한·중·일 3개국이 재정 출자한 공동은행 설립과 공동화폐 발행 ▲ 동북아 공동 안보 체제 구축과 국제 평화군 창설 등을 다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은 오늘날 유럽 연합(EU)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등으로 그 의미를 새롭게 환기하고 있다.


▲ 안중근의 감화를 받은 간수 치파와 안 의사가 그에게 써준 유묵.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143일 동안 수감 중 자기 삶과 사상을 밝히는 <안응칠 역사>와 그리고 뛰어난 글씨로 56폭의 유묵(遺墨)을 남겼는데 대부분은 사형을 선고받은 1910년 2월 14일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안중근의 유묵들은 모두 휘호 낙관 부분에 한자로 ‘경술 3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라 쓰고, 반드시 단지동맹 때 약지를 자른 왼손 장인(掌印)을 찍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옥중 유묵은 유명인의 글씨에 따르는 위작 시비가 없다. 또 유묵은 문구의 내용이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순국 직전에 감옥의 간수로 있던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뜻의 ‘爲國獻身(위국헌신) 軍人本分(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써주었다. 이 유묵 한 점은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1885~1934)의 삶을 바꾸었다. 그는 처음엔 자기 나라의 위인으로 기려지는 이토를 살해한 안중근을 증오하였으나 동양 평화에 대한 그의 일관된 신념과 높은 인품에 감화되었다. 두 사람은 한국 독립투사와 일본군, 사형수와 간수, 가톨릭과 불교라는 몇 가지 장벽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 일본 미야기현 쿠리하라시에 있는 사찰 다이린지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비 ⓒ 주센다이 대한민국 총영사관 사진

일본 헌병 치바와 미야기현 대림사의 안중근 추도

 

안중근의 죽음을 배웅한 치바는 전역한 뒤, 고향인 미야기에서 철도원으로 일하면서 49살로 죽을 때까지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며 그 명복을 빌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도 안 의사의 유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과 안 의사의 위패를 함께 모셔 조석으로 공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치바의 유족들은 그의 유언을 지켰고, 1979년 안 의사 탄신 백 주년에 맞춰 그동안 가보로 소중히 보관해 온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우리나라에 반환했다. 이 유묵은 현재 다른 유묵 25점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미야기현(宮城県) 쿠리하라시(栗原市)에 있는 사찰 다이린지(大林寺)는 치바 내외가 생전에 다니던 절이다. 다이린지의 묘지에는 치바 내외가 묻혀 있고 치바와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 경내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 새긴 안중근 의사 유묵비도 세워져 있다.

주지 사이토 타이겐(斉藤泰彦)은 생전에 치바를 통해 ‘안 의사의 인격과 동양 평화에 대한 이념’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매년 9월 첫 번째 일요일에 안 의사 추모 행사를 35년째 열고 있다. 또 해마다 안 의사가 처형당한 3월 26일이면 추모식에 참배하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안중근이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는 1천 엔(円) 지폐의 도안 인물로 오른, 일본 근대화를 이루어낸 위인으로 기려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세기가 지나도록 그에 대한 추모는 이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안중근의 고결한 인품과 신념에 대한 공감이 국적을 넘은 결과일 것이다.

▲ 해방 후 백범이 조성한 3의사 묘. 맨 왼쪽의 안 의사의 허묘. 오른쪽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등 삼의사 묘다. ⓒ 김종성

안중근에게는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집안에는 아우 정근(1885~1949, 1987·독립장)과 공근(1889~1940, 1995·독립장) 11명의 독립유공자를 냈다. 정근은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고, 임정에서 일했으며, 그의 차녀 미생(1919~2008, 2022·건국포장)은 백범의 비서로 활동하다 백범의 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공근은 한인애국단의 단장을 지냈지만, 1940년 행방불명되었다. 실제 그의 집안에는 모두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한다.

 

2024년에 하얼빈 의거는 115주년을 맞았지만, 백범이 봉환하고자 했던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 삼 의사 묘역에 있는 안중근의 허묘는 언제쯤 주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2025. 2.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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