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여행] 첫날, 충북 진천읍 포석 조명희 문학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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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짧은 여행, 진천 농다리를 만나러 진천에 들렀다. 초평면에 숙소를 예약하고 아내와 함께 11시께 집에서 출발하여 진천에 닿으니 오후 3시다. 농다리는 내일 찾기로 하고, 읍내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식사 뒤에 숙소로 들 생각이었다. [관련 글 : 천년 돌다리와 낚시터, 관광 호수가 된 저수지 ]
진천 갔다가 우연히 ‘조명희 문학관’을 찾다
검색해 보고, 읍내 벽암리에 있는 김유신(595~673) 사당인 길상사(吉祥祠)에 들렀다. 사당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고, 거기 단풍이 좋다 해서 갔는데, 단풍은 끝물이었고, 입구의 빨갛게 물든 메타세쿼이아가 그나마 괜찮았다. 거기 관광 안내판에서 읍내에 조명희 문학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조명희(1894~1938)는 단편집 <낙동강>의 작가, 신경향파로 활동하고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한 프로 문학(계급문학)의 주요 작가라는 것 말고는 별로 아는 게 없다. 그것도 국문학사 공부를 하면서 간신히 이름 자나 챙겼을 뿐이니 명색이 문학 교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관련 글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해산]
진천에 조명희 문학관? 나는 조명희가 월북 작가라고 생각했고, 보수적인 충청도 고장 진천이 월북 작가의 문학관을 열 만큼이었나 싶어서 바로 내비게이션을 켜서 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은 진천읍 포석길 37-14번지에 2015년에 개관한 외관 디자인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3층 건물이었다.
건물 정문은 뒤쪽 포석 소공원 아래 아담하게 펼쳐졌는데, 현관 앞 잔디밭에 포석 조명희의 동상이 서 있었다. 문인의 동상으로는 남다르게 동상은 두루마기 차림의 포석이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양쪽 팔을 벌려 하늘을 우러르는 꽤 역동적인 형상이었다. 그냥 서 있거나, 책을 끼고 앉아 있는 모습과는 썩 달랐고, 손발과 얼굴빛은 누런 구릿빛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문학관 내부는 너르지는 않았지만, 해방 이전에 활동한 문인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시로 출발해서 연극운동가로 변신하였다가 나중엔 소설가로 활약한 문인이다. 진천읍 벽암리에서 출생한 조명희의 호는 포석(抱石), 도쿄 유학 시절에 시를 쓰다가 1920년 근대극연구를 목적으로 결성된 극예술협회 창립동인으로 참가했다.
1921년 동우회 순회극단의 일원으로 전국을 돌며 연극 활동을 했는데, 이때 희곡 「김영의 사(死)」로 연극을 만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후기에는 주로 소설을 썼는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땅속으로」·「R군에게」·「저기압」·「농촌 사람들」·「동지(同志)」·「한여름 밤」·「아들의 마음」 등이 있다.
카프의 프로작가 조명희, 소련의 망명문학을 건설하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신경향파 작가로 두각을 나타냈고 카프(KAPF)의 결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작가로 활약하였으며, 단편집 『낙동강』을 남겼다. 그의 단편 「낙동강」은 프로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낙동강」은 낙동강 하류 구포벌을 배경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명희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내가 그를 월북자로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육성촌, 우수리스크와 하바롭스크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신문 『선봉』의 편집자로, 조선사범학교 교수로, 『노력자의 조국』 주필로 활동하면서 소련에서 한인 문학 건설에 힘썼다.
1937년 소련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의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무렵 소련은 사회 지도자급 한인 2천여 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는데, 조명희 역시 친일파이자 반혁명 분자라는 죄목으로 1937년 9월 체포되었고 이듬해 5월 11일 조명희는 공개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총살되었다. 향년 44.
그는 명명(1928) 후 러시아에 뿌린 한국문학(고려문학)의 씨앗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개척자로서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관에서는 포석을 일러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 최초의 업적을 가진 문학가로 기리고 있다.
① 일제강점기 최초의 망명(1928, 구소련 블라디보스토크) 작가다.
②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창작 희곡집인『김영일의 사』를 발간했다.
③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표 개인 창작 시집인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했다.
④ 1927년에 쓴 소설 「낙동강」은 프로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강’을 표제로 한 소설이다.
⑤ 『노력자의 조국』(1934)의 주필로서 최초로 망명 문단을 결정하고 망명 문예지를 만들었다.
조명희는 1956년 복권되었고, 그의 자손들은 지금도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에 살고 있다. 1988년 12월 우즈베크공화국 타슈켄트시 국립원고연구소 문학박물관 4층에 조명희 상설전시관이 세워졌다.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94년에는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그의 생가터에 표지석을 세우고, 매년 포석 조명희 문학제가 개최되는 등 추모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 연변에서는 2001년에 연변포석회가 창립되어, 2002년부터 연변포석문학제가 매년 개최되어 2008년까지 7회 행사가 열렸다. 그밖에 2003년에 진천읍 벽암리에 문학비가 건립되고 포석문학공원이 조성되었으며, 2003년 제1회 포석 추모 전국 시낭송 경연대회가 열려 2008년까지 6회 대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2006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술대학교 교정에 조명희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보수적인 고장에 ‘조명희의 복권’이 놀랍다
2015년에 포석 조명희 문학관이 세워졌는데, 소련으로 망명한 프롤레타리아작가를 보수의 고장인 진천에서 세웠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조명희의 항일운동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건 그 이후인 2019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진천에서 조명희의 문학관을 들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문학이 이념의 완고한 성채에 갇히지 않고 그 자체로 누릴 수 있다면 좀 좋은가 말이다.
2024. 11. 21.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천문화전자대전
· 한국문학관협회 – 포석조명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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