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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천년 돌다리와 낚시터, 관광 호수가 된 저수지

by 낮달2018 202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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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여행] 이틀째, 진천 농다리(籠橋)와 초평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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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 농다리는 상산 임씨 세거지인 구산동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금강 상류 미호천의 하류인 세금천에 놓인 돌다리다. ⓒ 지역N문화

조명희문학관에 이어 이상설기념관을 돌아서 농다리가 있는 초평면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저녁을 먹고 7시쯤 들었는데, 마치 길쭉한 컨테이너처럼 생긴 무인텔이 ‘호텔’ 이름을 붙이고 요란한 네온사인으로 휘황했다. 2층으로 된 숙소 건물의 아래층은 개별 주차장, 2층은 숙소였다.  [관련 글 : 충북 진천에서 조명희의 문학을 만나다]

 

초평의 숙소에서 묵고 농다리를 찾다

 

신원을 확인하자, 주차장 셔터가 올라가 차를 대고 나서 가파른 층계를 오르니 숙소였다. 철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건 신세계였다. 그리 너르지 않은 공간인데, 하얀 시트를 덮은 대형 침대와 각종 집기, 꽤 호화롭게 장식한 욕실 등이 놀라웠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이 숙박업소는 외형 대신 내부에 공을 들인 듯했다.

 

그러나 온도를 좀 내려달라고 했는데도 방은 좀 더웠고, 베개가 높아서 썩 편한 잠을 자지는 못했다. 7시쯤 일어나 씻고 쉬다가 9시쯤 농다리를 찾았다. 평일이라도 늦게 가면 주차할 자리가 없을 거라더니, 벌써 대놓은 차들이 적지 않았다.

▲ 진천 농다리는 고려 말에 조성된 돌다리로 천년을 버텨온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 국가유산 포털

진천 농다리는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의 상산 임씨 세거지인 구산동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금강 상류 미호천(美湖川)의 하류인 세금천에 놓인 돌다리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천 농다리(籠橋)’는 진천 읍지(邑誌) 『상산지(常山誌)』와 이병연이 전국 241개 군 중 129개 군의 인문 지리 현황을 조사하여 1990년에 편찬한 지리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기록(‘고려 초 임 장군이 축조하였다’)을 따르면 역사가 천년쯤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천년 역사의 돌다리 ‘진천 농다리(籠橋)’

 

임 장군이란 진천 출신의 임연(林衍, 1215~1270)으로 고려 무신 정권 말기에 김준의 뒤를 이은 집권자다. 임연의 고종 때의 권신으로 고향 마을 앞에 이 다리를 놓았다니, 시기는 고려 말쯤으로 추정된다.

 

동네 노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임연은 날마다 세금천에서 낯을 씻는데, 어느 겨울날, 임연이 세수하다 보니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부친상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이라고 하여 임연이 이를 딱하게 여겨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다리를 놓아주었다.

▲ 지네 모양의 다리는 빠른 물살에 견딜 수 있고 교각 역할의 기둥은 타원형 물살을 피하고 소용돌이 생성을 막는다. ⓒ 지역N문화
▲ 용고개 쪽에서 내려다본 진천 농다리. 보수를 위한 공사로 틍행이 금지되어 있고, 오른쪽 부교를 이용한다.

이때 일을 다한 용마는 기운이 다 빠져서 죽었는데 용마에 실었던 마지막 돌이 떨어져 그대로 둔 것이 마을의 ’용바위’라고 한다. 또한 농다리는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면 며칠씩 우는데 한일강제합병 때와 한국전쟁 때도 며칠이고 울어서 동네 사람들이 잠을 못 잤다’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진천 출신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은 후 그 기념으로 농다리를 놓았다’라는 전설도 있다.

 

편마암 자줏빛 돌로 쌓은 농다리의 과학적 공법

 

다리는 작은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린 후, 지네 모양을 본떠 길게 늘여 만들었으며, 총 28칸의 마디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을 쌓아 올릴 때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쌓았다 하는데, 폭이 1m도 채 되지 않는 다리인데도 장마 때도 떠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버텨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편마암의 일종인 자줏빛 돌을 쌓아 만들었다. 길이는 93.6m, 폭 3.6m, 높이는 1.2m다.

 

옛날에는 어른도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만큼 높았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 바닥이 높아져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천년 세월에 농다리는 폭우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일부 유실되기도 했는데, 최근까지 24칸만 남았던 농다리는 고증을 통해 28칸으로 복원되었다.

 

‘농다리’라는 이름은 물건을 넣어서 지고 다니는 도구의 ‘농(篝)’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려시대 임연 장군이 ‘용마(龍馬)’를 써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에서 ‘용’ 자가 와전되어 ‘농’이 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농다리를 ‘대그릇, 종다래끼 롱(籠)’ 자를 써서 ‘籠橋’로 표기한다.

▲ 용고개의 성황당.  ‘서낭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神堂) 으로 돌무더기나 장승 등으로 이루어진다.

아침 9시, 날씨가 흐린 데다가 역광이어서 사진 촬영이 별로 여의찮았다. 농다리는 유실된 부분을 보수한다고 출입을 금하고 있었고, 옆에 새로 만들어 놓은 부교를 건너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90m가 넘는 꽤 긴 다리라 한눈에 조감하는 것도, 수평 위치에서 찍기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돌다리는 대견하고 장하다. 마치 지네가 기어가는 듯하게 만든 다리는 빠른 물살에 견딜 수 있고 교각 역할을 하는 기둥은 타원형 물살을 피하고 소용돌이 생성을 막는 등 그 나름의 과학적 공법을 자랑하고 있으니, 소중한 문화유산인 셈이다.

 

농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데, 길가에 커다랗게 쌓은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용고개 성황당(城隍堂)이다. ‘서낭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神堂)으로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돌무더기나 나무, 장승 등으로 이루어진다.

 

용고개 서낭당의 전설, 시주 거부한 마을에 대한 경고

 

용고개는 ‘살고개’로 불리는데, 여기엔 스님의 시주와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저수지로 수몰된 화산리에 큰 부자 마을이 있었는데 한 스님이 시주를 청하자, 마을에서는 거절하였다. 스님이 괘씸히 여겨 사람들에게 “앞산을 깎아 길을 내면 더 큰 부자 마을이 된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대로 하니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이후 마을은 망하여 없어졌다고 한다. 용 형상을 띤 일대의 지형에서 이곳이 용의 허리에 해당하는 이곳을 깎아 길을 내면서 용이 죽었다고 하여 ‘살(殺) 고개’라고도 불린다.

▲ 초평 저수지 가로 이어진 데크길. 이 길의 끝에 출렁다리인 '미르 309'가 나타난다.
▲ 진천군이 사업비 80억 원들 들여 만든 '초평호 미르 309' 출렁다리(길이 309m) . 아침이라 사람이 없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충북에서는 물론 전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낚시터인 ‘초평 저수지’다. 미호천 상류를 가로막아 영농목적으로 만들어진 초평 저수지의 외형적 규모는 저수량이 1,378만 톤이며 진천군 관내뿐만 아니라 멀리 청원군 오창, 북일, 북이, 옥산, 강서 등지까지 물을 대고 있다. 물 댈 면적은 2천 정보이며, 만수 때의 면적은 259정보, 저수지 주위 만도 29km에 달하며 수로의 직선거리는 약 64km에 이르는, 만만찮은 저수지다.

 

저수지로 만들었다가 이제 관광객을 모으는 초평호

 

초평 저수지는 인근 곡창지대에 물을 공급하였으나, 지금은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본래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데, 대신 한해 관광객이 8만여 명이 찾아오는 진천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진천군은 초평 저수지 일대에 황토 맨발 길과 108ha의 미르숲, 제1 하늘다리, 초평호 둘레길 등을 조성하며 관광객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그리고 올 4월 개통한 ‘초평호 미르 309’ 출렁다리(길이 309m)는 진천군이 사업비 80억 원을 들여 만든 다리로, 주탑이 없는 출렁다리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 이 다리가 지난해 방문객의 두 배를 넘는 75만여 명의 관광객을 유치해 낸 것이다.

▲ 주탑이 없는 출렁다리 가운데 가장 긴 '미르 309'는 지난해 방문객의 두 배를 넘는 75만여 명의 관광객을 유치해 낸 일등 공신이다.

성황당을 넘어 저수지 가의 야외음악당 오른쪽으로 조금만 오르면, 미르 309 출렁다리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이런 종류의 볼거리에 무심해진 지 꽤 되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내는 건너기는 엄두도 못 내고 나도 굳이 거길 건너볼 생각이 없어서 입구에서 사진이나 몇 장 찍는 거로 끝냈다.

 

내려오다 보니 잘 가꾸어놓은 ‘미르 숲 황토 맨발길’이 보였다. 하루에 한 차례씩 스프링클러를 돌려서 길에 습도를 유지한다는데, 아무도 없는 맨발 길은 깨끗하기만 했다. 아직은 아침, 사람들이 몰려들면 어떨지 모르지만, 구미 샛강의 맨발 길을 견주어 본다.

▲ 출렁다리 아래에 개설되어 있는 황토 맨발 숲길.
▲ 초평 저수지 가의 나무들도 단풍이 들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수면의 윤슬이 눈부시다.

세금천 가의 메타세쿼이아 숲길도 좋다

 

출렁다리 앞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쉬다가 내려오는 길, 아내가 인공 폭포 앞으로 난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걷자고 한다. 웬일로 진천에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자주 눈에 띈다. 김유신 사당 앞에도 고목 몇 그루가 보였는데, 여기는 아예 가로수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붉은 단풍의 메타세쿼이아는 생각만큼 단풍이 골고루 든 게 아니라서 좀 아쉽긴 하지만, 그 길을 걸으면서 아내는 연신 좋다고 감탄이 늘어졌다. 진천군에서 10년 전에 심어 조성한 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600m쯤이라고 했다. 어쨌든 진천군이 농다리 주변에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는 ‘진심’인 듯하다.

▲ 살아 있는 식물 화석으로 불리는 메타세쿼이아. 잎이 단풍이 들어 노랗다가 나중에 빨개지는 듯하다.
▲ 땅에 떨어진 메타세쿼이아 바늘 잎.
▲ 진천군이 10년에 7~8년생 메타세쿼이아 280그루로 조성한 숲길. 이제 메타세쿼이아는 엔간히 자랐다.
▲ 인공 폭포 앞쪽에서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 여기 쓰인 돌도 예사롭지 않았다.

전망대 아래까지 갔다가 돌아와 거기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이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도 예사롭지 않다. 사람이 건너지 못하게 막아놓은 농다리보다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더 생광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건너는데, 물살이 거셌다.

 

충북 혁신도시 근처의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글쎄, ‘맛’의 기준이 다른 건가, 우리는 그냥 요기만 했다고 여기고 바로 귀로에 올랐다.

 

 

2024. 11.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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