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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국립공원’이, 절은 ‘총림’이 됐다, 천년 고찰 팔공산 동화사

by 낮달2018 2024.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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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앞두고 처음 만난 팔공산 동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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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국립공원이 된 팔공산에 깃들인 동화사는 832년(흥덕왕 7년)에 심지 왕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2012년 팔공총림이 되었다.
▲ 동화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영역과 비로암 등 산내 암자 부분, 그리고 통일약사대불(1992) 영역 등인데 나는 그 일부만 찾았다.

대구에서 중고교와 대학에 다니면서 10년 넘게 거기서 살았지만,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에 가 본 기억은 없다. 스무 살 무렵에 벗들이 동화사 계곡에서 야영한다고 해서 한밤중에 거길 찾은 적이 있고, 대학에 가서 복학생들과 함께 동화사를 찾았던 듯한데, 절집 안에 들어간 기억은 없으니 일단은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다.

 

일흔이 다 돼 동화사를 찾았다, 정말?

 

애당초 동화사에 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볼일이 있어 대구 칠곡지구에 들렀다가 시간도 넉넉하고 근처에 동화사가 있다 싶어서 나는 팔공산으로 차를 몰았다. 절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내로 들어서면서 나타나는 풍경은 여느 절과 다르지 않되 낯설어 보였으니, 동화사가 초행이라는 게 맞긴 맞는 건가 싶기는 했다. 

 

팔공산(1,192.3m)은 대구광역시 동구와 군위군 부계면,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칠곡군, 경산시 등 5개 시군구에 걸친 태백산맥 줄기의 산이다. 신라 때부터 하늘과 산신에 제사 지내는 ‘성산영악(聖山靈岳)’으로 불리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니 거기 깃들인 절집도 적잖다. 동화사 말고도 인근에 파계사, 부인사, 북지장사, 송림사 등이, 영천 쪽에는 은해사가 있다. [관련 글 : 솔숲 속 송림사, 돌아와서야 참 아름다운 절임을 알았네]

▲ 옹호문을 지나면 널따란 마당에 세운 문루 봉서루가 앞을 막는다. 봉서루 뒤쪽에 대웅전이 있다.

동화사 창건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하나는 493년(소지왕 15)에 극달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는 설이. 그 뒤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심지 왕사(王師)가 중창하였는데,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것이다.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천년 고찰 동화사

 

나머지는 진표 율사가 영심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 : 미륵보살의 수계를 의미하는 징표를 가리키는 불교용어)를 심지가 다시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였다는〈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극달 화상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527)되기 이전이므로 법상종의 성격을 띤 유가사라는 사명이 붙여졌다는 것은 불합리하므로 심지의 중창(832·흥덕왕 7)을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이상 동화사 누리집)

 

863년에는 경문왕이 비로암 삼층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을 조성하였으며, 934(경순왕 7)년에는 선사 영조가 절을 중창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1036(정조 2)년 영통사·숭법사·부인사 등과 함께 경(經)·율(律)을 시험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며, 1190(명종 20)년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였다. 1294(충렬왕 20)년에는 국사 홍진이 절을 중건하였고 1319(충숙왕 6)년에는 현승이 통도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5과를 얻어와 이를 봉안하고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 동화사의 문루인 봉서루. 뒤편에는 사명당 유정 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승군을 지휘할 때 붙인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걸려 있다.

사명대사가 승군을 지휘한 절 동화사, 세계 최대의 통일약사대불까지

 

조선시대엔 1465(세조 10)년에 금당을 중건하였으며, 1606(선조 39)년에는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이 절을 중창하였고, 이어 학인이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유정은 영남도총섭(嶺南都總攝)으로 절에서 승군을 지휘했는데, 그의 인장인 ‘영남도총섭인’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 나팔, 비사리 구시(나무로 만든 밥통) 등이 현재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남아있다. 동화사 봉서루에 있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 편액은 동화사가 조선시대 영남 승병의 지휘소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전국에 있는 20여 개의 사명대사 진영(眞影) 가운데 동화사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92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33m 통일약사대불을 조성하고 통일기원대전을 건립했고, 국내 유일의 선(禪) 체험관인 불교문화관에는 오색영롱한 부처님 진신사리 7과가 모셔져 있다. 동화사에선 법화경 7만 자를 석각과 판각의 황금 경판으로 조성하는 대작 불사가 진행 중이며, 통일약사대불 24시간 개방으로 365일 꺼지지 않는 수행기도 도량으로 거듭났다.

 

동화사는 2012년에는 ‘팔공총림’으로 승격했다. 총림(叢林)은 선(禪)·교(敎)·율(律)을 겸비하고 학덕과 수행이 높은 방장(方丈)의 지도하에 스님들이 모여 수행하는 종합적인 수행도량이다. 총림은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기관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두루 갖춘 사찰이다.

 

조계종에는 팔공총림 동화사 외에 해인사(가야총림)·송광사(조계총림)·통도사(영축총림)·수덕사(덕숭총림)·백양사(고불총림)·쌍계사(쌍계총림)·범어사(금정총림) 등 총 8개의 총림이 있다. 현재 동화사에는 조계종 종정 진제 법원 대종사가 주석(駐錫:선종에서, 승려가 입산하여 안주하다)하며 선원, 율원, 강원에 100여 명의 대중이 상주하며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동화사는 대구 경북의 조계종 5개 본사(직지사··은해사·불국사·고운사) 중 하나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대표적인 말사로 파계사, 부인사, 북지장사, 남지장사, 운문사, 유가사 등이 있다. 2023년 팔공산이 국립공원이 되면서 동화사도 무료입장(주차료는 징수)으로 바뀌었다. [관련 글 : 팔공산 골짜기에서 철 이른 봄을 만나다]

▲ 봉서루 옆의 통일범종루.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의 거점으로 사명당 유정을 기리는 등 '호국 안민'에 비중을 두고 있다.
▲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집인 동화사 대웅전은 동화사의 전각 가운데 극락전, 수마제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동화사로 가는 길, 차량이 통행하는 거대한 동화문 매표소는 문을 닫고 후불로 주차비만 징수한다고 해서 그냥 통과해 들어갔다. 무슨 임시 시설처럼 공사가 한창인 데가 주차장이었는데, 긴가민가하면서 차를 댔다.

 

오동나무 ‘동화’와 봉황

 

대웅전은 오른쪽이래서 올라가니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옹호문(擁護門)’이라는 낯선 이름의 문이 어긋난 방향으로 서 있었다. 보아하니 불법을 호위하는 사천왕상을 모셔둔 곳, 여느 절집의 사천왕문이다. 옹호문을 지나면 높다랗게 축대 계단 위에 선 봉서루(鳳棲樓)가 위압적으로 서 있다.

 

봉황이 깃들인다는 뜻의 봉서루는 동화사의 누문(樓門)으로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웠다. 동화사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풍수지리설과 이어져 있다. ‘동화(桐華)’가 무엇인가, 봉황이 깃들이는 나무인 ‘오동나무꽃’이라는 뜻이 아닌가.

▲ 여느 절에서는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 부르는 영산전.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있다. 오른쪽에는 종문이 닫혀 있다.
▲ 동화사 경내에는 이런 형식의 석조 구조물이 여러 군데 있었고, 그 앞에는 어김없이 불전함이 놓여 있었다.
▲ 동화사의 '호법구민' 사찰로서의 정체성과 연관되는 사명당 유정 대사의 조상. 옆에는 석등과 석탑을 세웠다.
▲ 동화사 당간지주 앞쪽 숲에 버려진 듯한 허물어진 탑이 수풀 사이에 서 있었다.
▲ 금당선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있는 동화사 당간지주. 뒤쪽에는 인악대사를 기리는 비각인 인악당과 부도전이 서 있다.
▲ 동화사 일주문인 봉황문으로 내려가는 숲길. 인적 드문 이 길은 신록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 통일약사대불전으로 가는 다리와 숲길.
▲ 통일약사대불전 앞의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가면 일주문인 봉황문에 이른다. 짙푸른 신록이 우거져 있다.

동화사의 일주문은 봉암사의 일주문과 같은 ‘봉황문’이고, 2022년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었다. 대개 절집의 일주문은 ‘○○산 ○○사’라는 형식의 현판만 걸려 있는데, 봉암사 일주문은 안쪽에 ‘봉황문(鳳凰門)’ 현판이 걸려 있다. 2022년 함께 보물로 지정된 팔공산 동화사의 일주문 이름도 봉황문이라고 했겠다. 그런데 일주문은 어디에 있는가. [관련 글 : 천년 선문(禪門) 종찰(宗刹) 봉암사(鳳巖寺)를 엿보다]

 

봉서루 안쪽 처마 밑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던 까닭에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치영(緇營)의 ‘치’는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 치영은 승군(僧軍)의 군영을 뜻하는 말이다.

 

봉서루 앞마당의 곳곳의 석불, 조상들과 불전함

 

봉서루를 지나면 널찍한 앞마당에 형형색색으로 어지럽게 걸린 연등 저편에 대웅전이 높다랗게 올라앉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집인 동화사 대웅전은 동화사의 전각 가운데 극락전, 수마제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다.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서 있었다.

 

대웅전 뒤쪽으론 비탈에는 산신각, 조사전, 칠성각이 대각선으로 이어졌고, 오른쪽 뒤편으론 영산전과 돌계단 위로 종문(宗門)이 닫혀 있었다. 종문 너머엔 조실 스님이나 방장 스님이 거처하는 염화실과 종정이 거처하는 종정예경실이 있다고 한다.

 

봉서루 앞마당, 두 그루의 느티나무 아래 기와 접수처 앞에는 거대한 석조 구조물 앞에 불전함이 마련되어 있고, 한쪽에는 가부좌를 튼 스님의 좌상도 우람했다. 타종 성취 염원이라고 적힌 동종이 비치된 곳에도 어김없이 불전함이 놓였다.

▲ 1992년에 건립된 통일약사대불전. 통일대불 맞은편에 있어 전각 안에서 유리를 통해 바로 통일대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 통일약사대불전의 거대한 기둥. 대불전의 오른쪽은 108계단을 올라 통일약사대불을 마주할 수 있다.
▲ 약사여래불은 한반도 통일에 갈등이 되는 걸림돌을 하루 속히 치유하여, 통일을 이루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자는 뜻에서 세워졌다.

그러고 보면 설법전 저편으로도 사명대사의 금빛 조상이 세워졌고 그 앞에도 불전함이다. 대체로 이들 구조물에 일관된 테마는 ‘국권수호’와 ‘구국구민’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이들 구조물은 풍경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들떠 있는 듯했다. 웅장하게 지어진 단청이 화려한 전각들 속에 마련된 불전함은 어쩐지 ‘속화(俗化)’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인악대사 나무 옆으로 내리막길 따라 내려가니 동화사 당간지주가 나왔고, 그 위쪽으론 금당선원 가는 길, 아래쪽으로는 통일약사대불전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라는 통일약사대불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으나, 그게 동화사의 자랑 중 하나라니 빼먹을 수 없다.

 

거대한 대불전 위에 널찍한 공간에는 33m짜리 팔공산의 연봉을 배경으로 통일약사대불이 서 있었는데, 그 압도적인 크기 때문일까, 그 앞의 석등과 새로 조성한 삼층석탑 두 기가 마치 장난감 같아 보였다. 어쨌건, 24시간 개방으로 365일 꺼지지 않는 수행 기도가 이루어진다니 불자들에겐 좋은 일일 것이다.

▲ 동화사 일주문인 봉황문. 안쪽에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다.
▲ 동화사 일주문인 봉황문. 현판은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이라 쓰였다. 봉암사 봉황문과 같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통일약사대불전 아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숲길을 한참 걸으니 옛 산문인 봉황문에 다다른다. 원래 옹호문 자리에 있던 봉황문은 1965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봉황문 앞길이 옛 동화사의 정문이었다. 지금은 동화문 쪽으로 동화사를 오가니 봉황문 쪽은 한적하기만 했다.

 

봉황문을 돌아보고 다시 온 길을 되짚어 오려고 생각하니 날씨는 뜨겁고, 엄두가 나지 않은데, 지나던 보살이 공사로 막아놓은 옛 산길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주차장 쪽의 공사로 옛길을 지나는 이들이 위험하다고 폐쇄해 놓은 산길은 호젓하고 아름다웠다.

▲ 봉황문으로가는 숲길 오른쪽 개울에 옥계수가 흐르고 있다.
▲ 봉황문 쪽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옛 숲길. 지금은 공사 때문에 폐쇄되어 있다.
▲길은 흙길과 데크로 만든 다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아와 확인하니 나는 동화사를 반의 반만 봤다

 

그 길의 끝이 주차장이었다. 땀을 말려서 바로 동화사를 떠났는데, 돌아와서야 내가 돌아본 동화사는 일부일 뿐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절의 중심부와 통일약사대불 쪽만 돌아보았지만, 절 서쪽의 내원암, 양진암 등의 산내 암자는 물론이거니와 금당선원과 약수암, 그리고 극락전과 수마제전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주차장 아래쪽에 있는 산내 암자 비로암의 보광명전은 2013년에 설립된 팔공총림의 율원(율학승가대학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비로암에는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로암 삼층석탑’ 등 2점의 보물이 있다. 동화사에는 모두 17점의 보물이 있으니, 굳이 총림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 절이 예사롭지 않은 고찰임을 증명하는 셈이라고 하겠다.

 

 

2024. 6.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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