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초파일만 문을 여는 선도량(禪道場)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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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에는 봉암사가 있다”라는 진술은 단순한 사실 명제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담긴 함의는 적지 않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한 봉암사는 1천2백 년 가까이 선도량(禪道場)의 지위를 지켜온 선찰(禪刹:선종禪宗의 절.=선사)로 1982년 조계종단이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한 이래 일년내내 문을 닫고 초파일 하루만 문을 여는 절집인 까닭이다.
1천2백 년 선찰로 연중 단 한 차례만 산문을 여는 봉암사
봉암사가 유명한 것은 소장 문화재가 예사롭지 않은 유서 깊은 절집이어서가 아니다. 또 봉암사가 한국 선불교의 중흥을 이끈 ‘봉암 결사(結社)’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도량이어서도 아니다. 봉암사의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한 것은 오히려 일반인의 발길을 허용치 않으며 연중 단 한 차례만 산문을 열어 온 조계종 특별 수도원이어서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1995년, 복직 이듬해 벗을 따라 봉암사에 처음 들른 때도 초파일이었다. 그러나 내게 봉암사는 절로 드는 숲길을 따라 세차게 흐르던 맑은 시냇물과 경내 곳곳에 친 천막에서 점심 공양을 하던 사람들 같은 기억으로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즘처럼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이 있어서 촬영이 자유롭던 시기가 아니다. 나는 그냥 한 바퀴 절집을 돌아 나온 게 다여서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가끔 짧은 여행을 함께해 온 후배에게 올 초파일에는 봉암사에 가보자고 한 것은 그런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연등 접수와 참배를 위해 개방되는 봉암사를 찾다
초파일을 비워두리라고 했더니 후배가 요즘은 한 일주일 전부터 ‘당일 혼잡을 피해 미리 연등을 접수하고 참배를 위해 산문이 개방’된다고 했다. 그래서 받은 날이 13일 월요일이었다. 8시 반에 출발해서 1시간여 만에 봉암사 매표소 앞에 닿았고 생각보다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 간이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무심히 지나가려다 매표소 앞에 친 천막에서 연등을 접수하던 여성 두 명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오직 연등을 접수하려는 개방이므로, 그냥 들어가시는 건 곤란하다……. 우리는 불교와는 무관했지만, 이 유서 깊은 절집을 돌아보고자 연등 1등 값을 후원하고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혹시 빼먹을까 봐 봉암사에 대해 미리 공부를 좀 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의 정보만으로도 한 아름이었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마땅히 기억에 남는 문화재가 없었지만, 문화유산 포털에서 확인해 보니 봉암사는 소장한 국가지정유산(2024년 ‘문화재’에서 ‘유산’으로 용어 변경)이 모두 9건이었다.
국보가 1점(지증대사 탑비), 보물이 모두 8점이었다. 나는 봉암사에 관한 내 선입견을 교정해야 했다. 선입견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나는 봉암사가 수도원으로서 위상이 특별할 뿐, 여느 절집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봉암사는 주변의 평범한 절과는 다른 무언가를 확실히 갖고 있는 곳이었던 게다.
신라 선문구산 중 희양산파의 종찰, 조계종 종풍을 세운 ‘봉암 결사’의 현장
서기 879년(헌강왕 5)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이 창건한 봉암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이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고, 935년(태조 18)에 정진이 중창하였다. 선문구산은 중국 선종이 들어온 후 나말여초에 지방호족의 세력 기반을 배경으로 성립한 가지산문, 희양산문, 동리산문, 사자산문, 성주산문, 사굴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수미산문 등 9개 산문을 가리킨다.
선종은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는 대승불교의 한 갈래다. 백두대간에 해당하는 희양산 (999m) 기슭에 깃들인 희양산문은 1,100여 년간 수많은 선사(禪師)가 머물러 정진해 왔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어지러워진 불교계는 1947년 희양산으로 들어온 성철·청담·자운·우봉·보문·향곡 스님 등의 ‘봉암 결사’ 정진으로 조계종의 종풍을 새로이 세운 것으로 평가한다.
봉암 결사 이래 엄격한 수행도량으로 자리 잡은 봉암사는 이후로도 승려들의 수행처로서 1982년 특별 수도원, 1984년 조계종 종립 선원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1992년 희양 선원(禪院)은 ‘태고 선원’으로 새로운 편액을 달았다. 1982년 이후 봉암사는 4월 초파일을 제외하고 일체 출입이 통제되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청정 수행도량이다.
특별 수도원, 종립 선원 지정된 청정 수행도량
봉암사로 드는 시내 옆으로 펼쳐진 숲길을 오르자, 산문(일주문)인 단칸 맞배지붕의 봉황문이 나타났다. 봉황문의 창건은, 기록은 없지만, 대체로 1723년 이전으로 본다. 일주문 앞쪽에는 ‘희양산 봉암사(曦陽山鳳巖寺)’ 현판이 걸려 있고, 뒤쪽에는 ‘봉황문(鳳凰門)’ 현판이 걸려 있다. 2022년 함께 보물로 지정된 팔공산 동화사의 일주문 이름도 봉황문이다.
산문을 지나 숲길을 오르다 개울을 가로지른 침류교를 건너면 봉암사 경내다. 화려하고 커다란 2층 누각 남훈루(南薰樓)를 지나면 널따란 계단 위로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남훈루는 말할 것도 없고, 대웅보전도 새로 지은 전각이다. 대웅보전 오른쪽 전각 극락전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 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한다. 그러나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 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바깥쪽에 1칸씩 차양을 두고 있어 실제 불전 내부는 1칸 규모이다.
목탑 형식의 전각 극락전
극락전은 높은 단층 몸체에 좌우 1칸씩의 차양 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아 보이고, 몸체와 차양 칸의 기둥 배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인다. 극락전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꼭대기 부분이 목탑의 요소를 잘 갖춘 목탑 형식의 건물이다. 극락전은 겹처마에 ‘추녀마루로만 구성되고 용마루 없이, 하나의 꼭짓점에서 지붕골이 만나는 지붕 형태’인 ‘모임지붕’을 취하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층의 전각이 뿜어내는 그윽한 아름다움이 자꾸 발길을 붙잡는다.
대웅보전 앞 왼쪽의 요사채를 지나면, 바위로 이루어진 회백색 희양산 정상을 배경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지은 금색전(金色殿)이 날아갈 듯 서 있다. 금색전? 난생처음으로 만나는 전각인데, 금색인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니 금색전은 ‘금색인을 모시는 집’이다.
금색전 앞뜰에서 바라보면 장중한 봉암사의 주산 희양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금색전 앞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 단아하다. 금색전 뒷면 현판의 글씨는 대웅전이니, 1992년 대웅보전을 짓기 전에는 이 금색전이 대웅전이었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봉암사 삼층석탑이 초파일 포장을 칠 지주대에 둘러싸여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2단이 아닌 1단 기단의 이 탑은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이 탑은 머리 장식이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사례다.
지증대사와 정진대사의 승탑과 탑비
금색전 뒤쪽에 조사전이 있고 그 앞에 이 절의 개창자인 도헌국사, 즉 지증대사의 탑과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산을 등지고 서 있다. 이 절을 창건한 지증대사(824∼882)는 17세에 출가하여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지증대사탑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이다. 승탑·사리탑·부도(浮屠)·부두(浮頭)·포도(蒲圖)·불도(佛圖)로 불리기도 한다.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두고, 위로는 머리 장식을 얹었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진 이 탑은 탑비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증대사 승탑은 보물이지만,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새긴 옆의 탑비는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 탑비는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 탑비(국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국보)와 함께 4산 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뿐 아니라, 분황사 승려 혜강이 비문을 쓰고 새긴 사실이 명시돼 있고,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전기적으로 서술하였다. 또,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지증대사 다음으로 봉암사를 번영시킨 이가 정진대사 긍양(878∼956)이다. 긍양은 나말여초의 고승으로 900년(효공왕 4)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에서는 태조·혜종·정종을 선문(禪門)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965년에 입적하자 왕은 시호로 정진을, 탑명은 원오를 내렸다.
지증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한데 있는 것과 달리 정진대사의 탑비는 절 어귀에 비각 안에 모셔져 있으나, 승탑은 보이지 않았다. 헤매다가 한 스님이 일러주어 탑비 옆의 산등성이에 올라 원오탑을 만날 수 있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운 탑으로, 양식은 지증대사탑을 모방하고 있으나 기본 구성과 비례감, 조각 수법 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산등성이의 노송들 사이에 호젓하게 서 있는 정진대사 탑이 비각에 갇힌 지증대사 탑보다 훨씬 보기에 좋았다. 지증대사 탑비가 국보, 탑이 보물인데, 정진대사 탑과 탑비는 각각 보물로 지정되었다. 봉암사 소장 국가지정유산이 모두 9점인데, 그중 4점이 두 스님을 기리는 승탑과 탑비니 이 절집에 미친 두 분의 이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다시 남훈루 앞 침류교를 건너 양산천을 따라 낸 군데군데 데크로 보강한 숲길을 10여 분 올라 백운대(白雲臺)를 찾았다. 달리 옥석대라 불리기도 하는 계곡은 널따란 암반에 맑은 물줄기가 이어지고, 주변에는 어디에선가 일부러 옮겨온 듯한 거대한 바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백운대 계곡의 마애 미륵여래 좌상, 아름다운 바위와 물의 비경
암반 위 집채만 한 바위에 새긴 불상이 마애 미륵여래 좌상이다. 미륵여래 좌상은 높이가 539.6cm, 너비가 502.6cm이니, 생각보다 거대한 불상이다. 계곡 건너에서 바라보면 바위 앞에 돗자리를 깔고 참배하는 불자들의 모습이 실제보다 훨씬 왜소하게 보일 만큼.
17세기 승려 선산 출신의 환적당 의천(1603~1690)이 1662년부터 봉암사에서 수행할 때 이듬해인 현종 4년(1663) 백운대에 이 불상을 조성하고 사적비를 세웠다. 봉암사 마애미륵여래 좌상은 문헌을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 동기, 발원자, 도상 등에 대해 고증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마애불이라는 점, 조선 후기 마애불 연구뿐만 아니라 미륵불상의 도상 연구의 절대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고목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수십, 수백 톤이 나갈 듯한 거대한 암벽, 계곡 가장자리에 이런저런 글귀가 새겨진 바위의 행렬, 그 사이 너럭바위 위로 세차게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연출하는 풍광은 경이롭다. 인적 드문 비경은 봉암사로 드는 침류교(枕流橋)에 새긴 그 속리(俗離)의 별천지 ‘용추동천(龍湫洞天)’을 이름일 터이다.
별천지 ‘용추동천(龍湫洞天)’이 여기런가
우리는 계곡을 건너 너럭바위 위 그늘에서 재킷을 벗고 땀을 말렸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냇물은 바위의 하얀 속살을 간질이며 크고 작은 낙차로 떨어지면서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스러졌다. 하얗게 부서져 흘러내리는 시냇물은 옛 격식대로 ‘계류(溪流)’라고 표현해도 좋은 장면이었다.
말없이 흐르는 물과 바람이 흔들리는 푸른 잎사귀의 떨림, 유난히 산뜻한 단풍나무 잎 그림자 등이 뒤섞인 풍경은 압권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절 입구에서 연등값 대신 낸 후원금이 이 비경의 관람료로 아깝지 않은 비용이라는 데 뜻을 같이한 이유였다.
언제 다시 이곳을 들를 수 있을까, 나는 숲길에 이어진 단풍나무 잎에 단풍이 곱게 물들 늦가을의 어떤 날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초파일 부근이 아니라면 이 숲길을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굳이 늦가을의 단풍을 보자고 천 년도 넘게 이 절집을 지켜온 수행자들의 적요를 깨뜨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하산해 절을 빠져나오다가 종무소 근처에서 이동통신 3사의 중계차를 만났다. 맞다, 백운대 계곡은 물론 봉암사 경내에서는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납자(衲子)들의 수행처인 봉암사에 휴대전화가 어찌 소용에 닿을까. 그러나 초파일 행사를 앞두고 봉암사를 찾은 사부대중을 위해선 임시로 중계차가 필요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극락세계 왕생의 깨달음은 영원하다
나는 가져간 메모지를 보면서 국가지정문화재를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보지 못한 건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하나뿐이었다. 지나가는 스님에게 물으니, 자신 없이 극락전에 있는 부처님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돌아와 확인해 보니 극락전의 아미타여래 불상은 국가 문화유산 포털에 나와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같지 않았다. 극락전 앞에도 보물 안내판이 따로 없었다.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행방은 알려주는 자료는 없었다. 봉암사 종무소로 전화를 넣어 보려다가 말았다. 아미타여래좌상이 어디에 있든 뭇 생명 있는 자들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깨달음에 이른다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4. 5.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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