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여행] ③ 사적 경주 대릉원(大陵園)과 ‘고분 공원’ 20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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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여행에서 대릉원은 가장 먼저 찾은 곳이었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동궁과 월지 부근의 사적지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고, 밤까지 머물 수 있는 곳으로 대릉원과 첨성대, 그리고 계림을 정했었다. 금요일이라고 시뻐 보았는데, 대릉원 앞 주차장은 만차였다. 푯말을 따라 들어가 무료 임시 주차장에 간신히 차를 댈 수 있었다.
대릉원은 ‘사적’이면서 ‘고분 공원’이다
대릉원은 “삼국시대 신라의 왕 · 왕비 · 귀족 등의 무덤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미추왕을 대릉(大陵 : 죽장릉竹長陵)에 장사 지냈다’라는 기록에서 따온 것으로 대릉원에는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2011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대릉원은 본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황남리고분군, 경주황오리고분군, 경주인왕리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2011년 국가유산청이 유적의 특성과 역사성을 고려하여 경주평야 한복판에 인접해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으로 재지정한 것이다.
크게는 고분군 통칭, 작게는 황남동 고분군 중심의 공원
그러니까 사적 대릉원은 경주 시내 5개 동네에 걸쳐 분포한 고분군을 통틀어 이르는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들른 대릉원은 평지에 자리 잡은 신라시대의 크고 작은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데 이곳은 1973년 ‘대릉원’이란 ‘고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고분 공원 안에 있는 무덤은 주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자갈과 냇돌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한 것이다. 현재 땅 위로 봉분이 남은 것은 20여 기이지만, 땅속에 작은 무덤들이 무수히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분(古墳)은 글자 그대로 ‘옛 무덤’이다. 무덤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무덤은 피장자를 기리는 시설물로 시신뿐 아니라, 껴묻거리(부장품)를 통하여 당대를 박제할 수 있어 역사 연구와 그것을 재구성하는 학술 자료로 쓰인다.
지상의 구조물이 전쟁과 자연재해 등의 외부적 요인으로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고분은 도굴되지 않는 한, 밀폐되어 시신을 비롯한 껴묻거리를 통하여 고대인의 장례 문화를 복원하고 해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대릉원은 수천 기에 이르는 고분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라 천 년의 수도 경주 시내에 인접한 고분을 통틀어 이르는 이름이면서 동시에 고분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형태의 고분은 잘 관리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냥 둥그런 형태의 언덕 모양을 하고 있을 뿐, 그 속이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는 다만 짐작만 할 뿐이다.
사람들은 고분 사이로 내어서 가꾼 통행로를 오가며 여기저기 흩어진 무덤의 봉분을 스쳐 지나가면서 쉬고, 잘 조경된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잡초 하나 없이 잘 관리된 매끄러운 잔디를 자랑하는 봉분 사이로 소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목련, 산수유, 대나무 등이 어우러진 풍경 속으로 거니는 것은 여느 공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제공한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적지라고 할 수 있는 경주 시민들에게는 심상한 일상일 뿐이겠지만, 외지에서 경주를 찾은 이들에게 이러한 풍경은 색다르고 뭔가 비밀스러움을 지닌 듯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같은 무덤이라도 경주의 고분이 주는 느낌은 훨씬 강렬한 것이기 때문이다.
황남대총과 천마총
고분 공원에 있는 고분 가운데 황남대총은 높이 23m, 남북 길이 120m, 동서 지름 80m로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1973년부터 발굴이 시작된 황남대총에서는 총 58,441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관·금제 허리띠·마구류를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어 이 무덤이 왕의 무덤임을 강력히 드러냈다.
발굴조사 결과 남분(南墳)이 먼저 조성된 다음 북분(北墳)은 남쪽 무덤의 봉토를 일부 제거하고 잇대어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분의 시대적 차이는 약 20년 정도로, 남분에서는 철제무기류가 많아 피장자를 왕으로, 북분에서는 금으로 된 유물이 많아 왕비로 추정한다.
무덤이 조성된 시기는 신라가 절대왕권 체제로 강화되는 마립간(麻立干) 시대로 보고, 피장자는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이나 제18대 실성왕(재위 402∼417) 또는 제19대 눌지왕(재위 417∼458) 중 한 명으로 추정한다. 남분에서 나온 사람의 뼈를 분석한 결과 약 60세의 남자로 추정되며, 왕의 목곽 옆에 순장(殉葬)된 것으로 보이는 15세가량의 소녀 유골이 확인되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3점은 국보, 10점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신라와 주변국과의 활발한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유리그릇 등도 발굴되었다. 이 신라왕릉은 금으로 장식된 출토 유물이 많아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부르게 되었으며, 이는 당시 절대왕권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발굴 뒤 ‘천마도’가 출토되면서 ‘천마총(天馬塚)’으로 불리게 된 155호 고분은 대릉원 고분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무덤이다. 천마총은 옆의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인데, 이는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1973년 발굴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나왔는데, 최근 천마가 ‘말’이 아니라 ‘기린’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천마도는 지금까지 남은 신라의 대표적 회화작품으로 가치를 인정하여 국보로 지정되었다.
천마총은 축조 시기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출토된 유물이 1만 1526점 중에서 금관, 금모자, 새 날개 모양 관식(冠飾),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금관, 금모자, 금 허리띠 등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인 천마총은 목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 덧널을 짠 후 주위와 윗부분을 돌로 쌓고,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지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 마무리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검총과 포토존
발굴 당시 천마총의 봉분은 화산분화구처럼 움푹 들어가 봉분에 흙을 채워 봉긋하게 복원하였고, 무덤 형태를 알 수 있게 유리전시관 안의 썩은 목관은 그대로 둔 채 덧널만을 복원해 목관 내부를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우리의 동선 끝에서 만난 천마총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줄이 기다랗게 늘어졌는데, 대기 시간만 30분이어서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고분 공원의 입구 가까이의 미추왕릉은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 무덤이다. 신라 13대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은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 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대릉원은 4세기 후반인 마립간 시기부터 조성된 김씨 왕조의 집단묘역이므로 3세기 후반의 미추왕과는 100여 년이라는 시간 차가 있다. 미추왕릉 내부는 마립간 시기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확인돼 미추왕릉 여부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유례왕 14년(297) 이서국에서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자,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는 미추왕릉 관련 전설이 전한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른다고 한다.
천마총과 미추왕릉 사이에 있는 지름 44.5m, 봉분 높이 9.7m의 100호분은 신라 고분 가운데 최초로 본격적인 학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1916년 발굴하였을 때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와 철검만이 출토되어 ‘검총(劍塚)’이라고 불린다.
검총은 외형이 대형분이고 각부의 규모나 축조수법 등도 최고위 신분의 묘형이지만 출토된 유물은 철기와 토기 몇 개에 지나지 않아 추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전면적인 발굴이었다는 주장도 있다고.
대릉원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꾀는 곳은 이른바 ‘포토 존’이었다. 두 고분 사이에 목련 한 그루가 서 있는 멋진 배경이라고 사람들의 줄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관광지에 가면 이른바 ‘인증샷’이 필수가 되다 보니, 어디 없이 그럴듯한 배경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게 흔한 풍경이 되었다.
목련꽃도 지고 없는데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꽃이 필 때 한 번 더 경주를 다녀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였던가, 어느 고분 위에 활짝 핀 벚꽃을 활짝 피운 벚나무가 서 있는 광경을 본 것이.
돌아와서야 고분 공원 담장을 넘으면 봉황대, 금관총 등이 있다는 걸 알았다. 봉분 위에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고분이 바로 봉황대였다는 것도. 이래저래 경주를 다시 찾은 이유는 자꾸 늘어나기만 한다.
2024. 6. 20. 낮달
[서라벌 여행] ①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서라벌 여행] ② 첨성대와 계림(鷄林)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 경주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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