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교육, 노동, 인권, 생명 평화운동의 어머니 조영옥 선생을 배웅하면서
조영옥 선생님이 먼 길 떠나셨다. 오랜 투병 끝에 가시면서 전교조와 참교육의 이름으로 만난 사람들, 동료, 선후배, 시민단체 동지들을 불러 모아 우리가 함께한 날을 추억하게 하고, 뉘우치게 하게, 사무치게 하고 가신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를 부르는 호칭이 지부장, 지회장, 대표, 의장 등 제각각이어도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이름은 ‘선생님’이었다. 1976년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울진 죽변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이래 그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자기 삶 속에서 여유와 가치를 추구하려는 ‘보통’의 교사로 살았다. 그러나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가 건설되면서 전국의 학교와 교실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교육 민주화’와 ‘참교육’의 격랑 앞에 그는 이전의 안온한 삶을 버리고 기꺼이 거기 몸을 던졌다.
1989년 법외노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과 함께 서른여섯 늦깎이로 교육 운동에 입문했다. 그는 영주지회의 초대 지회장을 맡으면서 학교에서 내쳐졌고, 누구도 맡기를 꺼리는, 온전히 책임지는 자리를 마다치 않는 삶을 살았다. 모범적인 도덕 교사로 살아오다 어느 날 반골의 투사가 되어버린 그의 변신은 현실을 마지못해 수용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구한 주체적 삶의 의지였다.
늦깎이로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그를 조직의 지도자로 서게 한 것은 겸손하되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히 맞서는 도저한 낙관주의였다. 그는 조직의 이해를 개인의 손익에 앞세우면서 남들이 꺼리는 역할을 마다치 않았던 사람이었다.
1993년 경북지부장을 맡았는데, 이듬해인 1994년 해직자들의 일괄 복직을 앞두고 그는 누군가가 조합을 지켜야 한다는 조직의 요구를 받아 안았다.
모두가 복직해 아이들이 기다리는 학교로 출근할 때, 그는 몇 명의 상근자가 지키는 쓸쓸한 조합 사무실로 나갔고, 현장에서 분출하는 각종 요구와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푸는 일에 오롯이 매달렸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쉽게 지치지 않는 강골이라, 2박 3일의 강행군쯤은 너끈히 해치우는 그를 보고 누군가는 ‘철의 여인’이 따로 있겠느냐고 했을 정도였다.
그는 임기 1년인 지부장직을 여섯 해를 내리 맡아 조직을 지켰고, 1999년 전교조가 합법화될 때, 학교를 떠난 지 꼭 10년 만에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학교를 떠나 있던 1991년 첫 시집 『해직일기』를 냈던 그는 복직하던 해 두 번째 시집 『멀어지지 않으면 닿지도 않는다』를 내어 자신의 만만찮은 시력을 더했다.
그는 눈물이 넉넉한 이다. 어쩌면 다소는 아쉽기도 한 지도력의 강단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그이의 주특기인 ‘껴안고 함께 우는’ 공감의 연대가 기워주기도 한다. 그래서 복직 1년 전인 1993년에 서둘러 세상을 떠난 고 정영상 시인(전 안동 복주여중)의 표현대로 그는 천생 “넉넉한 옷섶의 큰 누님”일 수밖에 없다.
조직의 책임을 벗은 대신 그는 복직하면서 다른 부문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도법 스님과 함께 ‘생명 평화 결사’ 결성에 참여했고, 참여정부 때는 교육혁신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상주로 옮겨 정착하고 2016년 정년퇴직한 뒤에는 지역의 언론, 환경, 지방자치 등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드는 인터넷신문 『상주의소리』를 창간했고, ‘강과 습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면서 환경운동연합 상주지회도 꾸렸었다. 상주시민 의정참여단에도 함께했으며, 2015년에는 ‘상주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주도하는 등 어떤 상황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발걸음을 여지없이 증명했다.
그는 세 번째 시집 『꽃의 황혼』(2005)에 이어 스케치와 관련 글을 모은 『긴 망설임의 끝, 선택의 행복』(2016)도 펴냈다. 교단생활 초기에 일요화가로 활동한 그의 이력이 단순한 취미활동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내연해 온 예술적 영감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상주와 안동 등지에서 연 드로잉 전시회에 내놓은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넉넉하고 따뜻한 눈길에 잡힌 이웃과 사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거듭나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 글 : 갤러리 카페의 <조영옥 드로잉전>- 쉼 없는 발걸음이 부럽다]
투병 중에도 긍정과 낙관의 태도를 잃지 않고 의연했던 우리의 ‘맏언니’, ‘맏누님’, 조영옥 ‘선생님’은 이제 우리 곁을 영영 떠난다. 그와의 작별이 한갓진 슬픔이 아니라, 그의 삶이 일러 준 사유와 실천을 저마다의 가슴에 값진 유산으로 상속하면서 그를 배웅하고자 한다.
2024. 11. 21. 낮달
* 이 글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기관지인 <교육희망>과 <한겨레>(2024.11.26.)에 각각 실렸다.
<교육희망> http://m.news.eduhope.net/26567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11691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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