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894년 5월 11일 - 동학농민군, 전라 감영군과 싸워 대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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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黃土峴)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개항기 동학농민군 관련 전적지이다. ‘고개 현(峴)’ 자를 쓰지만, ‘영(嶺)’이나 ‘치(峙)’를 쓰는 고개보다 낮은 구릉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황토현은 해발 35m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와 도계리 사이에 있다.
황토현에서는 1894년(고종 31) 5월 11일(음 4.7.) 새벽에, 동학농민군과 감영군(監營軍)의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전투는 1894년 2월 15일(음 1.10.) 전봉준 등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면서 일어난 고부 농민 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중 농민군이 승리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였다.
4월 25일(음 3.20.)에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제폭구민(除暴救民)’·‘광제창생(廣濟蒼生)’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사 김문현의 명령을 받아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출동한 감영(監營) 군, 그리고 보부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향병(鄕兵) 수천 명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보부상은 조선 관군과 일본 연합군의 길잡이가 되어 혁명을 진압하는 데 조력했다.
5월 8일(음 4.4.), 부안 관아를 점령하여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한 농민군은 전라 감영군이 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온다는 정보에 진로를 바꾸어 부안과 고부의 접경지대에 있는 성황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무남영병 700여 명과 보부상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향병 600여 명은 원평·태인을 거쳐 백산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이 승리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최소 4천여 명이었다. 5월 10일(음 4.6.) 농민군과 감영군은 태인의 용산 화호 나루 부근에서 최초로 맞붙었다. 이때 농민군은 거짓 패한 체하며 후퇴하였고, 백산의 감영군이 추격해 오자, 농민군은 황토재로 올라갔다. 감영군은 계속 추격하여 황토재 인근에 진을 쳤다.
감영군은 현지의 지리에 어두웠고 때마침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개마저 자욱했다. 농민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감영군은 소를 잡고 술까지 마셔가며 한가로운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5월 11일(음 4.7.) 새벽 4시경에 무방비 상태에 있던 감영군 진영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황현(1855~1910)이 당시의 당쟁 및 세도정치, 동학농민전쟁 등에 관하여 서술한 역사서 ≪오하기문(梧下記聞)≫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미 날이 어두워져 양쪽이 모두 병영을 점검하여 움직이지 않고 다만 군호를 알리는 포성만 들렸다. 밤이 깊어지자, 적(농민군) 진영은 조용해졌고 포성도 들리지 않았다. 관군은 의아스러워하며 소나무를 잘라 횃불을 만들고 진영 가득히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붙이자, 진중(陣中)이 마치 대낮과 같았다.
그러나 막사 밖으로는 연기가 자욱하였고 때마침 안개가 크게 끼어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콩 볶듯이 포성이 들리더니 포탄이 발밑에 떨어지자, 관군은 마치 삼이 쓰러지듯 엎어지고 자빠졌다. 적은 삼면을 포위하고 서쪽 한 방향만 열어 놓고 함성을 지르며 압박하자 관군은 일시에 무너졌다.
이때 날은 이미 훤하게 밝았고 안개도 걷혔으므로 적은 지방에서 모집된 병사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뒤쫓지 않고 영병(營兵)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보부상으로 붉은 도장을 찍은 것을 등에 붙인 사람들만 끝까지 따라잡아 어금니를 악물고 칼을 휘두르는 품이 마치 사적인 원수를 갚듯이 하였다.
또 산 아래 너른 들녘에는 봄갈이를 끝내고 물을 받아 놓았는데 아득하니 넓었다. 패잔병들은 물을 보고 뛰어들었지만, 물이 깊고 진흙은 질어 허우적거리다 내리치는 창·칼에 맞아 피가 땅을 적시고 논물을 붉게 물들였다. 관군이 버린 군수물자가 도로에 가득하였다.” - <오하기문> 80쪽
이 전투에서 감영군은 사상자가 1천 명이 넘을 만큼 참패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이 숫자가 “과장된 듯하며 200여 명 정도로 보인다”라고 서술한다) 영관(營官)과 태인 보부상의 우두머리와 서기 등이 죽었고, 적지 않은 영관들은 도주했다. 이 승전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농민군의 사기는 절정에 올랐으며, 관망하던 일반 농민들이 봉기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질적 양적 확산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질적·양적 확산으로 이어진 승전
황토현은 동학농민혁명이 ‘동학란’, ‘동비(東匪)의 난’으로 평가되었던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까지 구전(口傳)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동학 농민 봉기의 역사적 의의가 반봉건·반외세의 민족운동이었다고 평가되면서 비로소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황토현에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승리를 기념하는 동학혁명기념탑이 건립된 것은 1963년 10월이었다. 그 후 전적지 주변에 흩어져 있던 동학 관련 유적이 전적지와 함께 크게 보수되었다. 1981년에는 황토현 전적지가 사적 제295호로 지정된 데 이어 1983년에는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1987년에는 전적지에 전봉준 동상이 세워졌다. (* 2021년, 친일 작가 김경승의 작품이란 지적을 받아온 전봉준 동상을 철거하고, 2022년에 그 자리에 동학농민군 행렬을 형상화한 작품이 대신 들어섰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고양하고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제정 업무가 추진된 것은 2018년부터다. 전국 자치단체로부터 기념일을 추천받고, 국민을 대상으로 공청회를 열어 최종적으로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전투에서 최초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선정하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 2019년 2월 26일에 제정 공포됐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됐으나, 혁명 참여자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2014년에 2주갑(周甲)을 맞았고, 올해는 130돌이다. [관련 글 : 갑오 2주갑(周甲), 다시 동학년(東學年)을 생각한다] 동학농민혁명은 개항 무렵에 국권을 침탈하려는 외세에 맞선 반봉건·반외세의 민족운동이었다고 규정하면서도 정작 국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 독립유공자법은 적용 대상자(제4조)를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서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 또는 순국한 자”로 규정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일어난 것은 1894년 7월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 직후인 9월이고, 을미의병이 일어난 것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다.
그런데 1895년 을미의병은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참여자 145명이 1962~2022년 사이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77~2021년 사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포상 심사가 다섯 차례나 이뤄졌지만, 단 한 명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국권 침탈 시기를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으로 본다는 국가보훈부의 1962년 심사 기준 때문이라고 한다.
2023년에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올랐다. [관련 글 : ‘4·19혁명’과 ‘동학농민혁명’의 ‘기록물’,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독립유공자법과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의 개정을 통해 이 모순이 해결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 이유다. [관련 기사 : 동학 봉기는 항일구국활동이 아니다?]
2024. 5. 11.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토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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