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 포로에게 납치되다
1952년 5월 7일, 도드(T.Dodd) 준장은 제76구역 포로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포로수용소장 면담을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도드 준장 보좌관은 포로들의 과격한 행동을 우려한 나머지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도록 포로수용소장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도드 준장은 보좌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약속 시간에 제76구역 출입구에서 직접 포로대표들과 면담했다. 그런데 면담 도중 갑자기 포로들이 그를 에워쌌다. 곧 포로들은 순식간에 도드 준장을 납치하여 포로수용소 안으로 끌고 갔다.
- 박도, <어떤 약속> 중에서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에 그려진 대로 1952년 5월 7일, 수요일에 포로들에게 포로수용소장이 납치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전적으로 수용소장 도드 장군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Koje POW Camp)는 한국전쟁 때 잡힌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1년 2월에 설치해 1953년 7월까지 운영한 유엔군의 포로수용소였다. 당시 이 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모두 15만 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포로수용소의 치열한 이념 갈등
당시 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반공과 친공(親共)으로 나뉘어 수용소 내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계획적으로 투항해 수용소로 침투한 북한 공작원들이 결성한 친공포로 조직에 반공포로들이 맞서자 이들 간에 유혈 충돌이 심심찮게 발생하였다. [국방부 블로그 ‘아! 6·25’ 참조]
그런데 거기서는 시체에서 팔다리를 뜯어내고 눈을 뽑고, 귀, 코를 도려냈다. 아니면 바위를 쳐서 으깨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서 변소에 갖다 처넣었다. 사상(思想)의 이름으로, 계급(階級)의 이름으로, 인민(人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생(生)이 장난감인 줄 안다. 인간을 배추벌레인 줄로 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도리가 없었다. ‘인간(人間) 밖’에서 일어나는 한 에피소드로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 장용학, ‘요한 시집’ 중에서
장용학의 단편소설 ‘요한 시집(詩集)’의 한 장면은 그런 충돌의 끔찍한 결과였다. 밤에는 경비병들이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 충돌이 잦았으며, 폭행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친공포로들은 유엔군의 정훈교육에 극렬히 저항하는 한편 철물제조 교육 등을 이용해 여러 가지 종류의 사제무기를 제조해 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송환 희망 포로의 수를 결정하기 위한 포로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친공 포로들에게 장악되어 있던 제62동에 진입한 조사단이 포로들의 공격을 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미군 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으며 양측의 충돌로 77명의 포로가 사망하였다.
이에 판문점 공산군 측 대표단이 즉각 ‘학살 유혈 사건’이라며 항의하였고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수용소 내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 신임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버린 것이다.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콜슨 준장을 새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제76구역의 친공 포로들은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요구했다.
도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콜슨이 포로 자유 송환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요구조건을 수락하자 도드는 포로들에게 감금된 지 사흘 만에 석방되었다. 이에 클라크 대장은 포로들에게 지나치게 양보한 책임을 물어 콜슨을 해임하고 이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수용을 결정하고 H.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클라크는 뒤에 도드와 콜슨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불명예 조치를 내렸다).
신임소장 보트너는 공수특전대원을 수용소 안에 투입해 친공 포로들을 500명 단위로 강제로 분산 수용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이른바 ‘해방구’처럼 운영되던 친공 포로조직은 무력화되었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육지와 가까워 포로 수송이 용이한 데다가 당시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어서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11월부터 유엔군에 의해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 장평동,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총면적 12㎢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이듬해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개시되었다.
포로 교환과 반공포로 석방
한국전쟁에서 포로 교환 문제의 논의는 전쟁 발발 1년 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북한은 전원 석방을 요구했지만, 유엔이 이 요구에 응하지 못한 것은 한국전쟁이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실제 반공포로 가운데에는 공산 치하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북한군, 중공군도 있었지만, 북한군이 이남을 점령하면서 강제 징집한 의용군 출신 병사들은 북한으로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포로 교환의 방식이 서로 달라 진전이 없던 포로 교환 문제는 1953년 2월 부상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을 북한이 받아들여 그해 4월부터 처음으로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반공포로 문제는 이듬해인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의 일방적 석방으로 27,389명이 탈출하면서 매듭지어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던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수용되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제14 야전병원에서 이송되어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52년 12월에 석방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폐쇄되었다. 유적은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된 뒤 1999년 유적지를 확장하여 유적관을 1차 개관하였고, 2002년에는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다. 2005년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반도 냉전 시대와 치열한 이념 갈등의 한 시대를 표상하고 있다. 2011년 유적공원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도 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시민들이 철거를 요구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관련 글 : 독립군 토벌부대 출신 군인은 어떻게 창군 주역이 됐나]
김백일(가네자와 도시미나미 金澤俊南, 1917~1951)은 흥남 철수 당시 국군 1군단장으로 피란민 철수 작전에 이바지한 인물로 알려졌다. [관련 글 : 압록강 진격 국군과 유엔군,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어주다]
그러나 그는 간도특설대 중대장을 역임하고 만주국 훈 5위 경운장 등을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민족행위자’로 확정한 인물이다. 유적공원의 김백일 동상과 관련된 논란은 결국 식민지 시기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민족사의 원죄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2016. 5.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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