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항쟁 뒤 43년, 여전히 ‘항쟁의 폄훼와 왜곡’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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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기에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에게 총격을 가한 5·18은 너무 ‘끔찍한 사건’이었다.
‘5·18 민주화운동’과 ‘광주 민중항쟁’ 사이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이 정치적 비극의 본질은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정치군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무고한 시민’에게 총을 쏜 사건이다. 그리고 이에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키고자 분연히 봉기했고, 끝내는 무력 항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여야가 합의하여 진상을 조사했고 5·18 특별법과 보상 관련 법률까지 제정되어 보상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그 명칭은 ‘민주화운동’에 머물고 있다. 혁명으로 불러야 할 기미년 독립투쟁이 ‘3·1운동’에 머문 것과 마찬가지다. 시민과 사회단체 등에서 ‘5·18’을 따로 ‘광주 민중항쟁’, ‘광주항쟁’, ‘오월 항쟁’ 등으로 부르는 이유다.
18년 독재 끝에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살해된 뒤, 대통령의 ‘유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다. 애당초 박정희의 권력은 1979년 10월 4일, 국회에서 민주공화당 의원 단독으로 김영상 신민당 총재의 징계를 ‘제명’으로 전격 처리한, 30년 의정 사상 최초의 의원제명 사건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18년 독재 붕괴에 이어진 신군부 쿠데타
10월 16일, 부산대생 5천여 명이 유신철폐·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하면서 시작된 부산·마산항쟁(부마항쟁)이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진행된 것은 부패한 절대권력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계엄군을 투입하여 탱크로 항쟁을 진압했으나, 박정희는 그 10월이 가기 전에 피살됨으로써 유신독재는 붕괴했다.[관련 글 : 유신 독재의 시작과 붕괴]
대통령의 유고 이후, 시해 사건의 수사를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국정 공백기의 권력을 손아귀에 넣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사조직 ‘하나회’ 소속의 정치군인의 득세가 이어졌다.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강제 연행을 시도하다 총격전까지 불사한 쿠데타를 감행했고, 신군부는 군권을 장악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서울의 봄’으로 비유된 정치의 계절은 심상찮은 조짐으로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 명이 경찰과 충돌하면서 시작된 ‘사북항쟁’은 권위주의 독재에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폭발한 것이었다. [관련 글 : 저임금·어용노조에 폭발한 ‘사북 노동항쟁’ 발발]
학원 민주화와 학내 자율 활동 등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와 농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 4일에는 국민연합이 학원 민주화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 5월 14일에는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가두시위를 결의했고, 다음날 서울 시내 30개 대학 학생 7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도심서 시위를 벌였다.
항쟁의 전개 과정(5‧18 타임라인 참고)
5월 17일,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을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도중에 연행하였고,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계엄사령부는 정치활동 중지를 공포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등의 ‘포고령 10호’를 발령했다. 신군부는 여론에 맞서 계엄을 확대함으로써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거부한 것이었다.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 군대를 투입하였고, 서울에는 1, 3, 5, 9, 11, 13공수여단이,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되어 민주화운동 세력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 계엄군의 무차별 위협과 폭력
5월 18일 10시 무렵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들에게도 폭언과 구타를 서슴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시내로 들어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고, 계엄군은 무차별 폭력으로 대응했다. 계엄군은 도망치는 젊은이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옷을 벗기고 묶어서 데려갔다.
5월 19일, 선을 넘은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 적극적으로 저항 시작
계엄군의 위협과 폭력이 점점 선을 넘자 분노한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 새벽 도심 곳곳에서는 군과 시민 사이에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마침내 시민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고등학생 김영찬 군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이 이날 사망했다. 이에 도심으로 집결한 시민들은 버스와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한 차량 시위대를 조직하여 맞섰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시민을 제압하려 했지만, 이미 시민들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시민들이 광주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광주MBC 건물이 불타기도 했다.
5월 20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5월 20일,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여 광주시민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광주역에서 발견된 시체 2구가 손수레에 실려 금남로에 나타나면서 광주시민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마침내 시민들은 군의 저지선을 넘었고, 계엄군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저격수의 조준 사격에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내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고 부상자가 늘어나자 병원 앞에는 주부 등 젊은 여성들이 헌혈하겠다며 달려왔다.
이 시점에서 시민은 자위(自衛)를 위해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총기를 확보하고자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시민들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기도 했다. 무장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리었다.
양측의 공방 속에서 계엄군은 전략적으로 퇴각하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하며 승리를 자축하였다. 퇴각한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고 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차단하였다. 계엄군이 시 외곽을 근거지로 매복하여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희생자는 점점 늘어났다.
시민군과 광주 공동체(5월 21일~5월 26일)
계엄군을 물리치고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지켜낸 것은 5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간이었다. 이때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져 계엄사 측과의 협상을 벌이고 자치활동을 이어갔다. 시민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상인들은 길가에서 밥을 지어 시민군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하여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 음식을 대가 없이 나눴고, 부상자를 돕는 헌혈에 참여하는 등 공동체를 실천했다. 이들은 희생자를 관에 안치하였고, 입관하지 못한 주검들은 무명으로 덮었다. 마련한 분향대에 시민들은 줄지어 찾아와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하였다.
시민들이 뜨거운 시민 공동체를 운영하는 동안 신군부는 다른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라고 왜곡 선전했고,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계엄군의 살인적 진압을 은폐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의 협상 과정에서 내부 의견에 혼선이 있었고, 계엄사 정보요원의 교란작전으로 말미암아 협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5월 27일, 계엄군의 재진입과 항쟁 종료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나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며,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으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 특공대가 투입되었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도청을 떠나기 시작했지만, 많은 시민이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관련 글 : 신군부, 광주 재진입 작전으로 항쟁 진압]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공략, 1시간 남짓 교전 끝에 도청을 접수했다.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서 짧고 불꽃 같았던 생애를 마감했다. 이날 도청에서 머문 사람과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열흘간의 항쟁 때 생명을 잃은 이들은 지금 망월동 국립 5·18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총 피해자 5,517명, 학살의 주역 전두환·노태우는 죽고
광주항쟁의 피해자는 총 5,517명으로 밝혀졌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 구금 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이상 5·18기념재단 누리집)
항쟁 진압 후 신군부의 권력은 확고해졌다. 신군부는 김대중과 주요 재야인사들, 항쟁 관련자들을 ‘내란 기도’ 혐의로 구속하고 권력 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결국 최규하는 잔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였고, 전두환은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선거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관련 글 : 전두환의 신군부, ‘군사 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하다 / 최규하 대통령, 8개월 10일만에 ‘허수아비 옷’을 벗다]
언론을 통제하면서 신군부는 오월의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였고, 광주와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해 5·18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상황은 반전하였다. 이어 검찰은 12·12사건과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하였으며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반란수괴 등 혐의로 12월 3일 구속·수감되었다.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벌금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에 벌금 2,626억 원 추징을 선고받았다. 이는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즈음해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석방되었다.
5·18은 뚜렷한 지도부와 이념적 프로그램이 빠진 상태에서 일어난 “비조직적 군중의 자연발생적인 자구행위, 방어적이고 대중적인 저항”으로 평가된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과 노태우조차 사망할 때까지 발포 책임 등을 명시적으로 확정하지 못했고, 광주에 군을 투입한 데 대한 미국 책임 문제도 정리되지 못했다.
특별법과 보상, 세계기록유산까지
1990년 5‧18 관련자의 피해 배상과 보상의 근거가 된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시작되었다. 또 5‧18 관련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도 추진되어 항쟁에 참여한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보상과 더불어 ‘5‧18민주유공자’로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또 1997년 옛 망월 묘역 옆에 국립 5‧18 민주묘지가 새로 조성되었다.
계엄군 퇴각 이후 엿새 동안 치안 공백 상태에서도 광주시민들은 완벽하게 질서를 유지했다. 온갖 총기류가 시민들 수중에 있었지만, 절도나 강도 등 범죄나 불상사는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항쟁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드높은 도덕성과 공동체 윤리는 세계 시민들로부터 기림받고 있다. 2011년 5월 25일,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의 인권 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인류의 숭고한 유산이 되었다.
광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는 광주의 기억을 통하여 군사 지배를 극복하고자 한 투쟁을 이어갔고, 그예 군사독재를 무너뜨렸다. 시민들은 투쟁을 거치면서 민주화 의식이 크게 높아졌고,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집권당의 최고위원이 광주를 폄훼하고, 극우 인사들이 잊을 만하면 항쟁에 북한군의 개입 따위를 부르대는 망발이 이어지고 있다. 광주가 43년 전의 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시민의 가슴에 살아남은 도시가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2023. 5. 17. 낮달
참고
· 항쟁의 전개 과정은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함.
· 5·18기념재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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