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중 찾은 ‘너븐숭이’, 그리고 현기영의 <순이 삼촌>
1980년 광주의 오월은 ‘민주화운동’이라는 정부의 공식적 평가와 무관하게 ‘항쟁(抗爭)’ 또는 ‘민중항쟁’으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1947년에서 1954년까지 8년여 동안 전개된 제주의 4·3도 공식적으로는 ‘사건’이지만 자연스레 ‘항쟁’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의 오월이 신군부의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한 것에 비기면 남로당 무장투쟁이 포함된 4·3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4·3에 ‘항쟁’이 자연스레 붙는 이유를 제주 출신의 작가 현기영은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이념적인 건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 왜 붉은색을 칠하려고 해? 공동체가 무너지고, 누이가 능욕당하고, 재산이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친구가 고문당하고, 씨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 현기영, <제주작가> 22호
지난 2월 중순 제주여행에서 우리 가족이 찾았던 제주시 조천읍 북천리의 ‘너븐숭이 4·3 기념관’ 전시물에서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너븐숭이는 작가의 중편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다. 4·3의 학살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30년 동안 고통스러운 내상을 안고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이 삼촌’ 말이다.
작가 현기영이 ‘순이 삼촌’으로 불러낸 역사, 4·3
작가는 참담한 역사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고 마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하여 금기의 역사였던 제주 4·3을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냈다. 그는 중편 ‘순이 삼촌’(1978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으로 어둠의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북촌리 대학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은 내가 빌린 렌트카의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던 택시 기사의 도움을 받아 기념관에 도착했을 때, 기념관은 오후의 적요 속에 잠겨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누가 귀띔해 주지 않아도 거기선 저절로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전시관 입구에 걸린 강요배 화백의 그림 ‘젖먹이’는 숨진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그렸다. ‘젖먹이 하나 어미의 피젖 빨며 자지러지게 울고…….’ 더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게 61년 전, 이 시골 마을에 닥친 피바람의 역사다.
북촌리는 4·3의 전개 과정에서 많은 청년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낸 곳이다. 1948년 12월 16일, 민보단(民保團)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주민 24명이 느닷없이 군인들에게 끌려가 집단 총살당한 것이 희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9년 1월 17일,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날 이 끔찍한 대학살로 희생된 이는 아이들까지 포함해 400명이 넘었다. 북촌리가 명절 때처럼 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동네가 된 연유다.
“동생들을 찾기 위해 막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 소낭 밭에서 찾았어요. 제일 밑에 동생(당시 5세)은 총 안 맞고, 추워서 죽었어요. 둘째 누이동생(10세)은 가시덤불 위에 넘어져 있었고, 또, 제 밑에 동생(8세)은 이마에 총을 맞았어요. 각기 손에 고무신을 다 쥐고, 그렇게 죽어 있었어요. 그래서, 너븐숭이에 지금 무덤이 있어요.”
- 김석보(북촌리 주민)(전시물 내용 중에서)
기념관 오른쪽 언덕배기에는 당시의 애기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북촌리 주민이 증언한 그 무덤이다. 희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기념관의 희생자 신위에도 ‘○○○자’로 표기된, 이름 잃은 아이들이다.
희생자들이 집단으로 총살당한 곳은 주로 마을 주변의 밭이었다. 학살이 끝나고 사람들은 거기 쌓인 시체를 치우고 이듬해부터 농사를 지었다. ‘송장 거름’을 먹고 자라난 농작물은 무럭무럭 자랐지만 아무도 그것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던가.
순이 삼촌도 자신의 오누이를 묻은 근처 밭에다 고구마를 갈았다. 거기도 학살의 현장이었다. 호미 끝에 ‘흰 뼈’와 ‘녹슨 납 탄환’이 부딪치는 곳이었다. 그이는 대낮에도 콩 볶는 듯한 총성의 환청을 들어야 했고, 끝내 그 옴팡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가는 그것을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순이 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순이 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 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더운 여름날 당신은 그 고구마밭에 아기 구덕을 지고 가 김을 매었다. 옴팡진 밭이라 바람이 넘나들지 않았다. 고구마 잎줄기는 후줄근하게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대낮, 사위는 언제나 조용했다. 두 오누이가 묻힌 봉분의 뗏장이 더위 먹어 독한 풀냄새를 내뿜었다. 돌담 그늘에는 구덕에 아기가 자고 있었다. 당신은 아기 구덕에 까마귀가 날아들까 봐 힐끗힐끗 눈을 주면서 김을 매었다. 이랑을 타고 아기 구덕에서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이랑을 타고 돌아오곤 했다.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가 튕겨나오고 녹슨 납 탄환이 부딪쳤다.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총소리의 환청(幻聽)은 자주 일어났다. 눈에 띄는 대로 주워냈건만 잔뼈와 납 탄환은 삼십 년 동안 끊임없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을 밭담 밖의 자갈 더미 속에다 묻었다.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忍苦)의 삼십 년, 삼십 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렇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 현기영 ‘순이삼촌’ 중에서
언제쯤 4·3은 바다 건너 뭍에서도 향불을 올릴까
그 30년을 소설로 형상화한 ‘죄’로 작가는 정보기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했다고 했다. 그러고도 제주가, 4·3의 한과 슬픔이 보상받은 것은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 공포된 게 2000년이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공식사과한 건 2006년 4월인 것이다.
2008년 새 정부 출범 이후에 상황은 별로 좋지 않다. 극우 세력들의 발호나 4·3에 대한 악의적 폄훼는 두고라도 공식적인 정부의 시각도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어제 열린 4·3 위령제에 참석하겠다던 정운찬 국무총리가 급작스레 일정을 바꿔 고 한주호 준위 영결식에 참석한 데 대해 제주도민들은 격분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보기]
2008년에는 총리가, 지난해에는 행정안전부 장관, 올해는 총리실장 등 위령제에 참석하는 정부 대표인사가 ‘장관급’으로 낮춰진 데 대해 ‘4·3홀대’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특히 현 정부 출범 후 일부 보수 세력들이 4·3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과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와중이니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간 ‘잃어버린 10년’ 지우기에 골몰했으니, 지난 10년간 그나마 ‘회복된 역사’에도 비슷한 잣대를 들이대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광주가 아직도 영남 땅을 넘지 못한 것처럼 제주도 여전히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 4·3은 언제쯤 바다 건너 뭍에서도 위령의 향불을 피워 올릴 수 있을 것인가.
2010. 4. 4. 낮달
* 덧붙임 : 나는 제주를 다녀와서 올해도 제주도로 떠나는 2학년 수학여행단에게 너븐숭이기념관을 다녀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대형버스가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거기 가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아이들은 4·3평화공원에 들러서 4·3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2학기에 ‘순이 삼촌’을 배우면서 아이들이 4·3을 화석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로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9년 전에 가족들과 함께 한 제주여행에서 들른 너븐숭이 이야기다. 제주도는 이제 뭍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국민관광지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유명 관광지만 아니라, 4.3평화공원과 같은 제주의 속살을 체험할 수도 있게 되었다.
9년 전에는 대형버스가 주차할 공간이 없었는데, 지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내와 그때의 사진을 들여다보다 문득 새로 한번 제주여행을 갈까, 했더니 아내는 언제든 좋단다. 정말 따뜻한 봄날이거나 선선한 가을날에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4.3의 아픈 역사를 더듬는 제주여행을 한번 고민해 볼까 한다.
201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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