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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와 결말 알면서도 관객들의 ‘분노’가 추동하는 영화

by 낮달2018 202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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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 하이브미디어코프(이하 같음)

지난 금요일, 아내와 함께 시내의 복합상영관에서 <서울의 봄>을 관람했다. 물론 영화 제작사에서 보내준 온라인 예매권으로. 오전 10시 10분에 시작하는 조조 상영분이었지만, 객석의 한 1/4쯤은 찼다. 얼핏 보아도 대부분 젊은이였다. 아마, 그들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세대일 것이었다. [관련 글 : 한 고교생의 기억에 박힌 총격전,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

 

지난달 22일 개봉했으니, 열흘째인데도 <서울의 봄>은 여전히 폭풍 진격 중이다. 소재나 배경에 대해서도 알려질 만큼 알려진 작품인데도 워낙 화제를 몰고 온 영화인지라 객석은 연일 차서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누적 관객 수는 400만을 가볍게 넘었다 한다.

 

‘기억’이나 ‘배경지식’ 확인·교정하게 하는 영화

▲ 전두광의 집에서 이루어진 반란군 측의 장교들 모임. 이들은 모두 군내 사조직 하나회 출신으로 국가가 아니라 조직에 충성했다.

12.12 쿠데타를 ‘역사가 아니라, 현실 ‘사건으로 겪은 시민들은 물론, 그걸 교과서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 젊은이들, 이른바 ‘MZ세대’도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의 기억이나 배경지식 따위를 확인하거나 교정한다. 열흘 가까이 내 블로그의 최규하 관련 글을 찾는 누리꾼들, 유튜브에 각종 관련 영상을 올리고 이를 찾아보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서울의 봄>은 관객들에게 역사를 새롭게 환기하고,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을 조감하게 하는 영화다. 다큐멘터리가 아닌데도 12.12 군사 반란이 자행된 9시간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 프레임 속의 진압군과 반란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역사 교육’이다.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기억과 배경지식의 오류를 검증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12.12 쿠데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정작 자신이 아는 게 ‘쿠데타’라는 것뿐, 사건의 세부 내용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서울의 봄>이 ‘보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이유도 관객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12.12 군사반란을 규정하면서 영화를  관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재현되는 현대사를 따라가며 관객들은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그날의 기억을 새삼 ‘추체험하는 것이다.

 

쿠데타, 일과성 사건 아닌 관련 인사의 ‘삶 규정’과 ‘민주주의 퇴행’의 근원

 

그런 한편, 관객들은 자신이 무심히 흘려보낸 12.12 쿠데타가 ‘일과성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리고 쿠데타가 반란군은 물론 진압군의 ‘삶을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땅 ‘민주주의의 퇴행을 초래한 근원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과 그의 참모들이 진압 계획을 짜고 있다. 이태신 왼쪽이 야전포병대장, 오른쪽이 작전참모다.
▲ 반란 수괴 전두광과 수하들. 그는 배짱으로 쿠데타를 자행했는데, 이를 두고 '역시 전두환은 인물이야!'라고 찬미할 이들도 있을 터이다.

역사적 사건과 거리를 두게 하는 44년이라는 시간도, 재현되는 비열한 술수와 더러운 폭력 앞에서 치미는 분노를 다스리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이는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영화가 ‘선악의 구도로 펼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더 볼 것 없이 ‘좋은 우리 편’과 ‘나쁜 놈 편’으로 간단히 나눌 수밖에 없게 될 때 우리의 윤리적 감각은 즉물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울의 봄>이 어떤 영화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극장을 찾는다. 당연히 결말이 어떻다는 것도 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사실(팩트 fact)을 건너뛸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영화는 굳이 ‘스포일러’가 따로 있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열흘이 지났는데도 관객들은 꾸준히 객석을 채운다. 

 

쿠데타 성공 ‘도우미’가 된 국방부 장관과 합참차장

 

정교하게 기획된 쿠데타라고 할 수 없는 12.12 군사반란은 결정적 반전의 계기를 여러 차례 드러낸다. 그런데도 군 핵심 지휘부는 ‘반전의 기회를  무기력하게 잃고 반란군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군 지휘부의 우유부단과 무능, 그리고 오판이라는 데서부터 관객들의 분노가 치솟기 시작한다. 

 

대통령 다음의 군 통수권을 지닌 국방부 장관은 참모총장 공관에서 들린 총성에 화들짝 놀라 가족들을 데리고 도주하여 한미연합사 등을 전전하다가 국방부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다. 그는 무책임과 무능을 넘어 결과적으로 쿠데타에 미필적 고의로 협력한 일등 공신이 된다.

▲ 진압군의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육군본부 벙커. 그러나 육군 참모차장은 신사협정을 부르댈 만큼 무능하고 우유부단했다.

반란군에게 강제 연행된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을 대신해야 할 참모차장은 어떤가. 어이없게 쿠데타 군과 ‘신사협정’을 맺고, 진압 부대를 회군시키다가 결국은 뒤통수를 맞는다. 자신의 판단을 미루며 면피하기 바쁜 그는 반란을 진압하려 하기보다는 상황 변수에 기대어 쿠데타를 추인하려고 애쓰는 거로 보일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나 지휘관의 자질과 능력이 위기 극복의 열쇠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군사 반란에 대응하는 국방부 장관과 육군 참모차장의 무능과 무책임한 행태를 지켜보는데, 현 정부의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이 그들과 겹쳐진다.  막말과 이완용 두둔 등으로 질타받다가 임명된 국방부 장관과 자질 미달로 낙마할 뻔한 합참의장은 안보보다는 ‘주식 투자’에 진심이었던 이들이다. 영화 속의 빌런들과 그들을  겹쳐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불길했다. 

 

진압군과 반란군 - 엇갈린 선택과 삶, 그 데자뷔

 

쿠데타의 주역들이 승진 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할 동안 반란을 막으려 했던 진압군 측 인사들은 불명예제대, 강제 예편 등으로 군에서 쫓겨났다. 대부분 상상 이상의 불행과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겪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아들, 김오랑 소령의 부인 등도 모두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군사 반란을 두고 엇갈린 이 군인들의 뒷이야기는 아픈 기시감(데자뷔)으로 다가온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에 부역하면서 영화를 누린 친일 부역자들과 조국 광복을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치 않았던 독립 투사들의 후예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삶은 상기하는 것조차 외람될 뿐이다. 역사가 무엇을 교훈으로 남길 것인가는 한국 근현대사가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다.

 

영화에서 재연된 군사 반란이 당시 내가 주워들은 이야기와 뒷날 확인된 보도 등으로 얽은 내 상상 속의 12.12 쿠데타보다 훨씬 생생하고 실감 났던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9시간으로 집중 조명한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기존의 인식에 비어 있었던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1979년 12월 14일 마지막 정기휴가를 마치고 귀대했을 때, 나는 부대가 이틀 전 진압군으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부천 근처에서 회군했는데, 이유는 긴급 전문을 받았다는 게 다였다. 회군이 아군 간 유혈 충돌을 우려한 참모차장이 이른바 신사협정을 믿고 내린 지시와 반란군 측의 회유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내 상상을 멈춰 버렸다. 이미 쿠데타는 성공하여 전두환 군부 독재의 공포 정치가 진행되고 있었고, 돌아간 학교에서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1980년 5월까지 고조되던 학내 시위는 휴교령과 함께 탱크를 앞세우고 해병대 병력이 진주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리고 내가 졸업하던 1984년까지 대구 시내에 시위는 한 차례도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근무한 9공수여단, 여단장의 선택

 

영화에서 수경사령관의 설득에 8공수여단장은 반란군에 맞서고자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전두광은 반란군 측 2공수여단과 육군본부 측 8공수여단을 동시에 회군시키는 신사협정을 제안하고 이를 믿은 육군 참모차장의 명령에 따라 8공수여단은 복귀한다. 제압의 대상일 뿐 협상할 상대가 아닌 반란군과의 신사협정은 바보짓이라는걸 깨달았을 때 승부의 추는 반란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 제8공수여단장. 내가 근무한 제9공수여단장(윤흥기 준장)이 모델이다. 그가 회군하지 않고 진압에 나섰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993년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에서 윤흥기 당시 9공수여단장은 특전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1개 대대만 끌고 먼저 출동했다고 증언한다. 부대를 되돌린 것은 영화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 윤 여단장이 인솔한 병력이 내 소속 대대였는가 했더니 확인해 보니 이웃 대대였다. 윤흥기 준장은 9공수의 초대 여단장 노태우가 소장으로 진급하여 청와대 경호실로 이동한 다음 부임한 갑종 간부후보생 출신의 우리 여단장이었다.


반란 직후 윤흥기 장군은 한직을 돌다 1983년 1월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을 끝으로 예편했다. 전역 뒤에는 그는 자신의 회군으로 말미암아 반란군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쿠데타 당시 육군본부의 정식지휘체계에 속했던 장군 22명을 규합해 1993년 7월 19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쿠데타를 주도한 34명을 ‘반란 및 항명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덧없는 역사의 심판, 아직 서울의 봄은 ‘미완’이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은 덧없다. 마지막 대법원판결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사 반란 수괴로 확정되었으나, 이들이 복역한 기간은 2년에 그쳤다. 영화를 누린 세월은 길었고, 심판의 굴욕은 짧았다. 2021년에 10월과 11월에 노태우, 전두환은 각각 사망했다. 끝내 사과하지 않고 죽은 전두환은 지난 2년간 묻히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파주에 안장하려던 계획이  해당 지자체와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 12월 14일 군 인사를 한 다음에 찍은 신군부의 기념사진. 영화 마지막에서 배우들이 찍은 같은 구도의 사진은 이 사진으로 바뀐다.
▲ 5공 광주 청문회(1988~1989)에 증인으로 소환된 신군부 인사들. 왼쪽부터 정호용, 이희성, 박준병, 장세동, 권승만

영화는 사실에다 픽션을 버무렸다. 전두광과 이태신의 경복궁 앞 마지막 대결 장면이 대표적인 픽션 부분인데, 그 마지막 출정에 앞서 수경사 작전참모에게 건넨 이태신의 말은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자정한 매천 황현이 남긴 말과 겹치면서 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관련 글 : 포의(布衣)의 선비 황현,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자정하다]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 매천 황현

▲ 진압군의 장교들. 이들은 반란군과 달리 같이 모여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기억해야 할 진짜 군인들이다.

마지막 장면은 전두광과 하나회 일당이 단체 사진을 찍는 신이다. 처음엔 출연 배우들이 찍은 사진이 나오지만, 플래시가 한 번 더 터지고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바뀌면서 전두환을 비롯한 실제 하나회 단체 사진으로 겹치면서 바뀐다. 그것은 비록 픽션을 더했지만, 역사적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묵직한 은유다.

 

영화의 마무리 장면에서는 군가 한 곡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군가가 왜 이리 슬픈가 싶었는데 확인해 보니 1981년에 만들어진 ‘전선을 간다’라는 제목의  군가라고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반란군에게 투항해야 하는 진압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마치 만가(輓歌) 같은 노랫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허정허정 극장을 나섰다.

 

**사족 : 미친 것처럼 전두광에 빙의한 황정민 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전두환은 인물이야!”라고 감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3성 장군 출신의 현직 국방부 장관도 12·12 군사반란을 두고 “나라 구하려고 나온 것”이라고 했으니 더 말할 게 없다. 44년이 흘렀지만, 우리가 즐기는 ‘서울의 봄’은 여전히 ‘미완의 봄’인 것이다. [관련 글 : 똥별에게 보낸다]

 

 

2023. 12.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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