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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별은 혼자서 빛나지 않는다

by 낮달2018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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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2006)

▲ 영화 포스터

얼마만인가. 그야말로 ‘삼대 구년만’에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인근의 복합상영관에는 5편의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딸아이는 최동훈 감독의 <타짜>를, 나는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를 선택했다. 딸애가 순순히 응한 것은 그게 순서의 문제였던 까닭이다. 어떤 순서든 간에 두 편의 영화는 우리의 감상목록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웰컴투 동막골>이후, 오랜만의 영화 구경이었다.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나는 <왕의 남자>는 물론 <괴물>도 놓쳐 버렸다. 예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작정한 영화는 반드시 보았고, 부득이 놓쳤을 때엔 비디오 출시를 기다려서 원수를 갚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영화 한 편 보자고 애면글면하는 맘이 당최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지, 뭐.”가 그예 때를 놓치면 “까짓것, 못 보면 그뿐이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왕의 남자>는 뒤에 DVD로 보았는데, 원작이 탄탄한 희곡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주 훌륭한 영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나는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감독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여자가 아니면서도 여자만큼 곱고 아리따운 공길(이준기 분)의 존재는 연산과 장생의 대립에 물을 타는 대신 영화의 상업적인 성공을 끌어내지 않았나 싶다.

 

언론의 호의적 평가와는 별개로 나는 이준익 감독이 절제할 줄 아는 감독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로 그걸 거듭 확인하게 된 느낌이다. 한물간 록 스타와 그의 ‘마인드 없는’ 70년대 형 구닥다리 매니저와의 우정과 삶을 다룬 이 영화는 내게 일종의 버디 무비로 이해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영화는 이미 잊힌 존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스타라고 믿는 ‘왕년’의 록 스타 최곤(박중훈 분)과 그의 재기를 꿈꾸면서도 비정한 현실은 현실대로 긍정하는 오지랖 넓은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 사이에서 펼쳐지는 ‘현재의 삶 받아들이기’의 과정이다. 대마초와 폭행 등의 사고를 저질러 대는 퇴물 가수와 그 뒷수습으로 날밤을 새워야 하는 헌신적 매니저가 곡절 끝에 선택한 삶은 한 시골 방송지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이다. 좌충우돌의 방송을 통해 둘은 그들의 관계가 한갓진 계약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자기 모습을 확인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끌고 가고 있는 등장인물 대부분은 고단한 삶의 주류에서 조금씩 비켜난 이들이다. 두 사람의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방송사고로 좌천되어 온 PD나 지국장과 기사, 차 배달 왔다가 최곤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게스트가 되어 떠나온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큰아기 김양이나, 내기 화투를 치다가 방송에 전화를 거는 시골 할머니들, 단골 술집의 집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 등은 이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영화의 배경이 강원도 오지인 영월이라는 점도 이 영화의 시선과 맞물려 사람의 훈훈한 온기를 더해 준다. 시원하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가끔 카메라는 낡고 오래된 이 시골 도시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그때 잡힌 사람들의 무심하면서도 소박한 표정과 몸짓들은 이 영화가 그들의 따뜻한 삶에 대한 영화라는 걸 거듭 확인하게 한다.

 

영화는 삶과 사람에 대한 무언가 그럴듯한 담론이 아니라, 삶의 갈피마다 새록새록 숨어 있는 미시적 일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그 삶을 가득 채우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훈기라는 것을 넌지시 일러 준다. 그리고 그 훈기는 이제는 한물간 미디어, 라디오 전파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청록다방에 외상을 달고 차를 마시는 세탁소와 철물점 사내나, 은행 여직원에 대한 짝사랑으로 가슴을 앓고 있는 꽃집 청년, 김밥집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최곤의 팬클럽 회장 출신의 박민수의 아내, 변화한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상실한 것을 깨닫고 최곤을 떠나는 박민수, 담배 사는 일까지 의존하며, 온갖 불평과 불만을 말없이 들어준 매니저가 떠나자 비로소 그의 빈자리를 깨닫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동질감이다.

 

여러 삶들이 가진 갖가지 결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것은 ‘관계의 진실’이며, 그것을 확인하면서 관객들은 따뜻하게 데워진 마음으로 입가에 떠오른 엷은 미소를 애써 감추면서 객석을 떠난다. 엔드 크레디트와 함께 객석에 들어온 불빛으로 다시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고단한 삶을 환기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2006. 10. 19. 낮달

 

 

“별은 혼자서 빛나지 않는다.”는 박민수의 대사다. 최곤의 명성에 대한 자신의 이바지를 말한 것이지만, 국민 배우 안성기가 담당한 이 배역은 그러나 다른 숱한 조역의 연기 속에서 빛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진실이다.

 

관객 백만 돌파를 기념해서 제작사는 ‘천만 같은 백만’이라며 자축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개봉 3주 차를 맞은 현재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 2위로 뛰어올랐다. 1위 <타짜>의 관객 500만에 비하면 쓸쓸한 성적표지만 입소문을 타고 이 ‘따뜻한 영화’가 가능하면 오래 갔으면 좋겠다.

 

다음 날, 아내와 함께 타짜를 보았다. 역시 탄탄한 시나리오(허영만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최동훈 감독의 솜씨를 보여준 영화였다. 배우 백윤식과 김윤석의 연기가 빛났고, 농염한 김혜수의 몸매가 돋보였다. 그러나 아내의 말마따나 튀는 피와 칼질 등은 ‘너무 끔찍했다.’

 

제목에 ‘가문’ 항렬자를 쓰는 조폭 영화는 여전히 인기(300만)이고 곧 개봉될 같은 조폭 영화의 예매율이 1위라는 보도는 참 씁쓸하다. 괴물이 세운 관객동원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런 뉴스의 함의는 한국 영화의 저변들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의 방증일지도 모른다.

 


문서 파일을 뒤지다가 발견한 ‘묵은 글’이다. 블로그가 일종의 창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뒤늦게 올리는 글이어서 댓글을 닫았다.

 

바람 불고 기온이 뚝 떨어진 주말이다. 봄은 이 동네에선 이렇듯 널뛰기를 한다. 오후에 얻어놓은 텃밭에 나갈까 하고 있다.

 

2008.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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