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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한 고교생의 기억에 박힌 총격전,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

by 낮달2018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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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전의 기억으로 이어진 인연, 영화 <서울의 봄>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고3 때 12.12 쿠데타 총성을 마음에 아로새긴 김성수 감독은 44년 뒤에 영화 〈서울의 봄〉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현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를 몰아오면서 바야흐로 폭풍 진격 중이다. <서울의 봄>은 개봉 4일 만에 100만, 6일 만에 200만, 열흘 만에 300만 동원했고, 14일 만에 마침내 5백만을 넘겼다.  
 
영화 <서울의 봄>의 폭풍 진격
 

<서울의 봄>  관련 보도를 따라오면서 나는 이 영화를 여느 영화처럼 무심히 지나치지 못했다. 영화의 배경인  ‘12·12 군사반란’은 40년도 전, ‘제대 말년’을 누리고 있던 내가 간접적으로 겪은 사건이었고, 그걸 소재로 한 글 몇 편을 블로그에  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2.12. 군사반란은  무명의 병사였던 내가 처음으로 지나온 우리 현대사의 대사건이었고,  그것이 우리 시대를 관통하면서 드리운 상처와 흉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연출한 쿠데타는 종료된 것으로 여겨지던 박정희의 18년 독재를, 사람만 바뀐 군부독재로 되살린, 반복된 역사의퇴행이었다. 
 

▲ 모바일에서 갈무리한 블로그 인기글. 최규하 이야기는 압도적이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신군부가 장악한 정권은 이른바 명목상 국가 원수 최규하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전두환이 꿰어찼고, 이는 노태우에게 세습되었다. 군부 독재로 질식될 듯한 역사가 간신히 제 물길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13년 뒤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2년 전인 2021년 10월,  내가 서울에서 온 영화사 관계자들을 만나 42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 것도 내가 두서 없이 쓴 그날에 관한 몇 편의 글 덕분이었다. <서울의 봄>의 흥행은 그 몇 편의 글 가운데,  최규하에 관한 글의 조회수를 불과 며칠 만에 2천여 회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나는 <서울의 봄>과 2년 전의 만남이 이어져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관련 글 : 최규하 대통령, 8개월 10일만에 허수아비 옷을 벗다]

 
<서울의 봄>이 소환한 44년 전의 기억들
 
1977년 5월에 입대한 나는 신병 훈련 뒤 운수 사납게 공수병으로 차출되었는데, 그건 내 선택과는 무관한, 내가 170cm 이상의 키와 안경을 쓰지 않은, 징병검사에서 갑종 등급을 받은 신체 건강한 병사였기 때문이었다. [관련 글 : 군대란 무엇인가, 전역병의 통과의례’- ‘재소집의 악몽]

 

입대할 때까지 공수부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시골뜨기는 특전사 교육대에서 공수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이수하고 인천 부평에 있던 제9공수특전여단 예하의 대대에 전입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때 나는 29개월째 대대 본부 행정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소속 대대는 천리행군을 떠났고 행정병으로 전역 대기병과 함께 잔류하던 나는 부대의 나머지 3개 대대가 서울로 비상 출동한 다음 전역 대기병과 함께 여단의 8개 초소를 지키느라 밤새도록 말뚝 보초를 써야 했다. [관련 글 : 1979년 오늘-중앙정보부장은 절대권력의 심장을 쏘았다]

▲ 내가 44년 전에 근무했던 제9공수특전여단(귀성부대)의 부대마크와 내 인식표.
▲ 나는 신병훈련을 마친 뒤 특전사로 차출되어 9공수특전여단에서 근무했다. 사진은 공수병의 강하(점프) 장면이다.

10·26 이후 휴가는 물론 외출·외박까지 멈춘 1달 뒤 나는 가까스로 마지막 정기휴가를 떠났다. 열흘간의 휴가를 마치고 귀대한 12월 14일, 나는 이틀 전(12.12.) 밤에 우리 부대가 서울로 출동하다가 부천 근처에서 회군했다는 걸 알았다. 그게 뒤에 사람들이 ‘사태’라 부르다가 ‘군사 반란’으로 최종 규정된 12·12쿠데타라는 역사와 내 개인사가 만나는 지점이다. [관련 글 : 전두환의 신군부, ‘군사 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하다]
 
정작 현역 사병으로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는 박정희 사후에 신군부를 중심으로 진행된 권력 찬탈을 눈이 보이지 않는 이의 ‘코끼리 만지기’ 정도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10·26의 전모는 합수부의 발표나 방송 따위로 간신히 꿰어맞추고 있었지만, 사병들이 쿠데타와 관련된 고급 정보에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거니와 그것을 권력의 찬탈로 풀 수 있을 만큼 내 상상력은 자유롭지 못했던 까닭이다. [관련 글 : 12·12 쿠데타, 그리고 30]
 
‘국민을 소외’시킨 1980년 전후 역사
 
이듬해 2월에 나는 33개월 복무를 마치고 만기 전역했고 3월에 대학에 돌아갔는데 두 달 후에 광주항쟁이 있었다. 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한 해병대 병력이 학교를 닫아 버렸다. 그리고 신군부의 공포정치가 수년간 이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5공 청문회 등을 통하여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모습이 조금씩 밝혀졌다. 그런 비사를 통해 나는 오랫동안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1980년 전후사에서 국민은 역사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역사가 소수의 권력에 의해 농단 되고 비화의 형식으로 후대에 공개되는 사회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 이후였다.

▲ 진압군으로 나오는 수경사령관 이태신(정우성 분). 모델은 실제 인물 장태완 장군인데 그는 내 고향인 칠곡 출신이다.
▲ 전두광과 함께 쿠데타의 주역인 9사단장 노태건. 모델인 노태우는 1979년 상반기까지 내가 근무한 9공수여단장이었다.

2021년 10월 금오산의 한 카페에서 이어진 대화에서 영화사 측에서 캐물은 것은 내 글에서 언급된 10·26과 12·12에 관한 세부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내가 줄 수 있었던 것은 글에 쓴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역사의 현장 가까이 있었지만, 내겐 그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볼 만한 식견도, 정치의식도 없었던 까닭이다. 
 
‘역사’가 ‘영화’로 이어진 우연한 접점
 
그러나 영화사 측에서도 그걸 여과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작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고, 시나리오도 완성되었는데, 그 역사의 갈피에 숨겨져 있는 얘기가 있다면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차피 간접적일 수밖에 없는 내 얘기를 에멜무지로 주워섬기면서 그게 무슨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영화 <서울의 봄> 개봉 소식을 듣고서도 나는 이 영화가 내가 2년 전에 만난 친구들의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며칠 전 동료들과 2년 전의 카페 근처에 갔다가 문득 <서울의 봄>이 그들의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때 만난 젊은이에게 ‘긴지 아닌지’를 묻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 내가 받은 제작실장 분의 문자. 번호와 이름은 개인정보라 가렸다.

이틀 후 정오께 걸려 온 낯선 번호의 전화를 나는 받지 않았는데, 뒤이어 날아온 문자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서울의 봄> 제작실장이라는 여자분이었다. 나는 약간 흥분해서 반갑다고, 축하한다고, “이 역사적인 영화와 잠깐이라도 연을 맺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쁘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어설프게 떠올린 과거의 기억이 영화에 무슨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시기 그 역사적 사건의 자장 안에 있기는 했지만, 그 역사와 직접 접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독은 고3 때 서울 한남동 집 근처에서 정승화 총장 공관에서 나던 총격전 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얘기를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나는 그 얘기를 2년 전에 미리 들었었다.
 
“평생 잊을 수 없었던 그때의 충격과 의문을 가지고 영화 연출에 나서게 됐다”라는 기사를 읽고 나는 그때 그 감독이 바로 김성수 감독임을 확인했다. 고교 시절의 아련한 기억 한 토막에 기대어 영화를 만든 김 감독과 마찬가지로 무명의 병사는 그렇게 예기치 않은 장면에서 역사와 만났던 것이다.
 
군 복무 중에 우연히 10·26과 12·12 근처에 있었던 내가 짧은 글 몇 편으로 그것을 환기하는 데 그쳤다면 감독은 자신의 영화로써 그 시절의 역사를 재현하고, 관객들을 분노와 무력감에 빠뜨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영화의 힘이고, 무기일 터였다. 나는 역사가 영화로 이어진 우연한 접점을 혼자서 여러 번 되씹으며 즐기고 있다.
 
지난 29일, 나는 <서울의 봄>으로부터 메가박스 예매권 4장의 인증 번호를 받았다. 나는 고맙다, 기쁘게 관람하겠다고 답하고 리뷰도 하나 쓰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오마이뉴스>는 졸업한지라 리뷰는 내 블로그에 쓰는 게 고작이긴 하지만 말이다.
 
피와 오욕의 역사를 가르치는 영화, 혹은 영화의 치명적 힘

▲ 신군부가 연출한 쿠데타는 종료된 것으로 여겨지던 박정희의 18년 독재를 사람만 바뀐 군부독재로 되살려낸 반복된 역사의퇴행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을 이미 관람한 많은 관객과 마찬가지로 나는 1979년에 벌어진 대통령의 유고와 신군부가 자행한 군사 반란의 줄거리는 알 만큼 안다. 그러나 영화가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역사를 환기하고, 뒷사람들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강렬하고 치명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 스트레스”, “영화 보다 화병 날 뻔”,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나왔다.” 등의 한 줄 평으로 영화를 반추하는 관객들의 이야기를 내가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특히 12.12 이후에 태어난 2, 30대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기도 한다. [관련 기사 : 서울의 봄’ 6일 만에 200만 돌파분통의 심박수후기 줄이어]
 
잘 만들어진 한 편의 극영화가 ‘MZ세대’에게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난 피와 오욕의 역사를 가르친다. 아니, 그보다는 젊은이들이 영화로  묻힌 역사를 배우고 깨우친다고 하는 게 옳겠다.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이 입소문으로 이어지면서 적잖은 소구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힘뿐 아니라, 고단한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성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23. 12. 2. 낮달
 

 
덧붙임 : 나는 어제(12.1.) 아내와 함께 시내 메가박스에서 영화 <서울의 봄>을 관람했다. 40년도 전의 일인데, 나는 담담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란군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살상을 바라보면서 격동하는 마음을 다스리기는 쉽지 않았다. 이는 아내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대로 리뷰로 다시 찾아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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