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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반짝반짝 빛나는>, ‘피의 비밀’과 ‘인생 역전’

by 낮달2018 2022.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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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

▲ 드라마 <반빛>은 인생 역전과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반빛>포스터 ⓒ MBC

‘피의 비밀’을 다룬 이야기의 ‘원조’라면 단연 ‘오이디푸스 신화’다. 스스로 부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은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근친결혼’과 ‘운명’에 대한 가장 비극적인 서사다.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의 신탁(神託)’이 실현되었음을 안 오이디푸스는 자기 눈을 찔러 소경이 되어 고행과 유랑의 삶을 선택한다. 그것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능멸한 인간 오이디푸스의 참회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다. 어차피 비극적 결말을 예비하고 있었던 이야기라는 말이다.

 

안방극장의 ‘신화’, ‘피의 비밀’

 

우리 안방극장에서 맹위를 떨치는 ‘피의 비밀’은 어떨까. 글쎄, 드라마를 줄줄이 꿰고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단정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드라마의 그것도 ‘오이디푸스’식의 서사에 기대고 있는 듯 보인다. 사랑했더니 알고 보니 ‘남매’ 사이였다거나 한 남자(여자)를 두고 다투는 연적들이 자매(형제)간이었다는 방식 말이다. 요즘은 부모의 재혼으로 남매나 인척이 되는 ‘변종’도 나왔다.

 

우리 드라마에서 이 같은 ‘피의 비밀’이 선호되는 것은 그것이 가진 극적 성격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손쉽고 자극적인 ‘갈등’을 빚으려는 작가의 안이한 태도 탓이다. ‘피의 비밀’에다 ‘삼각관계’까지 버무려 놓으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극적 전개가 가능해진다고 믿는 작가 뒤에는 ‘욕하면서 보는’ 시청자가 만만한 언덕이 되어준다.

 

‘피의 비밀’은 때에 따라서는 ‘인생 역전’의 계기로도 기능한다. 피의 비밀이 어렵사리 밝혀지면서 주인공은 어느 날 미운 오리 새끼에서 신데렐라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또 순전히 ‘억지’로 엮고 꾸려온 갈등 해소의 열쇠가 되면서 드라마의 대단원을 예비하기도 한다.

 

TV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노출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극의 전개가 어이없는 우연에 기대어 마치 ‘만화처럼’(‘만화’를 깎아내릴 뜻은 없다. 여기서는 만화가 가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비약적 전개’라는 뜻만을 빌려왔다) 이루어지는 데 있다. 요즘 드라마는 개연성(蓋然性) 따위와는 무관하게 시청자를 붙들어 놓기 위해 온갖 ‘비약’과 ‘망발’을 서슴지 않는 듯 보인다.

 

‘20년 전에 헤어진 여동생을 서울역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는 일’은 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 그치지만 현실에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 문학에서는 이런 우연은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리얼리티란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어 담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극적 성격을 고려하면 거기서 본격소설과 같은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드라마에서 다소의 비약을 허용하는 것과 ‘막장드라마’에서 펼쳐지는 어이없는 ‘스토리텔링’이 용인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욕하면서 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는 걸 아는 한 그 ‘막장’의 책임은 전적으로 작가가 져야 한다는 뜻이다.

 

서두가 좀 길었다. 요즘 내가 열심히 보고 있는 현대극 <반짝반짝 빛나는>(이하 <반빛>)과 사극 <짝패>(이상 MBC)도 그 전개 양상은 다르지만 ‘피의 비밀’에 일정하게 기대고 있는 드라마다. 그러면서도 이 드라마들은 이 ‘극적 자산(?)’에 매우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상식을 뛰어넘는 작가의 롤러코스터식 서사에 넌더리를 내는 시청자들에게 이는 ‘작가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뒤바뀐 운명으로 인생 역전을 겪는 두 주인공 . ⓒ MBC
▲ 디시인사이드의 < 반짝반짝 빛나는 > 갤러리

공교롭게도 시대를 달리하는 이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태어나며 서로 뒤바뀐다. 현대극에서는 우연히, 사극에서는 한 어머니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러나 두 드라마에서는 일부 차이가 있긴 하지만 ‘피의 비밀’이 극을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반빛>에서는 모두가 이 사실을 알지만 <짝패>에선 당사자 한 명이 아직 사실을 모른다는 걸 빼면, 두 드라마 모두 초반에서 이미 피의 비밀이 밝혀지고서 극이 전개되는 것이다.

 

뒤바뀐 운명, 그 ‘수용과정’의 리얼리티

 

<짝패>에서는 주인공들의 인생이, 그리고 신분이 뒤바뀌는 것에 대해서는 따로 기획 의도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엇갈린 신분과 운명은 노비의 자식을 포도청 포교로, 양반의 자식을 의적의 두령으로 뒤바꾸는 시대적 아이러니의 표상쯤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뒤바뀐 운명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적 한계를 보이는 <짝패>와는 달리 <반빛>에서는 이 뒤바뀐 삶이 바로잡히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겪어야 하는 갈등과 고통을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누구나 꿈꾸는 ‘인생 역전’이 두 주인공에게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희극’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비극’으로.

 

▲ MBC 누리집의 시청자 게시판도 뜨겁다

<반빛>은 극의 기획 의도에서 밝혔듯 ‘역전된 인생, 그 이후의 삶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뒤바뀜은 한 인간의 실존적 번민과 함께 삶의 현실적 전도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논쟁적이다. 시청자 게시판을 달구고 있는 주인공들에 대한 호오(好惡)는 이 역전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관점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극중 두 주인공의 가족적 배경은 상반된 계급 구성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수백억의 자산가인 출판사 사주의 딸인 한정원(김현주 분)과 신림동 고시촌 식당 집 차녀 황금란(이유리 분)의 거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양극화’의 극단은 아니지만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 대립의 실마리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어느 날 10년째 서점 점원으로 일하는 그녀에게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상류층의 삶을 바라보며 그 삶을 동경하던 그녀에게 자신이 원래 그 삶의 주인이었다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전도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기적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약속해 준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이 간단히 믿을 수 없는 뒤바뀐 현실 앞에서 그녀의 욕망은 초조하다. 그리고 그 초조는 이유 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녀는 이미 승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승자의 여유보다는 패자로 살아오며 깨우친 불안이 더 컸다.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은 자신이 채비해 맞이하지 않으면 자신을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그녀는 키워 준 부모를 버리고 낳아준 부모에게 서둘러 돌아간다. 그녀가 생부모에게 돌아가는 것은 모든 것을 되돌리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도덕적 멍에를 져야 한다. 28년이나 자신을 길러준 부모를 매정하게 버리고 부와 안락을 찾아 떠났다는 윤리적 비난 말이다. 언제나 행운과 기적에는 언제나 대가가 필요한 것이다.

▲ 뒤바뀐 운명의 두 당사자는 한 남자를 두고 다투는 사이가 된다 . ⓒ MBC

반대로 28년이나 자신이 자기 것으로 의심 없이 지켜온 유복한 삶이 정작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철없는 부잣집 딸에게 그것은 불행과 나락의 시작이었다. 굴지의 출판사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부잣집 외딸로 자란 자신이 노름꾼 아버지와 고시생 상대 밥집을 꾸려가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딸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인생 역전’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태도

 

그녀에게 닥친 이 진실은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가혹한 실존이다. 세상에서 제일 줄이기 어려운 것이 ‘차와 집’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그녀에게 당도한 이 역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그녀의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폭발력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능하면 그녀는 진실 앞에서 눈을 감고 싶다.

 

‘자기 삶을 지키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은 기른 딸을 잃고 싶지 않은 키운 부모의 애정에 기대어 어렵사리 살아남는다. 그러나 역시 시간은 약이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은 똑같이 깊고 아프지만, 그것은 ‘유산’과 ‘상속’ 따위의 현실적 문제 앞에서는 맥없이 스러지기 마련이다.

 

친딸과의 불안한 동거를 받아들였던 ‘기른 딸’은 양부의 애정과 출판사 상속까지 확인하지만, 친자들의 세속적 욕망 앞에 그것들의 지위란 덧없다는 걸 그녀는 깨닫고야 만다. 결국 그녀는 양부에게 ‘호적정리’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이 ‘자신한테, 자신의 욕심과 미련한테 자신이 누군지, 자신이 욕심내면 안 되는 게 무엇인지 선을 긋고 싶다’며.

 

역전 이후, 두 사람의 삶을 따르고 있지만, 애당초 작가의 선택을 받은 이는 인생 역전에서 ‘기적’을 만난 여인이 아니라, ‘현재’를 반납해야 하는 여인이다. 이런 구도는 앞서 지적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태도와 이어지면서 새로운 논쟁을 부르기에 알맞다. <반빛>의 시청자 게시판이 뜻밖에 뜨거운 이유다. 일부 열혈 마니아들은 디시인사이드에 ‘반빛갤러리’를 열기도 했다.

 

작가는 시쳇말로 매우 ‘쿨하게’ 두 여인이 가는 길을 주시한다. 시청자에게 ‘정말 저럴까’, ‘나 같으면 어땠을까’ 하는 자문을 던지게 할 만큼 두 사람의 태도는 사실적이다. 그러나, 자신의 뒤바뀐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천사’와 ‘악녀’는 따로 없다. 시청자들은 인물들의 감성적 태도 - 기른 부모를 떠날 수 없다는 금란이나, 주저 없이 가난한 생부모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정원 - 를 내심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부를 찾아서 매정하게 기른 부모를 떠나는 황금란이나 낳은 부모를 포함, 자신의 운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정원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시각이 엇갈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태도를 비난하거나 감싸는 시청자들의 태도에는 이 같은 삶의 단면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감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계급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누구를 지지하고 응원하든, 심정적이든 이성적이든 두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계급적 의미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단지 계급의 역전이 교차하는 상황이어서 계급의 문제가 희석되고 있긴 하지만.

▲ 이 드라마는 뒤바뀐 운명이 아니라 그 당사자 사이의 갈등이 중심이다 . ⓒ MBC

황금란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주목하고, 한정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장차 겪어야 할 삶을 주시한다. 누구를 지지하든, 그것은 ‘부당하다’는 온정주의에 기대고 있는 점에서 같다. 물론 작가의 의도에 따라 펼쳐지는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 그런 판단의 준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 외에도 작가가 버무려 놓은 삼각관계나, 사랑의 방해 요소들 따위가 극의 전개에 힘을 더한다. 한편으론 두 주인공이 감당해야 하는 변화의 무게나 크기가 극의 다른 요소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예컨대 여러 개 겹치는 삼각관계의 설정이라든가, 일상의 구성에서 보이는 희극적 요소의 과잉 등은 앞서 이루어낸 사실성의 성취를 까먹고 있지 않나 싶다.

 

송승준(김석훈 분)의 어머니가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진 ‘큰손’이라든가, 그이에게 부친에게 무시당한 정원의 오라비 한상원이 거액을 빌리려 하는 등의 설정은 익히 보아온 것이다. 익숙하고 통속적인 길로 가고 있는 드라마에 작가가 얼마만 한 개연성을 더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듯하다.

 

작가가 긍정하는 인물이 누구이든 간에 이 한갓진 주말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삶과 태도의 문제를 무심히 환기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현실적 삶과 무관한 허구의 세계일지라도 대다수 서민 시청자들에게는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1. 5.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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