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 후 30년
12월 12일 토요일이다. 이날은 무명의 개인이지만 역사의 어느 순간에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끼어 있었다는 이유로 기억되는 날이다. 어떤 과자를 나누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11·11이 의미 있듯이 12·12를 바라보는 내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오늘은 신군부가 감행한 12·12 쿠데타 30돌이라고 한다. 세상에! 그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던가.
12·12 쿠데타가 일어나던 날 나는 마지막 휴가 중이었다. 나는 12월 5일 정기 휴가를 출발하였고 14일 밤에 귀대하였다. 물론 귀대할 때까지 나는 예의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귀대해서야 우리 부대가 쿠데타 당일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 사건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10·26’이 ‘12·12’를 낳았다
12·12는 내게 늘 10·26과 한 쌍이 되어 떠오르는 사건이다. 당연히 12·12를 말하려면 그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1977년 5월에 입대해, 논산에서 신병 기본훈련을 받고 바로 특전사로 배치되었다. 용산에서 버스를 타고 특수전사령부로 이동할 때까지 나는 ‘공수특전부대’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나는 베레모를 쓴 공수병조차 보지 못한 촌놈이었다.
특전사 보충대에서 며칠간 머문 뒤 나는 당시 인천 부평에 있던 제9공수특전여단 52대대로 재배치되었다.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나는 특전사 교육대에서 공수 기본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이수함으로써 공수병이 되었다. 전투 중대의 화기병으로 근무하던 내가 대대 본부 인사과 행정서기병으로 보직을 바꾼 것은 이듬해 4월께다. 대학 재학 중이면서 글씨를 그나마 반듯하게 쓴다는 이유로 나는 행정병으로 선발된 것이다.
1979년은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종착역으로 달리고 있었던 해다. 그러나 세 해째 짬밥을 먹고 있던 나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무관하게 ‘고참병’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나는 각성되지 않은 얼뜨기 병사에 불과했다. 그때, 우리는 부마항쟁도 무슨 낯선 나라의 소식처럼 듣고 있었던 것 같다.
10월 26일, 나는 십여 명의 전역 대기병과 함께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대대는 일찌감치 천리행군을 떠났고, 대대 필수 행정 요원 몇과 같이 날마다 권태와 무료를 죽이고 있던 때였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9시께 갑자기 여단 본부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대 상황실 앞에 비무장으로 잔류병들이 집합해 있는데 퇴근했던 인사장교가 숨이 턱에 닿아서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묻고 싶은 걸 되물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부평 로터리에 여단 병력이 바리바리 나가고 있던데…….”
“…….”
천리행군을 떠난 우리 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대대가 출동한 것은 사실이었다. 인사장교는 여단 본부로부터 우리 잔류병들로 부대 외곽의 8개 초소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행정병뿐 아니라 제대를 코앞에 둔 왕고참들도 총을 메고 경계근무에 나서야 했다.
말뚝 보초로 두세 시께 한번 교대해 쉬고 내처 근무하고 아침 8시에 교대를 하고 들어오니까, 조수 격인 후임병이 ‘박정희가 죽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별다른 감회가 없었다. 우선 자리에 들어 눈을 붙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18년 독재는 심복이 쏜 총탄 몇 발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현역 병사들은 그다음 다음날에 이른바 ‘7대 군가’에서 ‘유신의 국군’을 뺀다는 ‘육군 회보’를 통해서 권력의 무상을 확인했다. [관련 글 : 1979년 오늘-중앙정보부장은 절대권력의 심장을 쏘았다]
사제(私製) 식사를 즐겼다던 청와대 내부 경비 66 특전대대에 짬밥이 나오고 결국, 이 대대가 해체되면서 특등사수 출신의 옛 동료들이 원대 복귀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절대권력의 유고를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독재자의 죽음으로 비로소 그의 유산인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역사의 발전’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죽음이 사병들에게 끼친 것은 훨씬 심각한 수준의 ‘민폐’였다. 육군 회보가 시달되면서 외출·외박·휴가 일체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목을 끊어버리고 싶은 후회로 가슴을 쳤다.
전역을 앞두고 가능하면 늦게 찾아 먹으리라고 일부러 마지막 정기 휴가를 미루고 있었던 나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휴가를 찾아 먹지도 못하고 전역마저 늦추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실제로 병사들 사이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비사(秘史)로 후대에 전해지는 역사
12월, 휴가가 재개되자 나는 일착으로 휴가를 떠났다. 12월 14일 정기 휴가를 마치고 귀대했을 때야 나는 이틀 전에 우리 부대가 출동했다는 걸 알았다. 그날 밤, 우리 여단은 서울로 출동하다가 부천 근처에서 회군했다고 했다. 그게 뒤에 사람들이 ‘사태’라 부르다가 ‘쿠데타’로 최종 규정된 12·12 쿠데타라는 역사와 내 개인사가 만나는 지점이다.
정작 현역 사병으로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는 박정희 사후에 신군부를 중심으로 진행된 권력 찬탈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10·26의 전모는 합수부의 발표나 방송 따위로 간신히 꿰어맞추고 있었지만, 우리 사병들이 쿠데타와 관련된 고급 정보에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듬해 2월에 나는 만기 전역했다. 3월에 대학에 돌아갔는데 두 달 후에 광주항쟁이 있었다. 5월에 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한 해병대 병력이 학교를 닫아 버렸다. 그리고 신군부의 공포정치가 수년간 이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5공 청문회 등을 통하여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모습이 조금씩 밝혀졌다. 역사가 소수의 권력에 의해 농단 되고 비화의 형식으로 후대에 공개되는 사회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1980년 전후사에서 국민은 역사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런 비사를 통해 나는 오랫동안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네이트 백과사전은 12·12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이끄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 내부의 무력충돌.
12·12는 전두환을 비롯한 일부 정치군인들이 이끄는 사조직이 하극상으로 군권을 장악한 쿠데타다.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육참총장을 강제연행하면서 군내 반대파들을 무력화시켰다.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하극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30년, 그러나 역사는 퇴행하고
주로 영관급인, 1·3 공수특전여단의 대대장들이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령관 부관이었던 김오랑 소령이 총격으로 사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영관급 장교들이 장군 전용의 지프에 달린 별판을 군홧발로 짓이겼다는 이야기는 당시 흔히 듣던 이야기였다. 강제 예편되어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정병주 장군은 198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육본 쪽에서는 쿠데타군을 막기 위해 동원한 부대가 내가 근무하고 있었던 9공수여단이었다. 내가 전입할 때 여단장이었던 노태우는 청와대 작전참모로 옮겨갔고, 당시 여단장은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의 윤흥길 준장이었다. 명령에 따라 여단은 즉각 출동했지만, 아군 간의 교전을 두려워한 육군 수뇌부가 중도 회군 명령을 내림으로써 부대는 부천에서 원대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사에서 첫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총애받던 정치군인들은 배운 대로 오욕의 역사를 반복했다. 이들 정치군인은 군령체계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엄청난 하극상을 통해 군대와 그들이 지키고자 한 가치를 우스개로 희화화해 버렸다.
5공 청문회 등에 불려 나온 그 빛나는 별자리들이 보여준 것은 다만 환멸이었을 뿐이다. 상관에게 총을 겨누고 권력을 빼앗은 이들은 한 시절의 영화를 누렸지만, 자신의 저지른 패악에 대해 발뺌으로 일관하였고 어떤 책임도 지려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은 것은 군인이 아니라, 단지 죄를 면하고자 하는 비루한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12·12가 김영삼 정부 때 전두환·노태우가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그를 쿠데타의 수괴로 단죄한 것은 한 시기의 역사일 뿐, 우리 시대의 시대 정신은 여전히 ‘성공한 역사’와 ‘실패한 반란’의 경계에서 서성대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30년은 한 세대가 바뀌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12·12도 잊었고, 신군부 독재도 잊었다. 세기가 바뀌고 정치적 지형도 바뀌어 네 번째 민간 정부가 집권 중이다. 누구는 민주주의의 만개를 주장하지만, 나는 날마다 확인하는 ‘역사적 퇴행’ 앞에서 어지럽기만 하다. 서른 번째 12·12를 맞으며 무명의 시민이 겪은 개인적 역사와 공식 역사 사이의 간극을 무심히 생각해 보는 까닭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2009. 12.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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