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의 감격을 전하는 시와 시조, 노랫말, 그리고 산문
“어머니!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 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5부 완결편 마지막 장면
봉순이 낳은 아이로 서희가 딸로 거둔 양현이 일본의 항복 소식을 서희에게 알리는 장면이다. 서희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모녀는 부둥켜안는다. 읍내 갔다가 소식을 듣고 돌아오며 서희의 집사 장연학이 미친 듯이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다 눈물을 흘리다가 소리 내어 웃는 가운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한글로 노래한 해방의 감격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당시 삼천만 동포는 해방의 감격을 어떻게 드러냈을까. 남편인 길상이 감옥에 있는 최서희에게는 해방의 의미가 훨씬 명확했을 것이다. 징집을 피해 산에 온 사람들을 도우며 나름의 항일 운동에 참여한 장연학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해방 당일 그 소식을 제대로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 너무 갑작스러운 통일 소식이 별로 실감할 수 없었을 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일제가 물러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민족 지도자들의 귀환과 활동을 통해 광복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무렵에 사람들이 느꼈을 벅찬 감격은 어땠는지를 검색해 보다가 2020년에 국립 한글박물관의 소식지 <한박웃음>(2020.8. 제84호)의 기획 기사 ‘광복의 기쁨, 한글로 노래하다’를 읽었다. 해방은 일제 말기부터 금지되었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을 온전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심훈은 ‘그날’을 맞이하지 못했다
1930년에 심훈(1901~1936)이 발표한 시 ‘그날이 오면’은 심훈이 ‘해방의 그날’에 대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작품으로 이육사의 ‘절정’과 함께 193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다. 1920년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잇는 이 작품은 해방의 그날이 오면, 시인의 머리로 종로의 인경을 두들기고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치며 행렬의 앞장을 서겠다는 단순하고 격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날이 오면’은 1930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일을 기념하여 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저항시이지만, 심훈은 해방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는 작품집 <그날이 오면>(1949)에 실려서 해방 조국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을 맡았던 한글학자 이극로(1893~1978)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해방 이틀 뒤에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국어학자인 그에게 해방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터, 그는 1945년 12월 발간된 《해방기념시집》에 시조 ‘한양의 가을’을 싣고 한반도의 아름다움과 희망찬 내일을 노래했다. [관련 글 : 일제, ‘조선어학회 사건’ 기획, 검거를 시작하다]
시와 시조, 노랫말이 된 해방의 감격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면서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사전 편찬,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에 크게 이바지한 이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는데,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 운동 사업’을 주관하였다.[관련 글 : ‘세상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 한글]
‘한양의 가을’은 한강, 기러기, 남산의 단풍, 무 배추 등 조선 김치 같은 시어를 써서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해방 조국에 당도한 가을을 노래했다. 씩씩한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신흥 조선’을 읽는 국어학자의 모습을 천천히 떠올리게 해 준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18920~1968)은 1945년 12월에 간행된 《해방기념시집》에 ‘산상(山上)의 노래’를 발표하며 ‘어두운 과거를 극복한 현실에 대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노래했다. 그는 해방의 감격을 비유적 표현과 절제된 어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일제 강점기를 견뎌내고 광복을 맞이하고도 민족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자기 모습을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드러냈다.
위당 정인보(1893~1950)는 처음으로 ‘국학’이라는 용어를 써서 이 땅에 ‘국학’의 뿌리를 내리고 품격 높은 국한문 혼용의 산문과 아름답고 전아한 의고체(擬古體)의 한글로 시조를 썼던 이다. 그는 해방 무렵에 ‘십이애(哀)’를 쓰기도 했지만, 그가 노랫말을 쓴 ‘광복절 노래’는 그의 아름다운 한글 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관련 글 : ‘아름다운 우리 말글 맵시’, 위당 정인보를 생각한다]
광복절은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정되었는데 광복절 노래도 같은 해 공모로 만들어졌다. 바장조, 4분의 4박자, 전체 16마디로 구성된 전형적인 두도막 형식 A(aa') B(bc)의 곡이다. 2연 8행의 정형시에 1절과 2절로 나누어 곡을 붙였다.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를 만든 윤용하가 작곡한 이 광복절의 노랫말에도 위당 특유의 예스러운 한글의 아름다움의 품격으로 빛난다.
해방을 맞이한 여인의 감회, ‘대한 해방 감회문’
한편,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막내딸)의 손녀 윤백영이 58세에 독립을 맞이하며 느낀 기쁨을 적은 글도 새삼 ‘나라 글자’ 한글에 대한 정체성을 환기해 준다. 붓글씨로 쓴 ‘대한 해방 감회문’은 “당시 여성으로서 해방에 대해 한글로 쓴 자료가 드문데다 윤백영의 뛰어난 한글 서체가 정갈하게 드러나 역사적으로도 가치를 지니는 작품”(한박웃음)이다.
여인은 해방을 “하늘은 복되고 길한 기운을 발하고 사람들은 행복의 기쁨이 넘치고 풀과 나무는 향기를 통하고 땅은 오곡이 잘 여물도록 도와주는 이때”로 받아들였다. 여성이라고 해서 해방의 감회가 남자와 다르겠는가. 궁서체의 글씨에 따뜻하게 배어 있는 한 여성의 감회는 새삼 시대를 뛰어넘어 다가온다.
고 성내운 교수의 목소리로 읊는 정희성의 시 ‘8·15를 위한 북소리’를 들으며 78주년 광복절을 맞는다. 새벽 운동에서 돌아와 태극기를 달면서 고개를 빼어 아파트 위아래를 찾아보는데, 위층 어디쯤 태극기 하나가 펄럭이고 있어서 반가웠다. 아, 언제 서울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한글박물관’에도 꼭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한다. [관련 글 : 8·15를 위한 북소리]
2023. 8.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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