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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노화, 그 우울한 길목에서(3)

by 낮달2018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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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하게 늙어가기’는 과욕, ‘면(免) 노추(老醜)’ 도 쉽지 않다

▲ 노년에는 누구나 추하게 늙지 않고 현명하게 늙어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 pixabay

“마흔이 되면 불혹(不惑)이라더니, 어떻게 나는 이런저런 유혹에 자꾸 마음이 기우는지 모르겠어.”

 

마흔 살을 갓 넘겼을 무렵, 내가 벗들에게 건넨 푸념이다. 미혹되지 않음은 공자 같은 성인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을 터인데도 이런저런 욕망을 내려놓기가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한가하게 그걸 한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던 나는 그러구러 그 시기를 넘겼다.

 

공자의 불혹, 나는 끊임없이 유혹에 흔들렸다

 

인간의 수명을 팔십으로 가정하면 마흔은 그 한가운데다. 2, 30대 열정의 시기를 지나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서정주 ‘국화 옆에서’) 나이인데, 이 마흔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서양이 비슷하다. 링컨이 남긴 명언, “마흔 살이 되면 인간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와 “마흔 살에도 어리석으면 정말 어리석다.”(에드워드 영)라는 지적이 그 좋은 예다.

 

‘노화’를 바라보는 긍정과 부정, 그 중층적 성격

▲ 노화를 두고 '좋은 포도주처럼 익는 것'이라고 한 필립스와 '노인은 탐욕스럽다'고 본 알랭의 견해는 극단적으로 충돌한다.

노화, 생물학적 성장을 바라보는 관점은 때론 긍정적이지만, 또 어떤 경우엔 부정적이기도 하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좋은 포도주처럼 익는 것이다.”(필립스)라는 인식과 “청년은 사랑을 추구하고 장년은 지위를 추구하고 노인은 탐욕스러워 지위도 명예도 모두 손에 넣으려고 한다.”(알랭)라는 맞부딪는 시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극단은 상충하는 인식이라기보다는 노화의 중층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 극단의 가운데에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심성이 많아질 뿐이다.”(헤밍웨이)라는 인식이 끼어 있다.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라 로슈푸코)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길을 통해서 노령에 이르지는 못한다.”(마크 트웨인)라는 언급은 노화를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그 모범답안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더러 “나이 드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추하게 늙는 게 두렵다.”라고 뇌까리곤 했었다. 그건 내 진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절대 추하게 늙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근원은 내 신체적 능력이 아직은 쇠퇴하지 않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 기능이 쇠락기에 접어들면 자신감도 함께 무너지기 마련이다. 자신감과 그 본연의 기능을 잃어버린 몸이란 과장하면 일종의 ‘거푸집’일 뿐이다. 도저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가 그걸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열패감은 무장해제당한 병사의 그것에 못지않다.

 

신체 기능과 함께 ‘자신감’도 무너진다

 

노화를 짐짓 부정하고 있던 내가 자신감을 잃고 주저앉아 버린 것은 지난해 다녀온 제주도 여행에서였다. 우도에서 섬을 일주하는 데 이용하는 삼륜 전기차를 타면서 느꼈던 아득한 절망감은 내게 장년과 노년의 경계, 그 쓸쓸한 과도기를 통과하는 법을 깨우쳐 주었고, 심상한 노년의 민낯을 확인해 주었었다. [관련 글 : 제주 우도 여행에서 우리가 잃은 것얻은 것]

 

그리고,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질환에 시달리면서 나는 조바심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심술궂은 질환에 짜증을 내고, 마음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면서 내게 당도한 노화를 부인하고 그게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고 우정 여기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게 모자란 것들에 대한 무모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13년을 넘은, 제 기능을 다 한 자동차 부품 교체를 거듭하게 되면서 나는 가끔 길거리에서 만나는 전기차를 탐냈고, 초점이 살짝 나간 망원렌즈를 대체할 고가의 렌즈를 원하기도 했다. 연금에 의존해 살아가는 은퇴자가 가외의 욕망에 몸을 내맡기는 것은 더 볼 것 없이 ‘탐욕’일 뿐이다.

“열 살 때는 과자에, 스무 살 때는 연인에게, 서른 살 때는 쾌락에, 마흔 살 때는 야심에, 그리고 쉰 살 때는 탐욕에 끌린다.”라고 한 루소의 통찰은 그래서 옳다. 물론 나이 들면서 한갓진 욕망 따위는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사는 이들도 있을 터이지만, 그러하지 못하여 마음의 감옥에서 사는 이들이 훨씬 많을지 모른다.

 

노화는 인간을 외통수로 삿된 욕망과 이기, 무모한 질투와 불만의 지옥 속으로 몰아넣는다. 입으로는 모든 걸 내려놓은 평안한 노년을 이야기하지만, 노인들이 빠지기 쉬운 나락은 생각보다 곁에 있다. 노년의 평안은 그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경제적 여유와 자식들의 안정 등 여러 가지 존재 조건을 확보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외감’은 노년의 인간을 ‘독선과 독단’에 빠뜨린다

 

노년의 소외감은 인간을 쓸데없는 잔소리꾼이나 무절제한 간섭자로 만들며, 신통찮은 독선과 독단에 빠뜨리기 쉽다. 그 귀결점이 ‘대책 없는 꼰대’라는 건 정석이다. 아무도 그들의 경험을 지혜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충고와 조언을 원하지도 않는다.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는 이야기가 금과옥조로 환영받는 이유다.

 

나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왔다고 여기지만, 3년 전 갓 등원한 진보정당의 20, 30대 여성 초선의원을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바라보다 화들짝 놀란 경험이 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든지 꼰대가 될 수 있고, 꼰대질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들에게 보내는 당부를 글로 썼다. [관련 글 : 류호정·장혜영 의원에게 보내는 꼰대의 당부]

 

‘자신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잠재적으로 꼰대일 수밖에 없다. 꼰대의 문제는 자신이 꼰대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따라서 나는 젊은이들의 눈에 꼰대로 보일 수 있다는 걸 늘 의식하고자 애써왔다. 내 경험이 ‘만고의 진리’가 아니라, 이미 효용성을 잃은 지난 시대의 ‘숱한 경험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일흔을 넘긴 우리 형은 중등교사인 딸 내외와 함께 외손주들을 돌보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함께 살긴 하지만, 그는 그들의 삶에 어떤 간섭도, 충고도, 조언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의견에 공감했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는 삶일지도 모른다.

▲ 노년에 이르면 자신이 밟아온 삶을 사는 젊은이들의 삶이 한눈에 보여 자신이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가 착각하기 쉽다.

나이 들어 ‘어르신’ 같은 호칭으로 불리게 되면, 자신이 밟아온 삶의 여정을 사는 젊은이들의 삶이 한눈에 보여서 자기가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천, 수만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한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도그마로 해명된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기만일 뿐이다. 

 

늙는다고 ‘현명해지는 건 아니다

 

늙으면 현명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괴테는 그 진실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은 현명해지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두뇌가 나빠지므로 예전과 같은 현명함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라고 통찰한 것이다.

 

슬기롭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은퇴자의 지혜와 자신의 독선과 아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인의 독단 사이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의 사실에 담긴 두 가지 측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조’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집과 독선으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기가 더 쉬운 이유다.

 

이것저것 재어봐도 정답 찾기는 쉽지 않다. 나는 내가 아직도 더러 저열한 욕망에 휘둘리고, 머릿속에서 간섭 유전자가 출몰하는 상황을 이성으로 제어하기 어렵다고 느낄 땐, ‘나이는 벼슬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한 발짝 물러서려고 한다.

 

때론 예전처럼 기민한 순발력과 기억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노화로 상실한 어떤 능력들 탓에 오히려 더 현명하게 현실에 대처하게 하기 때문이다. 노화와 함께 진전하는 기억력의 쇠퇴는 노년의 삶을 넘치지 않게 조정하는 균형추 구실을 하는 셈이다.

 

새해 들어 시청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오늘날 ‘어른’이라고 불리는 이가 보여준 삶의 태도를 잔잔한 감동으로 보여주었다. 자신이 번 돈의 대부분을 사회에 되돌린 이 시골 어른은 침묵이 때론 위대한 삶의 방식에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관련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TcKPAl3wuM4]

 

새해 들면서 무심히 되뇌는 ‘현명하게 늙어가기’가 새삼스레 ‘과욕이라는 걸 확인한다. 그것은 ‘추하지 않게 늙어가기’만큼,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어쩌면 늙어가면서 우리는 육신과 영혼을 가렸던 장식들을 하나씩 벗어버린 채 발가벗고 서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3. 2.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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