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변화’와 ‘죽음’의 인식
‘늙는다’라고 느끼는 것과 그걸 입 밖에 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전 같으면 환갑을 넘기면 노인으로 불리었지만, 요즘엔 환갑은 여느 생일과 다르지 않아 기념일에도 넣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몸은 노화 현상을 깨달아도 그걸 화제로 삼는 걸 꺼리게 되는 것이다. 어쩐지 ‘노화’를 이야기하는 게 민망해서 ‘나이 들면서’ 같은 중립적 표현을 쓰게 되는 이유도 거기 있다.
명확한 자각 증성으로 다가오는 ‘노화’
내가 처음으로 ‘노화’를 인식한 게 쉰으로 접어들던 2006년도였던 것 같다. 그해 신년 벽두에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라는 글을 쓴 것이다. 나는 내리막을 내려가거나 쉽지 않은 틈새의 개울 같은 헛방을 지날 때 뛰어넘는 대신 저도 몰래 다른 경로를 찾으려 두리번거리게 된다면 그것은 더는 ‘젊지 않다’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썼다. 이때도 글머리에 노화를 뇌까리는 자신을 눙치느라 ‘신파’라는 표현까지 불러냈다.[관련 글 :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써 놓고 보니 꼼짝없는 신파다. ‘인간은 서서 걷는다’는 진술과 다를 바 없는 맹꽁이 같은 수작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변화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뚱이와 그 기관의 노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몸이 늙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은 명확한 자각 증상의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다.
-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중에서
그리고 17년이 지났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심상하게 환갑, 진갑(進甲)을 지냈고, 국가부조가 시작되는 ‘경로우대’ 나이인 65세를 넘겼다. 그 이후, 웬만한 국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관람 시설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고속열차도 평일에는 30% 할인요금으로 탈 수 있는 편의를 누리게 되었다.
지난해는 유달리 신체적 노화가 두드러지면서 이런저런 질환으로 신경이 쓰였던 시기였다. 2년째 앓아온 알레르기 피부염부터 시작하여, 석회화건염과 코로나19, 알레르기 결막염, 근막통증증후군에 이르기까지 면역력 약화에 따른 갖가지 질환으로 지샌 것이다. [관련 글 : 노화, 그 우울한 길목에서(1)]
내가 앓은 질환들은 지속적 통증으로 몸을 괴롭히는 병이 아니다. 그러나 그걸 다스리려면 아침저녁으로 이른바 ‘한 줌씩’의 약을 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질환이었다. 당장 몸이 못 견디게 괴로운 것도 아닌데도 때맞추어 적지 않은 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병 못잖은 스트레스였다.
지난해 12월부터 혈압약 말고 다른 약을 먹지 않아도 되면서 나는 얼마간 평정을 찾았다. 정말 병으로 고생한 이들에게 외람된 얘기지만, 돌이켜보면 마치 기나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었다. 상황은 코로나를 앓고 난 뒤, 알레르기 피부염이 호전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0월 초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공복혈당장애 의심 판정을 받으면서 잠깐 긴장했다. 지난 2년간 최소한으로 복용량을 줄였으나 스테로이드를 잊을 만하면 먹었고, 이상하게 단 게 당겨서 사탕을 사다 놓고 심심하면 우물거렸던 탓이라고 여겼다. 호전될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며 운동을 계속하고 식습관을 고치려 애썼더니 체중이 주는 중이다.
평형 유지 능력, 집중력의 쇠퇴와 감각의 둔화
사람에 따라 그 진행 속도가 다를 뿐, 노화가 신체의 기능을 퇴화시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한 발로 10초간 서기’를 하라길래 하면서도 뭐 이런 걸 다 시키노 했는데 어럽쇼, 이게 간단하지 않았었다. 해내긴 했지만, 10초가 그리 길 줄은 정말 몰랐다. 돌아와 검색해 보니, 10초간 한 발로 서기를 제대로 할 수 없으면 잘하는 사람보다 7년 내 어떤 이유로든 사망할 위험도가 84% 높은 것으로 나타났단다.
나이 들면서 신체 평형을 유지하는 어려움을 절감한다. 나는 물매가 급한 산비탈을 내려올 때 자세를 별로 허물지 않고도 미끄러지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는데, 그건 신체 평형 유지 능력이 남보다 나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신체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계단이나 오르막을 올라 보면 몸이 자꾸 아래(뒤)쪽으로 젖혀지곤 했다. 아, 이래서 낙상사고가 생기는구나, 나는 본능적으로 계단 손잡이를 잡고 몸을 바로잡아야 했다.
가끔 욕실에서 구부려 머리를 감거나 할 때 방심해 튀어나온 세면기에 머리를 부딪고, 베란다의 투명 유리창에 무심히 머리를 부딪치곤 하는 것도 균형을 유지하려는 집중력의 쇠퇴에서 온 거로 생각한다. 야외활동을 하다가 나무나 돌에 부딪히거나 나뭇가지에 찔리면서도 감각이 둔해져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무릎 아래 정강이 부분이나 팔꿈치 같은 데 멍이 들거나, 자잘한 상처가 끊이지 않는 건 그래서다.
샤워를 하고 몸을 닦으면서 무릎 아래 여기저기에 난 상처나 멍 자국을 바라보면서 기분이 헛헛해질 때가 많다. 5km쯤 걷고 나서 매일 샤워하건만 손이 자라지 않는 등허리는 왜 그리 자주 가려운가. 이는 노화로 피부 두께가 얇아지고 땀 등을 분비하는 외분비선이 감소해서라고 한다.
자다가 가려워 일어나면 효자손을 찾아 등을 긁곤 하는데, 분명 내 살을 긁고 있는데도 마치 남의 가죽을 문지르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역시 등 긁기는 마누라 손이 최고다. 노년의 부부가 늙어가면서 서로 등을 긁어주며 이어가는 애정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이유다.
생생한 현실로 환기되는 죽음
지난해 갖가지 질환으로 여러 종류의 약을 먹으면서 가끔 죽음을 생각하곤 했다. 예순을 넘기면서 떠오르기 시작한 죽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생생한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젊은이들은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현실의 생생한 삶만큼 죽음은 생경하기 때문이다. 설사 죽음을 떠올린다고 해도 그것은 박제된, 관념화된 죽음일 뿐이다.
철들 무렵부터 나는 길을 떠나기 전에 언제나 속옷을 갈아입곤 했다. 그 나들이의 어느 순간에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뒷날, 주위에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확인하고 인간은 삶 속에서 시나브로 죽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 지인들의 부음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때, 이제 죽음은 더는 비현실적이지 않다. 평균 수명의 증가로 아흔 넘긴 노인들이 수두룩하지만, 일흔에 이르지 못하고 60대에 떠나는 이들은 좀 많은가. 내가 우스개 삼아 ‘예순 넘어 죽는 건 돌연사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이유다. 60대의 죽음은 비록 안타깝긴 하지만, 그 죽음의 이유는 한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잘한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건강한 편’이라고 믿고 있지만, 건강이 수명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불의의 사고 앞에서, 또는 손쓸 겨를도 없이 치명적으로 엄습하는 병마 앞에서는 건강조차도 수명을 지켜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에 삶을 단절해 버리는죽음, 그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1947년생으로 나보다 아홉 살 연상인 문정희 시인의 시 ‘유방’은 시인이 유방암 검사를 받으며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성찰한 시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노화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몸을 성찰하기 시작하게 된다. 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몸의 모든 기관과 기관 사이, 부위와 부위 사이의 부조화를 통해서 노화를 깨닫듯 노화는 새롭게 자기 몸을 바라보게 해 주는 것이다. [관련 글 : 문정희 시인의 ‘몸과 삶’, ‘사랑’의 성찰]
‘몸’은 한때 젊음의 동의어였던 것 같다. 사랑과 욕망을 현재화하는 그 살아 있는 살과 피, 그게 몸이었던 게다. 그때, 모든 몸의 부위들, 눈과 코, 입과 귀, 목과 가슴, 팔과 다리, 엉덩이와 성기는 그 젊음과 환희를 찬양하는 수단들이었다.
그 각각의 신체 부위들은 스스로 독자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오직 육체의 강건함과 관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젊음은 그 젊음 때문에, 자신의 청춘, 그 육체를 성찰하기 어렵다. 성찰보다는 그것을 찬양하고 누리는 일이 더 급하고 가까운 일이므로.
팽팽한 근육과 거기서 비롯한 단단한 근력, 외부적 자극에 재빨리 반응하는 몸과 피의 속삭임, 그것은 젊은 육체의 황홀한 합주 같은 것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빠짐없이 살아 오르는 날카로운 순발력도, 어떤 상처도 금방 거뜬히 아물게 하는 치유의 능력도 그 젊음의 징표였다.
그러나 끝이 없는 젊음은 없다.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도 응답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를 불타오르게 했던 저 도저한 사랑과 욕망 앞에서조차 숨을 죽이는 자기 살과 피를 깨닫게 되면서 생물학적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이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노화’를 자각한다는 것과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노화를 처음 인식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그걸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어서다. 그러나 시나브로 차곡차곡 쌓여 더해가는 노화의 목록들 앞에 인간은 마침내 손을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정해 왔던 노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노년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이제 노화를 자신의 무기나 방패로 쓸 것인지, 지혜로 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슴 속에 쟁여온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지도 결정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2023. 1. 14. 낮달
노화, 그 우울한 길목에서(1) 잔병과 약 치레
노화, 그 우울한 길목에서(3) ‘현명하게 늙어가기’는 과욕, ‘면(免) 노추(老醜)’ 도 쉽지 않다
'이 풍진 세상에 > 퇴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흔을 앞두고, 뒤늦게 ‘모자’에 꽂히다 (22) | 2024.07.02 |
---|---|
노화, 그 우울한 길목에서(3) (5) | 2023.02.01 |
노화, 그 우울한 길목에서(1) (6) | 2022.12.19 |
평생 꺼려 쓰지 않던 모자, ‘방한모’를 마련하다 (3) | 2022.12.13 |
‘나라에서 주는 상’ 받을 뻔하다 말다 (0) | 2022.06.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