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50년 12월 10일, 납북된 우사 김규식 만포진에서 별세
1950년 12월 10일,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오래 앓아온 심장병과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하면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69세. 그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통일 자주 국가를 지향했고 중도 노선을 추구한 정치가였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는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은 민족지도자였다.
1950년 12월 10일,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오래 앓아온 심장병과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하면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69세. 그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통일 자주 국가를 지향했고 중도 노선을 추구한 정치가였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는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은 민족지도자였다.
“우리는 우리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겠다. 좌우합작도 미국 사람 장단에 춤추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남의 장단에 출 것이 아니라 우리 장단에 춤추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축배를 들자.”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金日成)이 베푼 초대연에서 우사가 했다는 이 인사말은 해방 뒤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그가 추구한 좌우익 연립 중도파 정부에 대한 열망과 신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주적 중도 정부를 추구한 그의 꿈은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서는 등 남북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스러져버렸다. 남북협상이 무산되고 2년 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납북된 그는 만포진에서 마침내 자신의 오랜 삶을 거두어들이고 만 것이다.
1881년, 김규식은 부산 동래부 관리였던 김지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유배되고 여섯 살 때 모친도 사망하여 고아가 된 그는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때 요한(Johann)이라는 교명(敎名)을 받았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프린스턴 대학원(Prince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1910년 새문안교회의 헌당식 뒤,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면서 화북(華北)과 몽골 지방에서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우사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여운형 등의 초청으로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로 건너오면서다. 그해 8월, 그는 여운형, 서병호, 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창립에 동참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1월 28일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며,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 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함과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호소하였다.
1919년 8월 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군자금을 임정에 보내는 한편, 3·1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 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1월 상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1922년 1월, 우사는 소련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 대표 52명 중 한 사람으로 참석, 몽양 여운형과 함께 의장단에 선발되어 활동하였다. 인민대표자 대회의 5인 의장단의 일원으로 그는 개회사를 발표하고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원동(遠東: 극동)에서의 혁명 과업과 관련하여 왕왕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을 운위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라파와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결탁하였는지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국의 ‘이타주의(利他主義)’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미 공화국조차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습니다.”
- 김규식, The Asiatic Revolutionary Movement and Imperialism, Communist Review, 1922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이 극동아시아의 문제의 핵심’이므로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극동의 혼란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며 제국주의 침략에서 해방에 대한 지원을 촉구했다. 또 서구 열강과 일본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했다.
한편, 임시정부 내부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하면서 1921년, 김창숙, 박은식 등이 임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무장투쟁세력을 포함한 통일적인 정부와 독립운동 방향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1923년에 소집된 국민대표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논란으로 일관하다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우사는 투쟁에 대한 의욕을 잃고 교육계에 투신했다. 그는 1923년,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1927년에는 톈진(天津)으로 옮겨가 1929년까지 베이양(北洋) 대학교수로 일했다.
1927년 2월에는 유자명(柳子明) 등과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 그 회장으로 추대되어 급진파와 교류하면서 독립투쟁을 지속했다. 이 연합회는 기관지로 <동방민족>을 우리말과 중국어, 영어로 간행하여 각국에 발송하고 비밀지부도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투탄 의거 이후 임정이 항저우로 옮기고 요인들이 피신하게 되자, 중국 측에서는 국민정부와 민간인이 연합하여 민간 외교사절을 구미에 파견하기로 하고 수석 전권에 김규식을 선임 파견하였다.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힘도 발휘할 수 있고 공신력도 있다는 여망에 따라 그는 한독당(김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의열단, 한국혁명당, 광복동지회의 대표를 모이게 하여 1932년 10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을 주축으로 중한(中韓)민중대동맹을 결성하고 그 다음 해인 1933년 그 대표 자격으로 북미 각지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약 8천불을 모금해 왔다. 그는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 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이 되었다.
진정한 해방은 ‘단합’과 ‘통일’이다
우사는 상하이에 왔다가 난징(南京)으로 가서 의열단의 김원봉, 의열단원인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의 유자명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여 무장 항일투쟁에 힘을 보탰다. 김원봉이 난징 중앙군관학교 안에 한국지대를 설치, 군관을 양성할 때 그도 20여 명의 교관의 한 사람으로서 군사 교육을 맡은 것이다.
통일전선을 성립시켜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해온 그는 1935년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대한독립당(하와이), 미주대한국민회, 뉴욕 대한인교민단, 하와이 대한국민회, 하와이혁명동지회의 9개 단체 대표 32명으로 하여금 남경에 모여 혁명단체대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1935년 7월에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되면서 우사는 주석으로 추대되었지만, 민혁당은 통일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다.
1939년 민혁당이 임정에 참여함으로써 좌우 합작이 이루어졌고 1942년에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合編)되었으며 민혁당 계열이 의정원 의원으로 정식 참석하였다. 난징과 청두(成都)에서 교수로 생활하고 있던 우사는 임정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보선되었으며 1944년 2월에는 주석·부주석 지도체제로의 5차 개헌에 따라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우사는 1945년 11월 23일에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했다. 그는 민족의 ‘단합’과 ‘통일’이 진정한 광복이라고 믿은 그는 해방공간에서 일관된 태도로 좌우합작과 통합을 이루려 애썼다.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일러 단일 민족이니 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리의 단결된 완전 독립국가 달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애 일같이 주인 정신을 살려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중에서
우사는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 5월에 좌우합작 준비작업을 추진했다. 그해 6월부터 7월까지 ‘미군정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고, 12월에 입법의원 의장, 1947년 10월에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오자 그는 남북협상에 들어갔다. 그해 2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고 이를 비난하였다.
“(단독정부 수립 운동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자본가들의 이익을 테러로 옹호하면서 민족분열을 내란으로 하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도 세워보자는 가공 가증의 음모이다. 지금이야 우리 민족은 통일된 정부를 세워서 공존번영을 누리느냐, 분열된 전제정치를 세워 상잔상학(相殘相虐)의 비운에 빠지느냐 하는 가장 위험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 인민은 가장 냉정하게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협상의 실패와 좌절
우사는 김구와 연합하여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3월 15일, 김일성과 김두봉의 회신에 따라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김일성이 수락 의사를 표명하자 4월 21일 38선을 넘었다. 그는 남북협상의 실패와 민중들이 이승만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5월 5일, 우사는 김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우사는 5월 14일, 북한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월 21일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5·10 남한 단독총선거에 ‘반대하지도 참가하지도 않았다(불반대·불참가)’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 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6월에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결국 1950년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극적인 생애를 마감한 것이었다.
단독정부 수립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정적인 데다가 납북되었기 때문에 우사는 이승만 집권 시기에 금기시되었고, 제2공화국 시절에도 부정적인 평가는 이어졌다. 그에 대한 재조명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 후반 관련 서적이 출판되고,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다.
우사 김규식에 대한 서훈이 뒤늦게 1989년에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1등급의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1991년에 광복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 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좌우합작 운동을 벌일 때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북한에서도 그를 ‘애국열사릉’에 안장하고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민족지도자로서 정치가로서 우사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진행 중인 듯하다. 2004년에 우사연구회는 그의 일대기를 5권의 전집으로 간행했다.
교육자로서 학자로서 그는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고 저서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 입문>(1940), 중국 근대 비극시 <원용사(婉容詞)>의 영문번역(1943), <실용 영문작법>(1944)과 <실용영어>(1945), 그리고 시집으로 <양자유경(揚子幽景)>(1945) 등이 남아 있다.
2018. 12. 10. 낮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역사넷> 등을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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