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 진주만 공격
일요일 아침의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도쿄시각으로는 12월 8일)은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하와이 오아후섬의 진주만(Pearl Harbor)에 있던 미국 해군기지는 평화로운 휴일 아침을 맞고 있었다. 7시 30분에 일본 함대를 이륙한 일본군 비행기 360대는 아무 제지 없이 섬에 접근했고 7시 49분에 비행 총대장은 전군 돌격을 명령했다. 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다.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배는 일본 폭격기의 완벽한 목표가 되었고 휴일 아침이어서 미군의 대비는 거의 없었다. 최대의 기습 효과를 노린 일본의 선택이 성공한 것이었다. 비행기도 비행장에 정렬해 단지 몇 대만이 비행 중이었다.
미국 전함은 일본기에 치명타를 입었다. 애리조나호·캘리포니아호·웨스트버지니아호는 침몰하고 오클라호마호는 전복되었다. 45분 뒤 제2진 비행단이 진주만을 휩쓸고 메릴랜드호·네바다호·테네시호·펜실베이니아호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밖에도 함선 18척이 침몰하거나 크게 손상되었고 180여 대가 넘는 비행기가 파괴되었다. 군인 사상자는 사망자 2300명을 포함해 3400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단지 비행기 29~60대와 소형 잠수함 5대를 잃었을 뿐이었다. 기습공격은 대성공인 것처럼 보였다. 7시 53분은 함대는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 ‘도라 도라 도라’를 사령부에 타전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중일전쟁)하고 1940년 추축국(독일·이탈리아)과 동맹을 맺자 미국은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시키고 석유와 기타 전쟁필수품이 일본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1941년 7월에는 일본과의 모든 상업·금융 관계를 단절했다.
중국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질린 일본은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수중에 넣고 싶어 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반도에는 일본의 산업 경제에 필요한 원료인 주석과 고무, 그리고 석유가 있었다.
이 지역을 빼앗아 제국(帝國)에 병합할 수 있다면 사실상 경제 자립을 이룩할 수 있을뿐더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될 수도 있었다. 1941년, 영국·네덜란드·미국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연합 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를 중심으로 한 일본 전략가들은 대담한 전쟁 계획을 새로 세웠다.
일단 미국 함대가 전투력을 잃게 되면 일본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열도 및 남태평양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일본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 정부는 태평양 확전의 주된 상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하기로 했다.
1941년 11월 23일,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1척으로 이루어진 일본 함대는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중장의 지휘 아래 하와이 북쪽 440㎞ 지점으로 항해해나갔고, 12월 7일, 이곳에서 모두 360대의 비행기를 출격시킨 것이었다.
기습공격으로 적을 빈사 상태로 만든 뒤에,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겠다는 게 일본의 전략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오판이었다. 미국의 경제력은 진주만 공습으로 흔들릴 수준이 아니었는 데다가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이 엄청난 공분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했듯이 ‘불명예스러운 날로 기억될 그 날’은 미국인들을 단합시키고 이전의 중립 지지 여론을 바꾸어놓았다. 12월 8일 미국 의회는 단 한 사람(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도 반대했던 몬태나의 지넷 랭킨 공화당 의원)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또 일본의 기습공격은 미군의 전력을 궤멸하지는 못했다.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 3대는 공격 당시 진주만에 없었기 때문에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8척의 전함 가운데 애리조나호와 오클라호마호를 제외한 6척은 수리되어 복귀했다. 무엇보다 일본은 섬에 있던 중요한 석유 저장시설을 파괴하지는 못했고 이는 공습 4개월 뒤에 바로 도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보복공습으로 돌아왔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팽창주의적·군국주의적 일본과 미국의 10여 년에 걸친 악화한 관계는 결국 전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채 되지 않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승리에 환호한 식민지 친일 부역 문인들
태평양전쟁이 개전했을 때 한반도는 일제 말기였다. 미국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선전한 진주만 공격 이후 조선에서는 지식인들이 대일협력에 대거 나서게 된다. 식민지 지식인들의 친일부역은 주로 일본의 침략전쟁 전후인,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 등 3단계로 이루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던 조선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세 사건 직후에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가 선전했던 ‘대동아공영권’, 또는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구축이 불가항력이라고 ‘오판’하고 만 것이었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을 적지 않은 문인들이 환호하고 찬양했다. 이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구호인 ‘팔굉일우(八紘一宇)’(‘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를 따 창씨명을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썼던 주요한(1900~1979)은 시 ‘하와이의 섬들아’를 통해 진주만의 승리를 노래하고 상대국인 미국의 비난했다. [관련 글 : 주요한,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12월 여드렛날 네 위에 피와 불이 비 오듯 나릴 때
동아 해방의 깃발은 날리고 정의의 칼은 번듯거림을 네 보았으리라
이날 적국의 군함, 침몰된 자 기함(旗艦) ‘아리조나’를 위시해서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깨어져서 다시 못 쓰게 된 자도 네 척, 이름 좋은 진주만은 비참한 시체가 되고
횡포한 아메리카 나라의 아세아 함대는 앉은 자리에서
반신불수의 병신이 됨을 네 보았으리라
- ‘하와이의 섬들아’, <삼천리>(1942년 1월호)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3대 혁명 시인’이 된 이찬(1910~1974)은 그의 첫 친일시 ‘어서 너의 기타를 들어’에서 대동아를 백인으로부터 해방한다는 일본 군부의 역사 인식, 즉 ‘대동아공영권론’을 그대로 담아냈다.
전승(戰勝)의 깃발 나부끼는 다양한 하늘을 나의 날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
놓아다오 놓아다오 / 내 진정 날고 오노라 날고 오노라 //
불타는 적도 직하 무르녹는 야자수 그늘 올리브 바나나 파인애플 훈훈한 향기에 쌓인 //
그것은 자바라도 좋다 하와이라도 좋다 / 그것은 호주라도 좋다 난인(蘭印 :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이라도 좋다 //
나는 장군도 싫노라 총독도 싫노라 / 나는 다만 지극히 너의 친할 수 있는 한 개 에트랑제로 족하노니 //
깜둥이 나의 여인아 / 어서 너의 기타를 들어 //
미친 듯 정열에 뛰는 손끝이여 우는 듯 웃는 듯 다감한 / 음률이여 //
들려다오 마음껏-해방된 네 종족의 / 참으로 참으로 그 기쁜 노래를 //
오 오래인 인고에 헝클어진 네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쓰다듬으며 / 나도 아이처럼 즐거워 보련다 이웃 잔칫날처럼 즐거워 보련다.
- ‘어서 너의 기타를 들어’ (<조광> 1942년 6월호)
1942년 일제의 진주만 습격 1주년을 맞아 노천명(1911~1957)은 시 ‘흰 비둘기를 날려라’를 발표하여 일본군의 명복을 빌었다. ‘고운 처녀들’은 ‘꽃을 꺾어’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 일장기 위해 죽어간 일본군의 영령을 위로하는 것이다. [관련 글 :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추녀 끝 드높이 나부끼는
일장기ㅅ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
- ‘흰 비둘기를 날려’, <매일신보>(1942.12.8.)
소설가 장덕조(1914~2003)는 진주만 전투에서 사망한 9명의 특공대 이야기를 듣고서 수필 ‘출발하는 날’을 썼다. 이들은 미 함선 애리조나호를 침몰시킨 잠항정에 탑승했다가 숨져 대본영(大本營)에 의해 ‘9군신(九軍神)’이라는 전쟁영웅으로 미화된 병사였다. [관련 글 : 장덕조, 총후봉공 제일선에 섰던 역사소설가]
‘출발하는 날’(<매일신보> 1943.3.7.~10.)에서 장덕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결의와 결심”이 싹텄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그러나 부분 부분을 뜯어고쳐도 완전해지지 않을 때는 원형을 파괴해서라도 새로운 건설을 단행”해야 한다고 고백했다.
김소월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시인 안서(岸曙) 김억(1896~ ? )은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전사를 노래하며 일제 군부를 찬양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 공격을 입안하고 수행한 인물로 1943년, 솔로몬 제도를 시찰하다 미 육군 항공대에 격추되어 전사했다. [관련 글 : 안서(岸曙) 김억,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제독은 가셨으나 귀한 정신은
1억의 맘 골고루 밝혀
저 미영을 뚜드려 눕히일 것을
아아 원수 원수는 돌아가셨다.
원수의 높은 정신 본을 받아서
백배 천배 다시금 새 결심으로
새 동아의 빛나는 명일(明日)을 위해
일어나자 총후(銃後 : 후방)의 우리 1억들
저 미영이 무어냐 사악인 것을
- ‘아아 산본(山本) 원수―원수의 국장일을 당하여’, <매일신보>(1943.6.6.)
국내에서 친일부역 지식인들이 일본의 전승에 환호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는 12월 9일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관련 글 : 1941년 오늘-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하다) 그러나 독립은 아직도 멀리 있었다.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식민지 조선인의 삶을 옥죄어 왔다. 전쟁에서 수세에 내몰린 일제는 1944년부터 ‘조선인 학도 육군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를 시행, 강제동원에 나선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 동원한 징병과 징용피해 조선인은 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들은 일본 천황의 총알받이가 되어 이국의 전선에서 숨졌고, 사할린과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혹사당해야 했다. 그러나 역사는 더디지만 진전하고 있었다.
2018. 12.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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