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10년 12월 28일, 장태수 24일 단식으로 순국하다
1910년 12월 28일(음력 11월 27일) 수요일, 전북 김제 금구의 남강정사(南崗精舍)에서 일유재(一逌齋) 장태수(張泰秀, 1841∼1910) 선생이 예순아홉 살을 일기로 순국하였다. ‘불충과 불효한 죄를 죽음으로 씻는다’고 하며 단식에 든 지 24일 만이었다.
장태수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내부협판 장한두의 아들이다. 본관은 인동,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 1861년 약관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출사(出仕)한 이래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일유재, 24일 단식 끝에 순국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장태수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스로 남강거사(南岡居士)라 하고 은거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직후 일제가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자 예순셋에 그는 다시 관계로 나갔다.
장태수는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이 되어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의 처단을 상소하기도 했다. 다섯 해 뒤,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가 있는가(犬馬猶能懷主德 賊臣何忍賣君欺)”라고 하며 통곡하였다.
장태수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시 은둔에 들어갔다. 그는 의관을 정제하지 않고 지냈고 사람을 만나도 말하고 웃는 일이 없었다. 망국의 비극적 현실 앞에서 그는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것이었다.
일제는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이 매국(賣國)에 앞장선 결과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강제병합에 대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반발과 비협조가 이어지자, 일제는 이른바 ‘한일합방조약’ 직후 작위(爵位)와 은사금(恩賜金)으로 이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획책하는 데 이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일제는 병합에 협력한 왕족들과 관료들을 작위와 은사금으로 회유했다. 1910년 10월 7일 일제는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을 귀족으로 임명하고 수만 엔에서 수십만 엔에 이르는 은사금을 수여했다. (관련 글 : 후작에서 자작까지, 경술국치와 조선 귀족들)
그러나 더러운 매국(賣國)의 상급(賞給)으로 부와 권력을 이어간 반역자들의 반대편에는 망국의 치욕을 목숨을 끊어 항거한 자정(自靖) 순국 지사들이 있었다.
목숨 끊어 항거한 자정 순국지사들
경기 고양의 김석진(1843~1910)과 전남 구례의 황현(1855~1910)이 아편으로 자결했고, 충북 괴산의 홍범식(1871~1910)과 전북 전주의 정동식(1850~1910)은 목을 매었다. 이태 후, 경북 영양의 김도현(1852~1912)는 동해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거두었다. 경술국치 후 모두 쉰한 분의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일제의 침탈에 항거한 것이다.
일유재에게도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 받기를 강권했다. 그러나 그는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을 수 없다”라고 단호히 거부하고 헌병을 내쫓았다.
그러나 헌병들이 연이어 찾아와 은사금을 받으라는 위협을 계속하면서 세 아들을 잡아가고 그를 체포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조상의 사당에 통곡으로 고별하고 12월 4일 단식에 들어갔고 ‘고대한동포문(告大韓同胞文)’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내가 두 가지 죄를 지었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하나의 불충이요,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또 하나의 불효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린 순국 지사들의 죽음을 절망과 좌절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목숨과 자기표현을 맞바꾼 장엄한 선택으로 이해하는 게 마땅하다. 항거든 분노든 그것은 영혼을 위해 육체를 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정 순국, 실존적 결단의 장엄한 선택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실존적 결단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특정한 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분명한 결과를 위해 존재의 전부를 버리는 고독한 선택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그 방식이 어떠하든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독을 삼키든 목을 매든, 곡기를 끊든 어떤 방법도 더 가볍거나 수월하지 않다. 그중 단식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만찮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짧은 시간 안에 목숨이 끊어지는 다른 방법과 분명히 구분된다.
한편 그것은 단식에 든 이의 목숨이 사위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따라서 곡기를 끊어 순절하는 것은 본인의 확신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의 순종과 협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이다.
일유재는 곡기를 끊은 지 24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자식들이 부친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은사금으로 회유하려는 일제에 맞서 죽음으로써 그 부당성과 분노를 드러내고, 나라의 녹을 먹었던 선비로서 책임을 다했다.
불의와 국가적 위기에 맞닥뜨릴 때, 선비의 처신은 세 가지였다. 의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거의론(擧義論)’과 현실에서 물러나 은둔하며 도(道)를 지키는 ‘거수론(去守論)’, 그리고 목숨 바쳐 불의에 저항하는 ‘치명론(致命論)’이 그것이다.
한말 망국의 위기 앞에서 거의론은 의병항쟁으로, 거수론은 전통 한학의 전수를 통한 민족교육운동으로, 치명론은 의열(義烈) 투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의열 투쟁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국적(國賊)을 처단하거나, 침략 행위에 대해 항거하는 살신성인의 방략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침탈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침략에 항거한 자정(自靖) 순국(殉國) 투쟁도 의열 투쟁의 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자정 순국은 일제 강점기의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 등으로 이어져 가면서 독립운동의 주요한 투쟁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일유재가 순국한 뒤 3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조국은 광복되었다. 일유재뿐 아니라, 숱한 유·무명의 애국지사들이 광복의 제단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결과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일유재 장태수 선생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것은 1962년이다. 그가 순국한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의 남강정사는 전라북도기념물(1983)이 되었고, 집 안에 ‘일유재 장태수 선생사적비’가 세워졌다. 집 부근의 사당 서강사(西崗祠)에는 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2018. 12.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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