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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로 뜬 ‘한국어’ 낱말,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26개나 올랐다

by 낮달2018 202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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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영어 사전> 2021년 업데이트에서 한국어 기원 ‘표제어’ 26개 등재

▲ 옥서퍼드 영어 사전(OED)은 세계적 권위의 유서 깊은 영어 사전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한 것은 2021년 7월이다. 1964년에 설립된 유엔무역개발회의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를 변경한 나라는 한국이 처음이라고 한다. 일제의 수탈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찍이 겪지 못한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이 절대빈곤의 시대를 넘어선 게 1970년대다.

‘선진국’ 대한민국과 ‘한류’로 말미암은 ‘한국어의 확장’

그리고 반세기,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추었는데도 굳이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여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인들의 내면에 화인처럼 남은 절대빈곤 시대의 기억, 그 상처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진국’이란 개념은 우리의 의식에서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수도 있다.

2016년도에 퇴직 기념 여행으로 유럽 몇 개 나라를 돌아보니, 유명 관광지마다 한국인들이 넘쳤었다. 현지 상인들이 능숙한 우리말로 한국인들에게 호객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우리도 이제 해외여행을 다닐 만큼 먹고살 만해졌다고 생각했었다.

국제사회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의 반열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먹고살 만해졌다고 여긴 의식의 이면에 그런 객관적인 국가의 위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배경엔 ‘한류’가 전 세계로 확산하고 방탄소년단 등의 가수들이 지구인들의 갈채를 받으며,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칸영화제와 오스카상, 에미상을 받는 등의 일련의 문화적 위상의 급격한 향상이 있다.

이제 ‘케이(K)’로 시작되는 문화 현상은 영화,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음식이나 뷰티 등에서도 괄목할 진전을 이루었다. 이 역시 최근 몇 해 동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현상이다. 영국 런던에 한국 음식점이 급격히 늘었다던가, 영국 유수의 박물관에서 여는 ‘한류’ 전시가 매진을 거듭하는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 결과이다.

1884년부터 지난 8월까지 137년 동안 영국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이하 ‘OED’)>에 올라간 한국어 기원 단어는 총 23개였다. 그런데 지난해(2021) 9월 업데이트에서 한국어 기원 표제어 26개가 한꺼번에 추가된 배경도 마찬가지다.

OED는 세계적 권위의 유서 깊은 영어 사전이다. 11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영어권에서 사용되어 온 85만 개 이상 단어의 의미·발음·변천 과정을 담은 이 사전에 낱말이 등재되면 그것은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그만큼 등재의 조건과 절차가 까다로운 것이다.


이들 낱말이 OED에 오른 것은 해외 한류 팬들이 이끈 ‘한국어의 확장’에 힘입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6개 낱말 가운데 해외 한류 팬들 사이 인기가 높은 한국 대중문화와 관련된 어휘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 2021년 한국어 기원 표제어 26개 추가

1933년에 처음으로 옥스퍼드 사전에 오른 한국어는 ‘korean(코리안)’이다. 1976년에 ‘기생, 한글, 김치, 고누, 면, 막걸리’ 등 한국 고유의 낱말 6개가 올랐는데, 한글과 김치, 막걸리 같은 중립적 의미의 낱말과 함께 기생 같은 다소 부정적인 낱말이 함께였다. [아래 ‘과거 등재 목록’ 참조]

 

1982년에 오른 ‘시조, 태권도, 양반, 온돌’ 등은 역시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관련된 단어가 중심이었다. 2011년에는 ‘비빔밥’, 2015년에는 ‘소주, 웹툰’ 등 한국의 현실과 직접 연관된 단어들이 등재되기 시작했다. ‘k-팝, 고추장, 된장’(2016) 가운데 ‘고추장, 된장’은 전통적 단어가 아니라 현재의 한국 음식과 연관된 단어였다. ‘재벌’(2017)은 한국 경제의 부정적 측면을 이르는 단어고, ‘주체’(2019)는 북한에서 쓰이는 정치적 태도를 이르는 표현이었다.

지난해 등재된 표제어 26개는 최빈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발전한 한국을 포함, 이른바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의 현실 언어다. ‘반찬, 한복, 잡채, 불고기, 갈비, 동치미, 김밥’ 등은 1970년 이전에 인용된 낱말이지만, 한류가 퍼지면서 현재성을 획득했다. 단순히 극동의 조그만 나라의 음식이라는 ‘풍문’이 아니라 현재 영국인들이 일상에서 맛볼 수 있는 현실적인 언어가 된 것이다.

1990년 이후에 인용된 ‘삼겹살, 치맥, 먹방’ 따위는 그보다 훨씬 생생한 날것의 한국어다. ‘케이(K)-’나 ‘피시방, 파이팅, K-드라마’ 등은 확산한 한국 문화의 일단을 보여주고, 우리말 ‘한류(hallyu)’와 영어로 의역한 ‘한류(korean wave)’가 공존하는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적 의미망으로 쓰이게 된 ‘언니’와 ‘오빠’

눈여겨볼 단어는 ‘언니’와 ‘오빠’다. ‘누나’가 처음 쓰인 건 1955년, ‘오빠’는 1963년이고, ‘언니’는 1997년이다. 단순히 친족 간의 호칭어에 불과한 이들 낱말이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올랐다는 것은 한국어가 한국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들 단어가 혈연관계를 가리키는 말에서 벗어나 매우 사회적인 의미망으로 쓰인다는 점 때문이다.

 

다음은 OED에서 설명하고 있는 ‘oppa(오빠)’의 의미다. ①은 우리말 사전에서 설명하는 ‘오빠’와 별다를 게 없다. 그러나 ②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 ‘unni(언니)’와 ‘noona(누나)’도 ‘oppa(오빠)’와 마찬가지로 연상의 여자 형제뿐 아니라 애정 표현, 혹은 한국 대중문화 속 인기 배우나 가수를 지칭하는 단어로 소개된다. [참고 기사 : 한국에는 오빠가 있고 세계에는 ‘oppa’가 있다, <시사인> 739호(2021.11.18.) 이하 같음.]

① 여자아이나 성인 여성의 나이 많은 남자 형제. 존경하는 형태의 호칭 혹은 애정 용어, 또한 연상의 남성 친구 혹은 (연인 관계의) 남자친구와 관련된 의미로 확장돼 사용.
② 매력적인 한국 남자, 특히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배우 또는 가수.

‘chimaek(치맥)’은 한국어 사전에도 오르지 않은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낱말이다. ‘치(chi)’는 영어의 ‘치킨(chicken)’에서 ‘맥(maek)’은 한자어 ‘맥주(麥酒)’에서 가져왔다. OED는 이 낱말이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2013)로 한국 밖에서 대중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종교배’ 관련 글 : 불여튼튼에서 빼박캔트까지]

우리가 흔히 잘못 쓰고 있는 영어라는 뜻으로 쓰는 ‘konglish(콩글리시)’를 포함, 한국식 영어도 여러 개 등재되었다. ‘skinship(스킨십)’ ‘fighting(파이팅)’이 그것이다. 우리는 영어로 알고 쓰는 ‘스킨십’이나 ‘파이팅’도 ‘한국어에서 차용한 영어 단어’ 카테고리로 등재된 것이다.

▲ OED에서 설명하고 있는 'oppa(오빠)'의 의미는 ①은 국어사전의 낱말 뜻과 차이가 없으나 ②는 사전에도 없는 풀이다.

주간지 <시사인>은 지난해 OED에서 한국어를 추가하면서 인용한 한국어 낱말들의 용례가 영미권 문헌이 아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온·오프라인 텍스트에서 가려 뽑은 점을 주목한다. 필리핀·싱가포르 등 영어를 제2 모국어로 사용하는 영어 사용자들이 언어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여러 한국어 단어들을 영어의 세계 안에 편입하였다고 하면서.

한국어 확장을 바라보는 우리의 철학과 관점

앞으로,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더 활발하게 전 세계에 보급된다면, 이러한 한국어는 더 많은 다른 나라에서 독특한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시사인>에서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이 같은 한국어 확장을 바라보는 우리의 철학과 관점도 눈여겨보았다.

OED 한국어 추가 등재를 자문하였던 고려대 신지영 교수가 OED의 보도자료를 번역하여 한국 기자들에게 배포했는데, 뜻밖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신에서 이를 기사로 보도하자, 그제야 한국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부분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의 확장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디까지를 우리말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이들 낱말이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오르지 못한 현실과 관련하여 신지영 교수가 제기한 문제의식이다.

“‘치맥’, ‘대박’처럼 언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산된 단어들은 아직 국립국어원 사전에 못 올라갔다. 신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아직 너무 경직돼 있다. 이런 편견들이 영어권에서는 극복되었다. 우리말도 영어 못지않게 풍부하고 탄탄한 어휘장을 가지려면 순수 우리말에 대한 강박과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

 

 

2022. 12.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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