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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8월, 함께 창 앞에 서자

by 낮달2018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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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처서(處暑)로 가고

여름은 아직 한참 남았다. 장마 덕분에 더위는 오다가 문턱에 걸린 형국이었으나, 장마가 끝나면서 불볕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차피 절기는 제 갈 길을 간다. 8일이 입추, 14일이 말복이고, 23일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다.

 

더위도 한풀 꺾이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해 ‘처서’라는 이름을 얻은 이 절기 이후로 시간은 좀 빠르게 지나간다. 7·8월이 어정어정 또는 건들건들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는 ‘어정칠월 건들팔월’인 것이다.

 

예순한 돌 광복절

 

15일은 예순한 돌을 맞이하는 광복절이다. 작년에 회갑을 맞았으니 올해는 새로운 갑자(甲子)가 시작되는 해인 셈이다. 갑자가 돌아왔으나 여전히 조국의 분단은 끝나지 않았다. 북핵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정부는 조심스레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평화선언’을 뼈대로 하는 한반도 평화 체제 로드맵 작업에 들어갔다던가.

 

성래운 교수의 육성으로 장준하 선생의 ‘민족주의자의 길’을 다시 듣는다. 공교롭게도 선생은 8월에 나서(1918. 8. 27) 8월에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1975.8.17)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조차 ‘조사 불가능’으로 결정함으로써 30년이 지났지만, 그의 죽음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역사로 남게 되었다.

▲ 8.15 해방의 감격. 8월 16일 서울역 앞

무산된 ‘독수리 작전’

 

역사에서 가정이란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일인가. 소련이 한 주일쯤이라도 늦게 대일본 선전포고(1945. 8. 8)를 하였더라면,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8.6.)가 한 주일쯤 일렀더라면…….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선생이 광복군 장교로 OSS(미국 전략사무국) 훈련을 받고 참여한 국내진공작전이 무산된 점이다.

 

선생이 1944년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배속된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해방 직전, 임정과 김구 주석은 미국에 제주도 점령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승리를 얻는 일은 해방 이후 임정과 광복군의 위상과 관련해 매우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다. 임정은 끈질긴 노력 끝에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 CIA의 전신)와의 연합 작전에 합의한다.

 

이 작전의 이름은 마치 영화 같다. ‘독수리 작전’. 이를 위해 중국 서안에서 광복군은 3개월간의 특수 훈련을 받았다. 주로 학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특수공작 교육을 시행해 이들을 미군 잠수함을 이용해 한반도에 상륙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대원. ⓒ 장준하기념사업회

광복군 중위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 김준엽 등과 함께 이 훈련을 받았는데, 2001년 4월, 비밀 해제된 미군의 일급 비밀문서에서 ‘냅코 프로젝트’라는 OSS와의 또 다른 연합 작전이 구상되었음이 밝혀졌다.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카탈리나섬에서도 한반도 진공을 목표로 한인 요원들이 비밀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는 바로 이 훈련에 참여했던 박순동이란 이를 모델로 창조된 인물이다.

 

총사령관 지청천, 제2 지대장 이범석 등을 중심으로 비행대까지 편성했고 8월 13일이 한국 후방 상륙 D-데이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8월 9일 일본이 항복을 인정하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진공 작전에 대한 준비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 작전의 무산이 바로 미군이 임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등의 정치적 상황으로 전개되었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겠다. 8월 18일, 장준하는 이범석, 김준엽 등과 함께 여의도에 착륙했으나 일본군의 제지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석 달이 지나서야(11. 23)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는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 OSS 훈련 대원들과 함께한 이범석 장군(한가운데) ⓒ 장준하기념사업회

해방 이후 역사의 전개에서 장준하 선생의 삶은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위한 반독재 투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굴욕적 한일 협정에 대한 반대 투쟁 이후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으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재야 세력을 이끌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1975년 1월 8일 ‘박정희 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면서 민주 헌정의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그해 8월, 의문의 죽음으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한다. 향년 쉰일곱.

 

민족주의자의 길

 

광복군 출신의 이 열정적 민족주의자가 맞서 싸웠던 일본군 장교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는 거의 동년배인데,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도올 김용옥은 “장준하는 사선을 뚫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독립투사이며 반체제의 선봉, 박정희는 대일본제국의 육군 장교였고 여수·순천 항명 사건의 굴절을 겪으며 살아남은 사람.”으로 규정했다.

 

최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이 독재자의 딸은 “아버지 시대 본의 아니게 피해 당하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하며 선생의 유족을 만나기도 했다고 하니 세월은 무상하기도 하다.

 

‘민족주의자의 길’은 장준하의 통일관을 압축해 놓은 고갱이다. 국회에서 ‘통일이 국시’라는 발언으로 야당 국회의원이 제명되고, 구속된 때가 1986년이다. 장준하 선생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부르짖는다. 그는 “그것이 민족사의 발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할 때에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요, 진실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통일은 36년간 우리 민족이 싸워 온 질곡의 세월을 딛고 선 ‘해방의 완성’이다. 해방과 함께 이 땅에 그어진 아픔의 경계를 넘어 통일로 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해방을 새롭게 만나게 되리라.

▲ 신영복 선생의 글씨, '더불어 한길'

함께 창가에 서자

 

쇠귀 선생은 8월의 달력에서 ‘함께’를 이야기한다. “함께 한다는 것은 한 개의 나무 의자를 나누어 앉는 것이며 같은 창 앞에 서는 것이며 같은 언덕을 오르는 동반(同伴)”이라는 그의 지적은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그의 오래된 글과 다르지 않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連帶)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8월을 맞으며 다시 통일을 생각한다. 한 개의 나무 의자를 나누어 앉아, 같은 창 앞에 서서 함께 저 통일의 길을 바라보자. 사랑은 마주 보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2007. 7.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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