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목사들의 우중 시위에 부쳐
오늘 아침 <경향닷컴>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떴다. 제목도 눈길을 끈다. ‘보수 목사들 장대비 속 도로점거 왜?’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보수 목사의 모습은 하나같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거나 인공기를 불태우는 전투적인 모습과 분출하는 애국심을 가누며 ‘조국과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 말이다.
기사에 담긴 사진 속에 빗줄기 속에서 우의를 껴입고 구호를 써 붙인 노란 종이를 든 사람들이 차도 한쪽을 점거하고 있다. 어쩐지 그들이 낯익어 보이는 까닭은 앞서 말한 대로 서울역이나 서울광장 등에서 보여준 혁혁한 전공(?) 탓인지도 모르겠다.
기사에 따르면 이 목사들 300여 명은 어제 오후에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주변, 덕수궁 대한문과 플라자호텔 앞의 1개 차로를 점거(!)한 채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물론 경찰은 ‘공정하게’ 즉각 강제해산에 나서 목사 5명을 집시법 및 일반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연행했다고.
“원주민 쫓아내는 개발악법 철폐하라”
“주민 재이주 대책 마련하라”
이들이 외쳤다는 구호다. 얼핏 들으면 이들이 ‘용산 참사’ 등과 관련해 모종의 결의를 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개발악법이 원주민을 쫓아낸다든지, 주민 재이주 대책이 시원찮다는 것 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인 까닭이다. 지난 1월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재개발사업으로 생존을 위협받게 된 세입자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사고고, 이 사고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다.
이 목사들은 보수성향 단체인 ‘기독교사회책임’, ‘신도시·재개발지역 전국 교회연합’ 소속 목회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이 자신들의 성향과는 걸맞지 않은 생소한 구호를 외치며 기습시위에 나선 까닭은 “두 차례나 집회를 했는데 언론보도가 안 돼”서라고 한다. 시위를 주도한 서경석 목사의 발언이니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면서 도로를 점거하는 등의 기습적 시위를 벌이는 까닭을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던 듯하다. 이들이 법을 어기는 행위를 통해 여론의 주목을 받고자 했던 까닭은, 그러나 다른 데 있다. 재개발로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원주민의 아픔보다는 이 목회자들에게는 ‘제 코가 석 자’인 상태다.
도시 재개발로 인한 피해에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교회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다수의 구조적 문제인 도시 재개발 문제를 자기 문제를 통해서 인식하고 행동에 나선 이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좀 씁쓸하다. 용산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듯 재개발문제는 현재도 진행 중이니 말이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라는 속담을 떠올린 것은 그래서이다(북한에서는 “남의 등창은 제 여드름만 못하다.”라고 쓴다고 한다). 이는 용산 문제를 비롯해 도시 재개발 문제와 관련해 피해 서민들의 힘이 되어 주고 있는 천주교나 개신교의 활동과는 무관하게 이들의 ‘우중 시위’ 소식을 우울하게 훑어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9. 7. 15. 낮달
쓰고 나니까, 결과적으로는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을 ‘염병’으로 비유한 셈이 되어 송구스럽다. 그런 뜻은 전혀 없다. 자기 이해에 바쁜 보수 교단의 목사들이 재개발문제를 생뚱맞게 건드리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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