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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학교 뒷산을 오르다

by 낮달2018 2022.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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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대봉이라 부르는 뒷산

▲ 학교에서 바라본 뒷산. 가운데에 보이는 정자가 '구미정'이다.

교무실의 내 자리에 앉으면 학교 강당 뒤편에 바투 붙은 산기슭이 보인다.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 산마루에는 정자 하나가 올라앉았다. 첫 출근 때부터 한번 오르리라고 별렀지만, 좀체 짬이 나지 않았다. 주당 꽉 찬 스물다섯 시간, 두 시간을 달아서 쉬는 시간도 거의 없는 탓이다.

 

“저 산, 이름이 뭐지요?”

“글쎄요……, 그냥 ‘뒷산’이라고 하지요.”

“얼마나 걸리지요?”

“1시간이면 됩니다. 괜찮은 산입니다.”

 

산 이름을 물으니 당혹스러워한다. 간단히 ‘뒷산’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건 워낙 나지막한 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사는 동네의 뒷산인 북봉산이나 인근 원호리 부근의 접성산 줄기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자리에 이 산은 솟아 있다.

 

아이들 동아리 활동 두 시간이 든 수요일에 날을 잡았다. 아예 가볍게 입고 출근을 했고, 5교시 수업을 마치고 바로 산에 올랐다. 전임 학교는 교사를 나서면 바로 산어귀였지만 여기는 다르다. 교문을 나서 길게 이어진 담을 한 바퀴 빙 돌아나가야 한다.

 

산어귀에서 잠깐 헷갈려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곧장 올라가란다. 산 아래 배수로 옆으로 산당화가 현란하게 피어 있었다. 나는 ‘명자나무’라는 본 이름보다는 별명 격인 ‘산당화(山棠花)’가 마음에 든다. 바닷가에 ‘해당화’가 있다면 뭍에는 ‘산당화’가 있는 것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등산로 안내판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이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는 ‘깃대봉’인 모양이다. 그럼 이 산을 ‘깃대봉’이라 부르면 될까. 몇 번 곱씹어 보았지만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건 봉우리 이름이지 산의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깃대봉은 내 목적지인 정자와 반대쪽에 있다. 산 중턱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자 군데군데 무덤들이 나오고 구부정한 솔숲이 이어진다. 아직 산 전체가 신록으로 물들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솔숲의 푸른빛이 메마른 산빛에 윤기를 더한다.

 

옛 성황당처럼 쌓아 올린 돌무더기를 지나자, 이내 부드러운 굽이의 산등성이다. 거기서부터 길은 넓어지고 물매도 넉넉해진다. 한 오 분쯤 지나자, 정자가 나타났다. 구미정(龜尾亭). 정자 이름치고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단청공사를 한 듯 정자 입구는 ‘20일부터 쓸 수 있다’라는 표지판을 단 채 널빤지로 막혀 있었다.

 

뒤편의 빗돌에 따르면 이 팔각지붕의 정자는 1999년에 세워졌다. 시장과 무슨 위원장 등 거기 힘을 모았다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빗돌 너머 시가지가 아련하게 보였다. 산이 높지도, 날씨가 그리 흐리지도 않은데도 시가지가 흐릿하게 보이는 건 탁한 공기 탓일까.

 

42만의 도시라지만 여전히 구미는 도농복합형이다. 오른편 아파트가 밀집한 시가지는 도회의 면모를 풍기지만 왼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고아읍의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 것이다. 도시 한복판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지나간다. 70년대 초반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만 해도 그곳은 외곽이었지만 지금은 어느덧 도심이 되어 버렸다. 불과 30년 뒤를 내다보지 못한 결과다.

 

정자에 오르면 시가지가 더 분명하게 보일까. 주변에 늦은 벚꽃이 피어 있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서둘러 하산한다. 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길과는 다른 샛길을 선택했다. 좀 가파르고 좁은 길이다. 소나무 사이로 눈록빛 새잎이 부시고 아련했다.

▲ 구미정에서 바라본 고아읍 들 . 구미는 아직 도농복합형의 도시일 뿐이다 .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 70년대엔 외곽이었지만 오른편으로 도시가 들어서게 되었다 .
▲ 명자나무 봉오리는 아주 독특하다 . 아직 잎을 열지 않은 봉오리는 마치 경단 같아 보인다 .

하산은 금방이다. 시계를 보니 한 50분쯤 걸렸다. 느긋하게 올랐으니 조금만 서두르면 40분쯤으로 산을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 얼마나 자주 올 수 있을까. 워낙 짧은 길이라 산행이라 하기보단 산책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한길 학교 담벼락에 능소화가 어지러이 새순을 피워내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새잎이 나올 것 같지 않았던 묵은 가지에 새잎이 거짓말처럼 달려 있다. 능소화가 피면 학교 담벼락은 온통 주황빛 꽃의 향연이 펼쳐질 테지만, 아직 그것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2012. 4.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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