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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특별한 형제들’이 건너온 한국 근현대사

by 낮달2018 2022.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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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종현 지음, ‘특별한 형제들’

▲< 특별한 형제들 >, 정종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 ⓒ 정종현

정종현 교수의 <특별한 형제들>은 그가 2019년에 펴냈던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을 준비하며 접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극적인 삶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서 비롯되었다.

 

제국대학 유학생들에 관한 관심은 식민과 분단, 전쟁과 냉전으로 전개된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를 헤쳐온 인물들로 이어졌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형제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함께 나고 자랐지만, “역사의 갈림길에서 때로는 비슷하게, 때로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형제들의 삶이야말로 한국 근대의 속살을 드러내는 이야기”(출판사 책 소개, 아래 같음)였기 때문이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엇갈린 형제들의 삶

 

책의 부제는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을 넘나드는 근현대 형제 열전’이다. 부제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식민과 해방, 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산 특별한 형제들의 한국 근현대사”다.

 

저자가 우리 근현대사에서 소환한 ‘특별한 형제’는 모두 13쌍이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와 서울대학교 교수, 검찰총장과 남로당원, 공산당 부역자와 ‘애국가’ 작곡가, 이들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지만, 저마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전혀 다른 삶을 선택했다.

 

그 맞은편에는 식민지 해방과 혁명 전선에 함께 뛰어든 혁명가 형제와 남매들, ‘민족’과 ‘매판(買辦)’의 경계에 선 식민지 조선의 기업인 형제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처단 대상에 이름을 올린 매국노와 밀정 형제가 있다. 여기에 피가 아니라 ‘신념’을 나누어 뜨겁게 연대한 ‘의형제’들도 있다.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식민지 역사와 분단’이다. 이 두 가지 비극의 서사는 이 책에 불려 나온 13쌍의 형제·남매들에게도 겹친다. 김일성대학 창설을 주도한 정두현(1888~?)과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 정광현(1902~1980)은 서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상대 진영에서 성공한 형제’의 존재를 지워야만 했던 형제였다.

 

‘식민지 역사’와 ‘분단’과 싸워온 형제들

 

1923년 일본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이래, 식민지 관리로 출세하는 대신 조선인 ‘사상 사건’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한 이인(1896~1979)의 동생 이철(1917~1950)은 사회주의자였다.

 

해방 후 미군정 검찰총장을 역임하고 초대 법무부 장관을 거쳐 제헌 국회의원이 된 형은 ‘남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구속된 아우를 구하기 위해 담당 검사 오제도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 것이다. 결국 이철은 서울 수복 뒤 인민군의 퇴각 때 월북하다가 사살되었다.

 

‘애국가’의 작곡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훈장을 받은 안익태(1906~1965)의 형 안익조(1903~1950)는 동경제대를 나와 일제강점기에 주로 문화기획자로 일했다. ‘에키타이 안’으로 일제에 협력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미래를 열어가려 했던 안익태와 1939년부터 2년간 만주군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안익조는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그러나 안익조는 한국전쟁 중 헌병 장교로 근무하다 서울에 낙오, 인민군에 협조한 부역 혐의로 부인과 함께 총살되었다.

 

일제에 부역하여 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형제로는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1856~1914)의 두 아들 유만겸(1889~1944)과 유억겸(1896~1947)이 있다. 각각 동경제대 출신으로 중추원 참의, 충북 도지사를 지낸 만겸과 교육자의 길을 간 억겸은 작위를 거부한 개화주의자 부친과는 달리 결국은 친일 협력을 선택했다.

 

지은이는 ‘친일파’ 또는 ‘빨갱이’로 ‘낙인’ 찍어서 배제되는 역사적 전개에서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삶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이라는 단선적 인물 평가”를 넘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상황 변수의 참작’으로 ‘실체적 삶의 진실’이 얼마나 밝혀질 수 있을지는 비관적이다.

 

<동아일보>의 김성수(1891~1955)와 경성방직의 김연수(1896~1979)를 저자는 근대 한국의 ‘인플루언서’로 비유했다. 친일 행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근대 전환기의 ‘셀럽’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창출했다는 의미였다.

 

둘은 어쨌든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의 배경은 상속된 자산이었다. 이들이 이룬 기업과 학교의 발전에 공이 크다고 해서 그 소유와 영향력이 세습되는 것은 타당한 것이냐고 저자는 묻는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조선 귀족

 

그가 불러낸 형제들 가운데 조선 귀족 민태곤(1917~1944)과 민태윤 형제는 가장 의외의 인물이다. 강제합병 당시 작위를 받은 76명에 작위를 계승한 자를 더해 총 158명의 조선 귀족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이 민태곤이다.

 

형제는 남작 민종묵의 증손자로 태어나 4대째 작위를 세습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도호쿠(東北) 제국대학 졸업과 동시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이 내정되어 있었는데, 친일의 꽃길 대신 독립운동을 선택, 1941년 ‘도호쿠 제국대학 조선 민족 독립운동그룹’의 성원으로 체포되었다.

 

1년 5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혹독한 취조와 수형 생활로 폐가 망가진 그는 1944년 11월 사망했다. 민태곤은 2009년 뒤늦게나마 서훈을 받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우 민태윤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아우는 형의 독립운동 자료를 찾으려고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법무대신, 대법원 등에 자료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끝에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 「 육십단체연합장 고 ( 故 ) 김사국씨 영결식 」 , 『 시대일보 』 1926. 5. 13.

한편, 저자는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개척한 김사국(1892~1926)·김사민(1898~?)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주요하게 다룬다. 김사국은 국내에서 대중조직을 주도한 서울파의 리더로 조선공산당 통합 협상에서 화요파가 끝내 제외해 달라고 요구할 만큼 거물이었고, 조선총독부에서는 사후 1년이 지나도 국내외 각지에서 이어진 김사국 추도회를 경계해야만 했다.

 

‘백마 탄 여장군’과 매국적·창귀

 

사회주의운동의 가장 뛰어난 조직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형선(1904~1950), 이른바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 다르크’로 불린 김명시(1907~1949)·김명윤(생몰년 미상) 3남매도 조선의 독립을 열망한 혁명가였지만, 해방 조국에서 ‘빨갱이’로 조롱당하며 비극적 최후를 마쳐야 했다.

 

이 밖에도 혁명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오기만(1905~1937)·오기영(1909~?)·오기옥(1919~1950?) 3형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과 대비되는 존재로 흔히 ‘매국적(賣國賊)’ ‘창귀(倀鬼 : 밀정·형사)’로 불린 선우순(1891~1933)·선우갑(1893~?) 형제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회의하게 할 만큼 극단적이다. 선우순은 사이토 총독의 고급 정탐 노릇을 했고, 선우갑은 동아시아를 넘나든 밀정이었다.

 

한편 지은이는 사회주의 활동가 임택재(1912~1939)와 그의 누이 임순득(1916~?)을 젠더(gender)화된 한국 문학사와 함께, “‘암흑기’로 명명되며 삭제되었던 식민지 말기 일본어로 이루어진 한국문학을 다시금 사유하도록 요구”하는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1934년 조선반제동맹 운동을 주도한 임택재는 구속되었다가 전향해 풀려났으나 1939년 스물여덟 한창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시를 여러 편 남겼는데, 누이 임순득도 소설을 쓰다가 1940년대에 일본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는 임순득의 작품을 예시로 일본어로 쓴 작품들은 무조건 ‘친일 문학’으로 취급하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영국 식민지에서 피식민지의 영어 글쓰기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했음을 환기하면서.

 

‘디아스포라 청년 시인’이라며 윤동주와 같은 연배의 북간도 시인 심연수를 불러낸 데 이어 저자는 북한의 개인 숭배를 비판하고 소련으로 망명한 유학생 8명의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한다. 1980년대 일본에서 간행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 서적의 저자인 임은(林隱)은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웅배(1928~1997)였다.

▲1956년 11월 국립영화대학교 기숙사 앞. 왼쪽부터 정린구, 김순자, 허웅배(허진), 한대용(한진), 리경진(리진), 김종훈, 리진황

그는 소련 국립영화학교로 유학했지만, 흐루쇼프의 개인숭배 비판 이후, 조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숭배를 비판한 뒤에 결국은 소련에 망명했다. 이후, 영화학교 동료 유학생들도 뜻을 같이해 결국 모두 7명이 뒤따라 망명했다.

 

소련으로 망명한 ‘8진’ 형제들

 

이들 혈연을 넘어선 ‘이상의 형제’는 허웅배의 제안대로 모두 ‘진(眞)’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하고 소련에서 교수, 감독, 극작가, 촬영기사 등으로 자기 삶을 꾸려갔다. 그들은 조국이 ‘합리성’을 회복하면 소련에서 습득한 지식을 인민의 이익에 보답하기 위해 기꺼이 귀국하겠다고 밝혔었지만, 끝내 아무도 돌아가지 못했다.

 

저자는 민족이나 국가, 사회 등 공동체의 연대를 ‘형제애’로 표상하곤 한다면서도 이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배제하는 폭력으로도 작동함을 환기한다. 또 “이 책에 등장하는 13쌍의 형제들은 이분법적인 가르기와 낙인이 낳은 비극, 형제로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지독한 배제”를 드러낸다면서 오늘의 한국 사회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의미의 ‘형제애’를 묻고 있다.

 

저자의 기대대로 “극심한 진영 논리, 심화한 불평등과 혐오의 시대를 건널 지혜를 이 ‘특별한’ 형제들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까.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형제·자매애와 연대를 통해 개방적인 관용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2022. 3.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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