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의 ‘갈대 등본’과 ‘소사 가는 길, 잠시’
새로 만난 시인으로 안현미와 손택수에 관한 글을 썼다. 검색으로 그들의 대표작은 물론이거니와 이런저런 소소한 정보들도 금방 ‘긁어’ 올 수 있으니 인터넷 시대는 참 편리하다. 그들의 시집을 따로 읽지 않고 그들에 대해 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인터넷의 힘이다.
안현미에 이어 쓸 시인으로 나는 손택수, 신용목을 일찌감치 정해 두었다. 안현미와 손택수의 시집 <곰곰>과 <목련 전차>와 함께 신용목의 시집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를 받은 것은 지난 2월 25일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까지 나는 그 시집을 열어보지 못했다.
시집이란 게 그렇다. 조바심으로 기다리던 연재소설도 아니니 서둘러 펼 일도 없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잡듯이 읽어 내려갈 일도 없다. 짬 나면 잠깐씩 들여다보고, 마음에 아려오는 시가 있으면 여러 번 읽고 마음에 쟁여 두는 것……. 나는 당연히 그렇게 시를 읽는다.
소설도 그렇지만 시는 읽을 때는 그에 걸맞은 정서적 준비가 필요하다. 주위의 소란이나 몰입에 방해가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두서없는 생활에서 그런 시간을 내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예의 시집들이 내 서가에서 잠자고 있었던 이유다.
신용목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전적으로 문태준이 엮은 시집을 통해서였다. 거기서 나는 ‘소사 가는 길, 잠시’를 읽었다. 나는 30대 초반인 시인의 육성으로는 다소 노숙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젊은 시인의 지나치게 노회한 시선은 나이 든 시인의 넘치는 발랄만큼이나 민망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여행길의 기억을 옮긴 이 시는 아무 저항 없이 내게 다가왔다. 신호에 걸린 버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젊은 시인, 건너편 다방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 그 속에 손톱을 다듬는 여자, 위층은 기원, 그 위는 한 줄의 비행운. 마찬가지 경로로 자신이 여자의 얼굴 속에 있음을 확인하면서 시인은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 있었다
‘당신과 나는’이라고 쓰면서 잠시 휴지(休止). 그 반점(,)을 찍으면서 시인은 그 일순의 동행과 만남, 혹은 교차를 한 편의 시로 매듭짓는다. 그게 시인인 모양이다. 우리의 일상이라면 무심코 지나칠 장면을 시인은 허수로이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인터넷에서 그의 시 몇 편을 서둘러 받았다. 제일 먼저 내려받은 시가 ‘갈대 등본’이었다. 등본(謄本)은 물론 우리가 동회에서 발급받는 서류를 이르는 말이다. 갈대 등본이라, 나는 그 감각이 썩 마음에 들었다.
동료 시인 박형준은 신용목을 ‘바람 교도(敎徒)’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의 시에서 ‘바람’이 빈번히 쓰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양한 의미들로 변주된다는 뜻이겠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이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인 것도 같은 이유일 터이다.
화자는 바람 부는 염전을 건너간다. 그 들녘에는 ‘바람이 부리는 노복(奴僕)’ 갈대가 남루한 몸을 흔들고 있다. 그 빈 둑을 걸으며 화자는 갈대 사이로 ‘통증처럼 내뱉는’ 새 떼를 바라본다. 그 새 떼는 마치 부러진 화살촉처럼 허공에 점점이 박혀 있다.
그리고 그는 화살을 걸었던 ‘깊은 날’의 ‘석양’을 아프게 기억한다. 그 바람의 지층에 화석으로 남는 저녁이다. 그것은 그의 가족사의 어떤 부분인 듯하다. 그 등본의 한 편에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 아버지가 있다. 아비의 시린 뼛속 가득한 바람, 그는 그 바람 속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시에 빈번히 등장해 깊숙한 은유를 드리우고 있는 ‘바람’의 뜻을 새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치 눈먼 이 코끼리 만지듯 한 내 새김질은 거기까지다. 시집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 안에 현란하게 교직된 비유와 상징 앞에 나는 기가 질려 버리고 말았다.
시집에 붙은 해설을 읽어봐도 요령부득한 것은 마찬가지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슬그머니 시집을 밀어놓았다. 기를 쓰고 그 말의 비의(秘意)를 캐어 보지 못할 일은 아니로되, 나는 그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무명의 독자로서 내 아둔함은 용서받을 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다.
나는 어려운 시가 나쁜 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쉬운 시의 가치만큼 어려운 시도 나름의 뜻과 울림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인이 ‘뼈를 깎는 고통’으로 시를 썼다 해서 평범한 독자들이 같은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어떤 시가 독자에게 쉬 다가가지 못한다면 그 책임의 반은 시인의 몫이 아니겠는가. 시를 쓰는 일이 외계의 언어로 3차원의 세계를 노래하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 세계를 두고 이루어지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소통이라면 말이다.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는 두고두고 읽어볼 작정이다. 한 번, 두 번, 호명할 때마다 그의 시어와 세계는 새롭게 내 안에서 일상의 언어로 풀어질 수 있을는지……. 이리저리 시집을 뒤적이면서 이쯤에서 시시껄렁한 얘기는 접기로 한다.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아시는 분들의 너그러운 용서를 구한다.
2009. 3.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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