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PD수첩 제작진 지음 <응답하라! PD수첩>
2008년 이후, 이른바 ‘PD수첩’ 사태로부터 시작된 <문화방송(MBC)>, 혹은 ‘PD수첩’의 만만찮은 수난사는 MB정부 출범 이후 시민들이 감당해야 했던 이런저런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험들과 닮아 있다.
닮은꼴 ‘MB 정부’와 ‘MBC’
아니, 더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정권교체를 바라보는 진보 개혁진영의 시각과 권력에 의해 선택된 새 사장을 맞이하는 구성원들의 관점은 대동소이했던 것 같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 사람들은 대부분 국민의 정부 이래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던 민주주의와 인권의 형식과 내용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일관되게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비록 보수적인 우파의 집권이긴 하지만 역사와 진보의 추세를 거스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전망이 무너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MB정부 5년 동안 전임 정부에서 이룬 변화는 완전히 ‘형해화’되었다.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 인권 등 온갖 영역에서 역사적 퇴행이 간단없이 전개되었다.
순식간에 한국 사회는 2, 30년 전으로 퇴행했다. 권력 주변에서 초헌법적인 민간인 사찰에 태연하게 저질러질 수 있을 만큼 내부에 자정능력이나 성찰이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MB 정부의 특징이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렇게 가정해 보자. 당신은 역사가 깊고 조직원이 1,500명에 가까운 거대기업에 속한 조직원이다. 그리고 이 기업은 사기업이 아니라 ‘공영’의 기치를 내걸고 정부의 영향권 아래 있는 조직이다. 당신이 속해 있는 부서는 회사에서도 공영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곳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회사가 열심히 일하는 당신의 업무와 거취를 보장해 줄 여지가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건 상식이다. 불행히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과 친한 사이라는 사람이 기업의 새로운 리더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당신은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이 정도 회사라면 한 명의 오판을 견제하고 바로잡아줄 구조가 당연히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은 까닭이다.
당신의 믿음은 곧 순진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장이 바뀐 후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열띤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당신의 일에 대해 ‘시선이 뼈딱하다’라는 식의 비판을 한다. 무엇이 삐딱한지 알 수 없으나 회사는 당신의 아이디어와 기획을 철저히 무시한다. 견디다 못한 당신은 반항하고 소리도 질러보지만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는다. 당신의 권한은 형편없이 축소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회사에 입사한 후 계속해 오던 업무를 빼앗기고 난생처음 해보는 새로운 부서에 발령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그래도 MBC인데, 그래도 인데’라고 믿고 을 지켜내려고 했던 <MBC>의 PD들이 지난해부터 겪어온 일이다. 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과정의 시발점이 된 ‘평판이 좋지 않은 사장’은 대체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 사건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응답하라! PD수첩> 중에서
<MBC> 역시 마찬가지였다. MB 특보 출신의 사장이 온다고 했을 때 <MBC>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방송 민주화’ 투쟁의 과정을 통해 가꾸어 온 시스템이 단지 새 사장의 뜻대로 움직여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순진한 것’으로 밝혀졌다.
<MBC>에서 벌어진 막장드라마
MB 특보 출신의 사장에게 접수(!)된 이후 벌어진 <MBC>의 변화는 아는 대로다. 열 명 이상이 해고되었고 정직 등 징계와 보복성 교육 발령과 함께 파업 참가자들의 상당수는 현장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한 기자가 사내 게시망에 김재철 사장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게 문제가 돼 ‘사내 질서 문란’으로 정직 6개월, 인사평가 R등급을 세 차례 받은 이유로 정직 1개월에 교육 2개월을 추가로 받았다.
자신이 문제의 개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청자도 괴롭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청자가 관전자 입장일 수는 없다. 시청자들은 <MBC>에서 연출되는 이 희대의 막장드라마를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온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서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의 변화를 이끌어온 시민들이 MB 정부의 전횡과 막무가내 앞에서 넋을 잃었듯 공영방송 <MBC>가 연출하는 그 파국적 막장드라마 앞에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MBC>라는 공영방송사에서 사장의 교체만으로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단 한 사람의 권력이 지난 세월 동안 구성원들이 힘들여 싸워 얻은 민주화의 과실을 무력화해 버릴 수 있는가. 도대체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한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으로 뭉쳐 싸워도 권력과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몇 명의 하수인들을 어쩌지 못하는가.
유례없는 170일간의 파업도, 정치권과의 연대도 이 권력관계를 바꾸지 못했다. 백전백패의 현실 앞에서 결기를 가다듬고 전의를 불태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패배의 경험은 결기와 전의조차 꺾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정국의 변화를 기대했지만, 지난해 총선도 여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끊임없이 노동조합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정권의 비호라는 철옹성에 들어앉은 사장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PD수첩’ 제작진이 펴낸 책이 <응답하라! PD수첩>이다.
예의 순진한 믿음에서 깨어나면서 ‘PD수첩’은 ‘피떡이 되’었다. 경영진에 의해 ‘PD수첩’에 가해진 폭력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기획안이 찢기’고 ‘사무실 안에 10여 대의 CCTV가 돌아’가고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을 뒤진다’로 요약된다.
‘PD수첩’의 PD들을 강제로 발령내고 PD가 사전 조사를 통해 선정한 아이템들은 국장의 한마디에 막히는, 편집권이라는 미명의 검열과 통제가 일상화된다. 그렇게 해서 불방되거나 막힌 아이템은 ‘여의도 1번지 사모님들’, ‘MB의 무릎 기도’, ‘2011 남북경협 중단 문제’, ‘제주 7대 경관 선정 문제’, ‘강정마을 해군 기지 문제’, ‘한명숙 전 총리 뇌물수수 사건’, ‘삼성 노동자 백혈병 사망’,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 의혹’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2011년 11월에 ‘한진중공업과 김진숙 위원’ 아이템이 뜻밖에 승낙을 받았다 싶었는데 이는 10분 만에 번복되었다. 새로 온 PD가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낸 승낙이었기 때문이다. 이 거절의 사유는 단연 토픽감이다.
“김진숙이라는 사람의 직업이 원래 그런 것이다. 그 사람은 진정성이라는 건 없고, 그냥 크레인 올라가서 시위하는 게 직업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걸 방송하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아줌마 하나 크레인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거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시청률도 안 나올뿐더러 사회적으로 아무런 반향도 없다. 아무 소용없다. 그리고 내가 OK를 해도 윗선에서 안 되게 할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MBC>는 경쟁력을 잃어갔고 ‘PD수첩’은 상처받았고, PD들은 절망했다. 그들은 업무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과 스트레스로 마음을 앓아야 했고, 그러면서 프로그램으로부터 배제되어갔다. PD들은 ‘적들과 공존’하며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망가져 갔다.
“과연 우리는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 바로 눈앞에 있는 팀장과 싸우는 것인가. 아니면 국장과 싸우는 것인가, 더 나아가 사장과 싸우는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존재와 싸우는 것인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정말 그 상황이 너무 힘든 거죠.”
그러나 ‘통제 속에서도 탐사보도는 계속되’었다. ‘용산참사’에 대한 특종 보도와 ‘4대강, 수심 6m의 비밀을 찾아서’ 등이 그것이다. ‘4대강…’은 온갖 노회한 회사 쪽의 요구를 적당히 돌려가며 만들었지만, 제때 방영되지 못했다. 국토해양부가 낸 ‘방송금지 가처분’도 넘었지만, 회사 경영진에 걸렸다. 결국 프로그램은 시민들의 촛불 등에 힘입어 1주일 뒤에 방송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검사와 스폰서’ 같은 특종의 제작 뒷이야기는 이 책이 제공하는 덤이다. 권력의 하수인이 <MBC>를 장악하게 한, 온갖 탄압과 전횡의 원인이 되었던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방송’과 ‘법정투쟁’의 기록은 MB정부 5년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방송사를 왜곡하고 있는가를 웅변하는 객관적 기록이다.
우리는 모두 ‘PD수첩’에 빚지고 있다
이 책을 굳이 사 읽게 된 것은 일종의 부채 의식 때문이다. 깨어 있는 시청자 가운데 “20여 년간 진실과 정의, 상식과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누벼온 ‘우리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 ”에 빚지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단순히 반복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기왕에 알고 있는 사태가 ‘포괄적’인 그림이라면 이 책은 그것의 전후, 그 갈피마다 서린 PD들의 땀과 한숨과 좌절까지 기록한 세밀화다.
‘이명박 정부 PD수첩 주요 프로그램 일지’까지 포함하여 359면의 만만찮은 부피 속에 쟁여놓은 건 ‘PD수첩에 가해진 폭력과 저항의 기록’이다. 책을 읽는 동안 가슴 속에 뭉게뭉게 일어나는 분노와 절망이 <MBC>와 ‘PD수첩’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무명의 시청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고 ‘PD수첩’은 물었지만 이제 시청자들은 ‘이 모든 것들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로 되물어야 한다. 물론 그 전망은 썩 밝지 않다. 최악의 경우, 5년 후 정권교체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가, 2013년의 한국 사회, 그리고 한국 방송 언론이 서 있는 지점이라는 데서부터 우리는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2013. 3.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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