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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사자성어는 “도둑 잡을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됐다”

by 낮달2018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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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전용 정착으로 ‘올해의 사자성어’도 빛이 바래고 있다

▲ 교수신문의 '2021 올해의 사자성어'는 '묘서동처'로 선정되었다 .

<교수신문>이 선정해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 기사를 읽으면서 세밑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한 해의 간단치 않은 곡절을 네 글자의 한자어로 줄이는 이 기획의 역사는 마침내 20년을 넘겼다. 복잡다단한 한 해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네 자로 줄이는 게 가당찮다는 반론도 있지만, ‘올해의 사자성어’가 화제가 되는 것은 이 말이 머금고 있는 뜻이 예사롭지 않아서다.

 

‘2021 올해의 사자성어’는 ‘묘서동처(猫鼠同處)’

 

올해의 사자성어는 후보 18개 가운데 예비심사단 심사와 전국 교수 설문 조사를 거쳐서 ‘묘서동처(猫鼠同處)’가 선정됐다. 묘서동처는 교수 514명(29.2%)의 추천을 받아 인곤마핍(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 피곤함, 371표·21.1%), 이전투구(진흙밭에서 싸우는 개, 299표·17%), 각주구검(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음, 251표·14.3%) 등을 눌렀다.

 

묘서동처는 “‘고양이와 쥐가 자리(處)를 함께한다(同)’, 또는 ‘고양이와 쥐가 함께(同) 있다(處)’”(추천자 최재목)는 뜻이니 “도둑 잡을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됐다”라는 의미다. 그것은 올해 세계에서 크게 호응받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이 상징하듯 혼란과 모순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를 빗댄 것이다. (관련 기사)

 

이 낱말은 중국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온다고 한다. 곡식을 훔쳐 먹는 쥐와 쥐를 잡는 고양이는 서로 원수 간이다. 그런데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최재목 교수(영남대)는 <구당서>에는 실린 조금 다른 얘기도 소개했다.

 

“낙주(洛州)의 조귀(趙貴)라는 사람 집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해치지 않는 일이 생겼다. 그의 상관이 쥐와 고양이를 임금에게 바쳤다. 그러자 정부의 관리들이 상서로운 일이라며 난리였다. 오직 최우보(崔佑甫)란 사람만이 “이것들이 실성(失性)하였다.” 즉 ’제 본성을 잃었다(=미쳤다)‘고 바른 소리를 하였다. 도둑을 잡는 자가 도둑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을 직시한 것이다.”

최 교수는 추천의 글에서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이 묘서동처 격이라면, 한 마디로 막 나가는 이판사판의 나라이다. 기본적으로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은 케이크를 취해선 안 된다. 케이크도 자르고 취하기도 하는 꼴, 묘서동처의 현실을 올 한해 사회 곳곳 여러 사태에서 목도하고 말았다. 슬프다. 공정과 정의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라고 썼다.

 

낯설고 단박에 뜻이 짚이지 않는 사자성어

 

이 성어가 가리키는 것은 2021년의 한국 정치판일 터,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인지는 따로 나눌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교수신문> 누리집을 찾아 관련 기사를 읽고 나서도 나는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 사자성어도 낯설었고, 그게 가리키는 바가 두루뭉술하여 단박에 뜻이 짚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들에게 이 성어의 유래를 알리지 않고 밖으로 드러난 뜻만 알려주면, 어떤 답이 나올까. 혹시 “쥐는 고양이에게 금방 잡아먹히겠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 건 누워서 떡 먹기”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일부러 누리집을 찾아가 기사를 읽어야 할 만큼 ‘올해의 사자성어’는 일반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의 고사에서 마침맞은 사자성어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 비슷한 말을 찾아서 현실에 빗대는 일이 그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런 조짐은 지난해에 ‘내로남불’을 한문으로 옮긴 신조어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하며 드러나기 시작한 듯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구절을 간단히 줄인 이 말의 속뜻을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성어로 대체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낯설어지는 사자성어, ‘한문의 벽’

 

2001년부터 시작된 ‘올해의 사자성어’는 한때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한 해의 우리 사회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었었다. 첫 3년 동안은 사람들과 친숙한 고사성어로 상당한 호응을 받았지만, 해가 갈수록 사자성어는 낯설어졌다. 이에 알 만한 이들만 돌려보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아냥도 일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이제 천천히 멀어지는 듯하다.('역대 사자성어' 참조)

새해에 선정하는 ‘희망의 사자성어’도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발표되었다. 그러나 2016년과 2017년에는 ‘희망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한글 시가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을 선정하는 형태로 바뀌었다가 이 역시 2018년부터 폐지되었다.

 

일반인에게 낯설기만 한 사자성어로 우리 사회를 비유하는 것은 쉽게 수용되기 어렵다. 자신도 모르는 비유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말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또, 인용 고서의 범위를 넓힌다고 하더라도 해도 거기서 고를 수 있는 사자성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부 국한문 혼용론자들은 “그래서 한자를 배워야 한다”라면서 부르댈지 모르지만, 이는 오히려 한때 우리 사회를 압축 상징해 준 ‘올해의 사자성어’는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그들은 훈으로 낱말 뜻을 알 수 있는 한자를 배우면 어휘와 언어 능력이 향상한다고 주장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역대 사자성어를 한글 없이 읽을 수 있고, 그 의미를 새기는 게 어렵지 않지만, 낯선 사자성어에 쉬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한자 교육을 받기만 하면 사자성어의 뜻을 제대로 새길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과 꽤 먼 이야기다.   

‘오리무중’이나 ‘이합집산’은 한자를 몰라도 사람들이 뜻을 새기는 데 지장이 없다. 그 낱말에 익숙해지면 인간의 언어 능력은 한자의 벽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퇴직 전, 동료 교사들에게 “아주 흔함을 이르는 말”을 뜻하는 ‘지천(至賤)’의 한자를 물으니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지극히 천하다’라는 의미의 글자란 걸 몰라도 그 뜻을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얘기다. (관련 기사 : 조선일보의 ‘한자 교육’ 타령, 이제 그만 좀 합시다)

<교수신문> 기획 기사 ‘올해의 사자성어’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올해의 사자성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성찰하게 해줌으로써 소임을 다했다. 따라서 ‘올해의 사자성어’의 수명을 말하면서 한자를 모르는 신세대를 개탄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글 전용의 정착에 따른 우리 사회의 '진전된 변화'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1. 12. 25. 낮달

 

 

교수신문 선정 '올해의 사자성어' 단상

'2021 올해의 사자성어'는 '묘서동처(猫鼠同處)'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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