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로 계량된 봉사, 과장과 포장
통계청장이 발행한 ‘봉사활동확인서’가 도착했다. 그 전에 이미 아이들에게서 저마다 개인별로 출력한 확인서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이 국가기관의 장이 아이들의 ‘봉사활동’을 증빙하는 서류를 보내온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 29명 가운데 27명이 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단다.
“세월 좋구나. 국가기관에서조차 너희들 봉사활동을 보태주는구나…….”
나는 좀 심드렁하게 말하고 말았지, 기실 기분은 좀 씁쓸했다. ‘2010 인구 주택 총조사’가 진행되면서 통계청이 중고생들의 ‘인터넷 조사 참여 및 홍보’ 활동을 봉사활동으로 인정해 준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이 조사에 참여한 게 통계청의 일손을 얼마나 덜었는지는 알 수 없다.
5분 남짓에 2시간 봉사 인정?
그러나 아이들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자기 집 조사에 응한 데 걸린 시간은 5분 안팎에 불과하다. 그런데 통계청은 그것을 2시간의 봉사활동으로 인정해 준 것이다. 하긴 이 조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교육이라고 하면 그 시간을 갖고 시비를 걸 일은 못 될지 모른다.
문제는 그 목적과 달리 운영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질할 수밖에 없는 ‘학교 봉사활동’이다. 애당초 계량화(점수화)할 수밖에 없었던 ‘봉사활동’은 그 내부에 이미 파행과 변질의 가능성을 안고 출발했다. 제도 시행(1995)된 지 이미 15년이 다 되었지만, 이 제도가 내외의 불신을 떨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봉사는 말 그대로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한다. 무거운 ‘국가나 사회’는 빼자.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함’이란 간단히 줄이면 ‘희생’이다. 이는 봉사가 근본적으로 ‘반대급부’를 전제로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봉사에 ‘활동’이 붙고, 그것이 점수로 계량화되면서 이 기본 전제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된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아직도 ‘봉사’가 공공선의 일부라는 인식이 매우 얕은 상태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봉사’의 뜻과 의미가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자녀의 진학에 필요한 점수로 봉사활동이 환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의 경우, 우리 지역에서는 학년당 20시간 이상의 봉사활동이 있어야 고교 입시에서 만점을 준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일 년 내내 놀다가 학년말이 가까워지면 벼락 ‘봉사활동’을 찾아 눈에 불을 켜게 된다. 그러나 봉사가 가능한 기관이나 시설을 찾는 것도 만만치 않다.
제대로 된 봉사활동이 필요한 시설에서는 점수를 찾아온 뜨내기(?) 학생들을 기피한다. 제대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아이들은 성가시기만 할 뿐인 까닭이다. 아이들은 동사무소, 경찰서, 도서관 등의 관공서를 찾거나 노인정을 찾아서 일정 시간 일손을 돕고 확인서를 받아온다.
그러나 이런 기관에서의 봉사활동도 거의 뻥튀기로 부풀려진다. ‘좋은 게 좋은’ 건 봉사활동을 두고 아이들과 기관 실무자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2시간은 4시간으로, 4시간은 8시간으로 적당히 포장된다. 봉사하러 온 아이나 아이에게 일을 시키는 어른에게 ‘봉사’의 의미를 환기하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그것은 피차간에 거쳐야 할 성가신 ‘요식 절차’에 불과할 뿐이니 말이다.
개중에는 아예 멀쩡하게 ‘하지도 않은’ 봉사활동을 만들어 오기도 한다. 각종 기관에서 발행하는 이런 확인서는 필경 거기 근무하는 친지의 도움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따지고 물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어 내색하지 않고 받아주긴 하지만, 이런 점수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싶어서 입맛이 쓰다.
고등학교에 오면 중학교처럼 학년당 20시간 같은 규정은 따로 없다. 오늘 뉴스 가운데 ‘위안부 할머니 봉사활동 소녀가 서울대 수시에 합격했다’라는 기사가 떴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로 보인다. ‘봉사활동’에 힘입어 진학하는 예도 있긴 하지만, 그건 특정 학과에만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꾸준히 확인서를 제출한다. 그나마 시설을 방문하여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서 다행스럽긴 하다. 교내나 지역 연합의 봉사 동아리도 매우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편다.
과장되고 포장되는 봉사, 대입 스펙으로
학교는 학교대로 아이들 시간을 배려해야 한다. 학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연간 4시간 정도는 ‘학교 정화 활동’ 명목으로 학교장 명의로 시간을 확인해 준다. 활동 없이 시간만 주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도 일이십 분이 한 시간으로 붇는 것은 당연하다.
그뿐이 아니다. 학급에서 우유를 나누어주는 아이, 쓰레기 분리수거를 맡은 아이, 도서실 도우미, 심지어 수능 시험일에 선배 수험생을 응원하러 간 아이들에게도 일정 시간의 봉사활동으로 간주해 준다. 아이들은 움직이는 게 봉사의 의지가 아니라 ‘시간’인 것이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점수를 받는 것으로 봉사활동을 이해하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있는 한 ‘봉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멀 수밖에 없다. 점수와 교환되는 선의나 희생은 변질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외고생들의 해외 봉사활동이 유행한 것은 여느 학생과는 차별화된 봉사활동 경력 쌓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봉사활동조차 대입을 위한 이른바 ‘스펙 쌓기’의 한 부문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해외에 못 가는 대신 소록도 봉사가 선호되면서 거기 가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가 되었다던가. 결국 어떤 대학에서는 소록도 봉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발표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시혜’가 아닌 ‘자기 성장’으로 인식해야
사랑의 본질이 ‘주는 것’이라면 봉사나 희생도 그것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봉사는 약자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동시대인끼리 나누는 연대와 확인이다. 봉사는 도움을 베푸는 것이라기보다 스스로 도움을 받는 정신적 성장이어야 한다.
지난해 국제 청소년 성취포상 활동으로 보육원 아이를 돌봐온 학생이 있었다. 올해 이 학생은 고 3 수험생이 되었지만 매주 한 차례씩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어느 결인가 그 아이에게는 봉사활동이 자신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는 봉사를 통해서 자신이 스스로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고 말했다. 자기 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대입에 도움이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봉사의 본령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봉사활동이 한갓진 자선에 그치지 않고 세상과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2010. 12.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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