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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44년, 초등학교 동기회 이야기

by 낮달2018 2021.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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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전에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회

▲ 44년 전 우리는 동기가 100명이 넘었는데 지금 모교의 학생 수는 모두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지지난 주엔 딸을 여의는 초등학교 동기의 ‘잔치’에 다녀왔다. 우리 지역에선 경사는 모두 잔치라 부른다. 환갑, 진갑잔치에다 며느리를 맞거나 딸을 여의는(우리 지역에선 딸 시집보내는 일도 속되게 일러 ‘치운다’고 한다) 일은 모두 잔치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한때는 환갑(회갑) 잔치는 온 동네 사람이 즐기는 잔치 중의 잔치였다. 우리가 흔히 ‘꼬꼬재배’라고 불렀던 전통 혼례가 벌여지는 날은 온 동네가 흥겨웠다. 어른들은 혼례가 열리는 집 마당에 일찌감치 좌정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 바짓가랑이 사이로 사모관대를 한 신랑이나 족두리를 쓴 신부를 훔쳐보느라 바빴다.

 

44년 묵은 초등 동기들과의 만남

 

그러나 세월 앞에서 ‘잔치’는 ‘결혼식’이나 ‘회갑연’ 따위의 ‘파티’로 바뀌었다. 혼인은 도회의 예식장을 찾아가고 회갑 잔치는 그런 행사를 전문적으로 치르는 음식점으로 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런 행사를 찾는 걸 ‘잔치’에 간다고 한다.

 

대구 외곽의 유명 예식장(이도 이젠 ‘웨딩홀’ 따위의 서양말로 바뀌었다)에서 치러진 결혼식에 나는 근처에 사는 벗의 차를 얻어타고 참석했다. 넉넉히 시간을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에서 내려 예식장까지 가는 동안의 정체 때문에 결국 식이 시작된 다음에 간신히 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쉰여덟에서 예순에 이르는 나이의 얼추 스무 명 이상의 남녀 초등학교 동기들이 이 ‘잔치’에 왔다.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이런저런 안부를 나누며 가볍게 술잔도 나누었다. 스무 살쯤에 보고 근 40여 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예전의 모습이 상기도 남아 있어 알아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1969년도에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한 우리 동기들은 모두 백삼십 명쯤이었다. 옹근 베이비붐 세대, 우리는 위아래 선후배 가운데서도 가장 졸업생 수가 많은 기수였다. 우리는 육 년 내내 두 학급을 유지했고, 교실과 책걸상이 모자라 2부제로 수업하거나 마룻바닥에 앉아서 공부하기도 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졸업하면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아이는 반쯤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또 반쯤이나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중졸로 학력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물을 먹을 수 있었던 친구는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그 열 명 가운데 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글쎄, 그리 명석하지는 않았지만, 교과 공부를 얼추 따라갔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될 만큼의 경제력을 갖춘 부모를 만난 덕이었다. 그래서 박봉이나마 아직도 삼십여 년째 학교에서 밥을 먹고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닌 게 사람살이다. 이십몇 년 전에 처음 동기회 모임이 있었을 때 모여서 회장 등 임원을 맡았던 이들은 일단, 경제적으로 넉넉한 친구들이었다. 그날 비엠더불유, 아우디, 벤츠 따위의 외제 자동차를 타고 온 친구가 넷쯤 되었는데 그중 둘은 중졸, 대학을 나온 친구는 하나뿐이었다.

 

공무원, 회사원, 개인 사업자, 목수, 운전 등 저마다 하는 일은 달라도 제각기 한몫의 삶을 살아온 흔적이 역력한 얼굴들이었다. 주부로 살아가지만 나름의 여유가 느껴지는 여자 동기들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거기 무슨 초등학교 때의 성적이나 학력 따위가 개재될 일이 없었다는 얘기다.

 

회갑이 가까운 연륜 탓일까. 모두 정답게 안부를 나누지만, 아무도 서로의 삶의 내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 혼인 여부를 묻는 게 고작이고 화제는 주변의 친구들 동향이나 살아가는 이야기 위주다. 그래서 친구들은 이 동기회의 분위기가 더없이 편하다고 하는지 모른다.

 

동기회가 모인 지 20년이 넘었다. 첫 모임에 한 번 참석하고 난 뒤, 나는 외따로 떨어져 사는 데다 바빠서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어쩌다 한두 번 얼굴을 비치게 된 것은 대구 인근으로 옮겨오면서부터다. 그러나 20년 넘게 교유를 이어온 벗들은 경조사 때마다 상부상조, 두터운 정을 나누는 모양이었다.

 

벗들은 몇 해 전에는 단체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고, 조만간에는 매월 붓는 경비로 호주로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자녀들 혼인 잔치에서 만날 때마다 이들이 나누어온 교유에 대해 탄복하지만 정작 나는 이 모임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갑자기 안 다니던 잔치에 다니기도 쉽지 않아서 나는 주로 남자 동기들의 잔치에만 참석하거나 축의금을 전하는 정도다. 무관하게 살아도 되겠지만 소싯적에 성적도 그만했고 반장 따위의 감투를 썼던 전력이 있으니 자칫 무심했다간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기 가운데 공부를 썩 잘해서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온 친구 하나는 지금 소식이 끊어졌다. 당연히 그는 한 번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친구들은 속으로 ‘잘난 놈은 다른 모양’이라고 비아냥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가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친구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말못할 다른 사정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지난 11월 말께에도 동기들은 전세버스를 내어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참석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시간도 마땅찮고 무엇보다 부담스러워서 나는 거기 끼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여흥을 즐기는 형식의 버스 여행, 그것도 일요일 행사라는 건 다음 날 근무를 생각하면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학연과 지연에 기울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 영화 <써니>의 동창생들.

경조사의 상부상조를 중심으로 아무 격의 없이 소박한 우정을 나누는 동기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동기들이 나누는 우정과 교유가 아름다워 보인다고 여기면서도 어쩐지 내겐 그게 부담스럽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임이 편하지만은 않은 까닭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여자 동기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이름만 알 뿐이지, 정작 재학 중에도 거의 말 한마디 나누어 보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살아온 길도, 가치관도, 환경도 저마다 다른 동기들을 묶는 것은 초등학교 여섯 해를 같이 다녔다는 학연뿐이다.

 

나이 들면서 사람들은 가장 원초적인 형식의 조직, 이른바 ‘공동사회’에 기울어지는 것일까. 젊어서는 무심하기만 하던 이들도 나이를 먹으면서 종친회나 화수회 따위의 혈연, 향우회와 같은 지연, 그리고 동창회 따위의 학연을 챙기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동기회가 주는 편안함을 나는 별로 실감할 수 없다. 무어 대단히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고, 단지 경조사를 함께 나누고 술을 마시고 여흥의 시간을 같이 즐기는 것에 그쳐서일까.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시간을 아직 겪지 못해서일까.

 

후배에게 그런 이야기를 비쳤더니 후배도 반색했다.

 

“글쎄, 난 동기회에 가도 별 재미가 없어. 친구들은 모임에 올 때마다 편하고 스스럼없다고 하는데 말이지…….”

“아, 저도 그렇습니다. 동기회에 가는 것보단 운동을 같이한 친구들 만나는 게 훨씬 편하지요.”

“왜 그럴까?”

“글쎄요, 동기회야 학연이 같다는 것밖에 공감대가 없지요. 정치적 입장 따위는 저마다 다른데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는 아무래도 멀기가 쉬우니까요. 거기 비하면 활동 같이한 친구들이야 걸릴 데가 없지요……. 결국 핵심은 정치적 입장이 아닐까요?”

 

나는 동기회에 나가면 정치적 발언을 가능한 한 삼간다. 아무래도 진보적 의견보다는 보수적 태도가 많을 수밖에 없고, 더구나 여기는 영남권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인 동네 대구 경북이 아닌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것은 민망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날 우리는 예식장 앞에서 악수하고 헤어졌다. 당분간 자식 혼사를 맞이하는 친구는 없는 모양이다. 송년회는 생략하고 신년회나 갖자는 의논을 들으면서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잠깐 궁리했다. 여전히 일요일에 모임을 하다 보니 방송고 수업일과 겹치면 꼼짝할 수 없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확인해 보니 우리가 졸업한 모교에는 현재 모두 93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우리 동기가 130여 명이었으니 44년 만에 모교는 6개 학년을 모두 합해도 한 학년이 되지 않을 만큼 작은 학교가 된 것이다. 그 변화 속에 든 우리 현대사의 굴곡만큼이나 우리 인생의 부침도 적지 않다.

 

사고로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도 적지 않다. 여자 동기 가운데는 남편을 먼저 보낸 친구들도 더러 있다. 문득 먼저 저세상으로 간 옛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베이비 부머로서 나는 우리가 헤쳐 온 지난 세월을 가만히 가늠해 본다.

 

 

2013. 12. 3. 낮달

 


▲ 옛 모교 터에 2020년에 새로 들어선 공립 단설유치원. 어디에도 옛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위의 모교는 2016년 인근 남율의 신설학교로 이전 개교했다. 구미 공단 인근의 남율리로 옮겨간 읍사무소에 이어 초등학교도 이전한 것이다. 옛 학교 터에는 기존 교사를 헐고, 공립 단설 유치원이 2020년에 개교했다. 어디에도 우리가 다녔던 1960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2024.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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