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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전태일 40년의 두 집회

by 낮달2018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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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전태일 40년의 집회 둘

▲ 이주호 장관 퇴진과 부당징계 전면 무효화를 요구하는 전국교사 결의대회. 11월 7일, 보신각 앞
▲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11월 7일, 서울광장

지난 일요일, 서울에서 열린 두 개의 집회에 다녀왔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이주호 장관 퇴진과 부당징계 전면 무효화를 요구하는 전국교사 결의대회’와 이어서 열린 민주노총의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그것이다.

 

8시 반에 출발한 전세 버스는 정오를 조금 지나 종로에 닿았다. 오후 1시, 교사대회가 열리는 보신각 주변엔 가을이 깊었다. 제야에 타종식을 치르던 보신각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커 보였고 정자 주변 도로에 단풍이 좋았다. 우리는 보신각 앞에다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

 

민주노동당 후원 교사에 대한 교과부의 징계 지시에 따라 지역 교육청에서 강행된 징계 결과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걸맞다. 7일 현재까지 확정된 징계 결과는 해임 8, 정직 21, 감봉 1 등이다. 징계가 연기된 지역까지 포함하면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징계의 부당성이야 더 이를 필요조차도 없다. 이 무차별 부당징계의 반대편에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공천을 신청하거나 전·현직 의원들에게 수백만 원의 정치자금을 낸 의혹을 받고 있던 현직 교원들에 대한, 유야무야된 수사가 있다. 백 보 양보한다고 해도 집권 여당이 부르짖고 있는 ‘공정사회’ 구호가 무색할 지경이다.

 

징계로 교단을 떠나게 된 교사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당하고 씩씩하다. 때린 놈은 불편하지만 맞은 사람은 발 뻗고 편하게 잔다는 것은 삶이 가르쳐 주는 슬기다. 1989년에 1600여 교사들이 교단에서 배제되었지만, 전교조는 10년 만에 합법화를 이루어냈다. 단기적으로 힘들고 아프지만, 이 싸움의 끝이 승리로 마무리되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두 묵념. 그들은 40년 전 한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위는 교사대회.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는 인근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이 도심의 집회는 지난 6·2 지방선거의 선물이다. 광장은 열렸지만, 주변을 둘러싼 컨테이너 때문에 운집한 4만의 참가자에게는 서울광장은 너무 좁았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자신을 불살랐던 1970년으로부터 40년이 흘렀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40년 전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오늘이나 불공정한 공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느껴서 그런가. 집회마다 묵념 순서는 유달리 경건해 보였다. 보신각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교사들이나 서울 광장에서 머리 숙인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지향과 정서는 다르지 않을 터였다. 늘 ‘살아남은 이’들의 부채감이 자신을 지탱하고 내일을 향해 내닫는 힘이 되는 법이다.

 

고개 숙인 노동자들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지켜보며 나는 전태일이 떠난 이후에도 어김없이 흐른 마흔 해 세월을 가늠해 보았다. 그 시간 동안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귀가해서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남긴 유서의 한 구절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 보았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2010. 11.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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