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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한글날 낙수(落穗)

by 낮달2018 2021.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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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이삭줍기

▲ 한글날이 한참 지나서야 한글날 기념 교내 백일장을 열었다.

모든 행사를 토요일 특별활동 시간으로 집중시키는 까닭에 내가 기안한 ‘한글날 기념 교내 백일장’은 다음 주 토요일(18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공교롭게도 금주 토요일은 ‘놀토’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 흔해 빠진 교내 백일장도 계획에 없는 학교에 그걸 치르게 되었다는 걸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  아래아 한글은 고어를 완벽하게 쓸 수 있다 .

나는 아이들에게 문병란 시인의 ‘식민지의 국어 시간’을 읽어주고, 주시경 선생 등 국어학자 몇 분의 이야기를 잠깐 했다. 또 나는 한글이 얼마나 정보화에 적합한 문자인가를 휴대전화의 문자 입력 방식을 비교하며 설명해 주었다.

 

26자의 알파벳을 9개의 자판에 두셋씩 배정해야 하는 영어에 비해 한글은 17자(삼성), 12자(엘지)만으로도 필요한 모든 문자를 입력할 수 있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내친김에 한글 코드 이야기와 함께 세벌식 한글도 소개했다. 나는 두벌식의 ‘도깨비불’ 현상과 입력한 대로 쓰이는 세벌식 모습을 직접 컴퓨터로 연결된 티브이로 보여주었다. 아래 아 한글로 자유롭게 중세국어를 입력하는 것을 시연했더니 아이들은 탄성을 질렀다.

 

밤엔 야간자습 감독이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경기를 보았고 책을 뒤적이다 수업 자료를 만들기도 했다. 10시 자습 종료가 가까워지면 늘 그렇듯 우리 반으로 간다. 종이 울릴 때까지 교실 안을 서성대면서 아이들을 하나씩 눈여겨보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종이 울릴 때까진 시치밀 떼는 것처럼 음전하게 책을 보고 있다. 나는 교실 뒤편의 게시판을 무심코 들여다보다 처음엔 빙그레 웃었고 나중에는 유쾌해져서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들에게 나와 ‘철물점’이 어울리냐고 말했더니 아이들도 따라서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나 보다. 거기 웬 낙서가 그렇게 많았는가. 뒤편 게시판은 갖가지 낙서로 빽빽했다. 낙서는 다음과 같은 식이다. 먼저 이름을 적은 다음, 이름의 끝 자로 시작하는 두세 음절의 단어를 죽 달아 쓰는 것이다.

 

이게 무슨 유행인지, 아이들 놀이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의 이 낙서가 썩 마음에 들었다. 마침 한글날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이 변종 끝말잇기가 주는 낯설고 신선한 감각에 아주 유쾌해졌다. 새 주가 시작되면 아이들을 그렇게 불러볼까. 이를테면 ‘권지은방울, 김세원추리……’ 하는 식으로 말이다.

 

 

2008. 10. 10. 낮달


 

훈민정음 서문가

han_seo.wma
6.65MB

 

작곡: 변미혜(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지휘: 김철호(국립국악원 상임지휘자)

노래: 이동규(인간문화재) 연주: 국립국악원 정악연주단

 

한글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바로 베란다에 태극기를 걸었다. 대체로 국경일에 국기 거는 일은 잘 챙기는 편이지만 이날은 좀 특별한 느낌으로 맞았다. 간밤에 잠들며 내일 아침에 국기를 거는 일을 잊어버리면 어떡하나 하고 괜한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베란다 바깥쪽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달아놓은 국기 걸이 구멍에다 국기봉을 든든하게 고정한 다음 좌우를 한 바퀴 휘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국기를 달았나 궁금해서다. 그러나 내가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아직 국기를 단 집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가을 들어 처음으로 양복을 꺼내 입었다. 넥타이를 맬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도 충분하다, 나는 자신에게 그렇게 일렀다. 첫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내가 왜 양복을 입었는지 아니? 아니요. 오늘이 한글날이기 때문이야. 오오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새벽에 남 먼저 국기를 단 것과 넥타이는 생략했지만, 양복 차림으로 출근한 게 한글날에 바치는 국어 교사인 나의 ‘경의’라고 말해 주었다. 아이들은 무언가 알 듯도 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이게 한글날에 대한 내 자축이고 경의인 게야.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늘 국어 교사임을 의식하며 산다고, 그게 내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아이들은 때아닌 교사의 고백을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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