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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구경, ‘고등어 & 콩나물’

by 낮달2018 2021.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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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서 만나는 간판 구경

▲ 고등어와 콩나물 사이에 낀 '&'을 애교로 봐줄 수 있을까.

출퇴근을 걸어서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도의 간판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기억력이 왕성할 때야 엔간한 상호쯤은 외워 버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집 앞 가게 이름도 긴가민가할 때가 많다. 어쨌든 나는 길 건너편에 죽 이어진 가게들의 상호나 취급 품목 따위를 무심히 읽으면서 걷는 게 어느새 버릇이 되었다.

 

그런데 직업의식은 참 무섭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늘 색연필을 들고 가게 이름, 거리에 걸린 펼침막, 전봇대에 붙은 광고전단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다. 블로그에 붙인 댓글조차도 교정을 본다는 ‘편집자’들의 습관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뜻밖에 맞춤법에 어긋난 표기가 제법 있다.

 

· 갈메기살 → 갈매기살

- 갈매기살은 돼지의 횡격막과 간 사이에 있는 근육질의 힘살이다. 기름이 없고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맛을 내기 때문에 귀한 육질로 치는데 ‘안창고기’라고도 한다.

 

· 희노애락 → 희로애락

- 희로애락(喜怒哀樂)의 ‘怒(노)’는 원래 소리가 ‘성낼 노’다. 그러나 발음을 매끄럽게 하려고 ‘로’로 읽는다. ‘허낙(許諾)’을 ‘허락’으로 표기하는 것과 같은 ‘활음조 현상’이다.

 

· 송이꾸이 → 송이구이

- ‘구이’는 ‘굽다’에서 온 명산데 경상도 사람은 대체로 ‘꿉다’로 발음한다. 물론 표준발음은 아니다.

 

· 솜 탐니다 → 솜 탑니다

- ‘탑니다’의 받침 ‘ㅂ’이 뒤의 ‘ㄴ’ 때문에 자음동화 되어 ‘ㅁ’으로 발음되었다. 자음동화는 표준발음이긴 하지만 표기는 형태를 밝혀 적어야 한다.

 

1km 남짓한 거리에서 발견한 잘못된 표기가 네 개나 된다. 주인은 자기 가게에 쓰인 글귀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설사 안다고 한들 적잖은 돈을 들여서까지 그걸 바꿀 엄두를 내기도 쉽지는 않겠다.

▲ 재미있는 간판들. '희노애락'은 한글 표기를 잘못했고, '꾸이'와 '갈메기살'도 틀렸다. '지앤미'는 무슨 영자를 저리 썼는가.

요즘 간판은 꽤 재미있다. 114 상담원을 웃긴 상호로 ‘누렁이도 찰스로’(애견가게), ‘드가장 여관’(숙박업소), ‘회밀리가 떴다’(횟집) 등이 있다고 했다. 출근길의 거리에서 만난 가게 이름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도로변의 조그만 반찬가게다.

 

이름하여 ‘고등어와 콩나물’. 어떤가, 지극히 평범하지만 범상치 않은 격조(!)가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예의 간판에서 ‘&’를 ‘와’로 읽었다. ‘콩나물과 고등어’로 얻은 정겹고 포근한 격조는 예의 생뚱맞은 영자 탓에 어정쩡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런 걸 ‘옥에 티’라고 하나 보다.

 

뜻밖에 우리말 속에 이런 형식의 영어 기호나 문자가 심심찮게 쓰이고 있는 듯하다. 둘을 비교하거나 대조할 때 ‘:’ 대신에 쓰는 ‘vs’, ‘기타’를 뜻하는 ‘etc’, ‘예’로 쓰이는 ‘ex’ 등이 그렇다.

 

보니까 ‘&’는 주변 간판, ‘구두수선 & 운동화 세탁’, ‘지 앤 미’ 등에서도 쓰였다. 미용실 이름인 ‘지 앤 미’에서 ‘지못미’를 떠올리면 꽝이다. 보아하니 이건 ‘지(智) & 미(美)’인 듯하니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편지를 쓸 때, ‘to’나 ‘from’ 따위를 마치 한글 조사처럼 사용한다.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가 한문에다 한글 토씨만 붙인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하긴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대부분의 사진관이 ‘DP & E’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이들 영자는 각각 ‘현상(developing), 인화(printing), 확대(enlarging)’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 사진관 간판의 뜻을 새길 수 있었던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인근에 있는 실내장식 전문점의 상호는 ‘집과 사람들’이다. 우리말을 쓴데다가 구의 형식으로 쓴 것도 독특하다. 그러나 옥에 티는 여기에도 있다. 상호 아래에 일렬로 세운 글자는 모두 외래어다. ‘인테리어, 씽크대, 브라인더’인데, ‘인테리어’는 순화하여 ‘실내장식’으로 쓰고, 나머지는 ‘싱크대’와 ‘블라인드’가 바른 표기다.

 

영어가 저도 몰래 주인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 나라여서인가. 일상생활은 영자와 그 부스러기 말로 얼룩진다. ‘D/C, PC, A/S, T/O’ 등의 영자가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레 쓰인다. 심지어는 ‘올리다, 내리다’를 ‘업(up)과 다운(down)’으로 쓰는 게 무슨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연 집회의 사회자가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분위기가 너무 ‘다운’되어 있네요. 분위기를 ‘업’시키는 의미에서 구호 한번 하죠.”

 

한때 나는 운동권의 언어관이 다분히 이중적이지 않나 싶었다. ‘오전’, ‘오후’로 써도 될 터인데 굳이 ‘이른’, ‘늦은’이라고 모호한 용어를 쓰면서도 정작 문건에서는 ‘항상성(恒常性)’, ‘형해화(形骸化)’ 따위의 관념어로 칠갑을 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세월이 하 수상해서일 테다. 이제 사람들은 잡탕이 된 말글살이조차 심상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랜드 바겐’과 ‘원 샷 딜’, ‘에코 프렌즈’, ‘한강 르네상스’, ‘윈드 앤 바이시클 플라자’ 따위가 정부에서 펴는 정책 이름이니 더 무엇을 말하랴.

▲ 인테리어와 도배 등을 맡는 업체의 이름으로 '집과 사람들'은 괜찮다.

그나마 이 도시에 살면서 다행스러운 것은, 안동의 지자체 상징 구호(도시 브랜드 슬로건)가 여전히 한글이라는 점이다. ‘굳 앤 디퍼런트 영주’와 ‘파인토피아 봉화’, ‘싱 어 청송’, ‘핫 영양’, ‘러닝 문경’, ‘저스트 상주’ 등의 혀 짧은 구호에서 안동의 그것은 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달리 영자로 표기할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말이다.

 

 

2009. 11.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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