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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시월 유감

by 낮달2018 2021.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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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이후를 생각한다

▲  시간 여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올해는 인근의 코스모스 축제 구경도 가지 못했다 .

시월,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한가위를 쇠고 나자 갑자기 갈피를 잃어버린 기분이 되었다. 예전처럼 고향 갈 일이 없어 명절은 단출하게 보냈다. 연휴 중에 몸이 성치 않아서 한나절쯤 고생을 했다. 좀처럼 앓아눕는 일이 없는 편인데 신체 기능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질병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연휴 끝나고 돌아온 학교, 3학년은 그예 모든 진도와 강의를 끝내고, 마무리 학습으로 들어갔다. 하루 아홉 시간, 모든 통제로부터 풀린 혼곤한 자유 앞에서 외려 아이들은 지치고 겉늙어 보인다. 끊임없이 자거나 멍해진 눈길로 습관적으로 교재에 머리를 파묻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참 모질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퇴임 ‘이후’ 생각

 

지난 월요일부터 3학년은 마지막 기말, 1·2학년은 중간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어저께 방송고 3학년도 기말시험을 치름으로써 마지막 평가를 마쳤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뿐이다. 졸업반 아이들은 수능 시험일과 대학입시, 그리고 졸업을, 1·2학년들은 방학을 기다린다. 방송고의 만학도들도 졸업을 기다리긴 매일반이다.

 

기다림은 나도 예외가 아니다. 연말께나 새해 벽두엔 명퇴 관련 인사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특별한 정책 변화가 없는 한 이번엔 나도 퇴직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교단에서의 32년을 마감하는 일이어서인가. 그걸 기다리면서도 마음 한쪽엔 허한 구석이 있다.

 

미련이거나 아쉬움 같은 건 분명 아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할 퇴직 후의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일까. 그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혹성을 탈출하겠다고 마음먹은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끊임없이 쌓고 허문 일상이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는 이 규칙적인 일상에서 놓여날 것이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수업에 들어가고, 거기서 아이들을 달래거나 나무라 가며 진을 빼지 않아도 된다. 모든 일상적 업무로부터 놓여나 나는 내 일상의 설계자, 주재자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가끔, 동네 도서관을 찾아 책을 고르고 있거나 아내와 함께 주변의 낮은 산을 오르며, 짧거나 긴 여행을 떠나는 일상을 상상해 보곤 했다. 독서와 글쓰기에 쓸 시간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는 쉽게 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시간은 그때를 위해 남겨두곤 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찾아온 이 허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시간이 느슨해지면서 나는 가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빈 운동장을 오래 지켜보곤 한다. 수업을 하면서도 아이들의 움직임, 뭔가를 쓰고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가 이른, 지난 서른몇 해의 여정을 생각했다.

 

세대의 순환, 혹은 우리의 자리

▲ 결혼은 새로운 세대 구성의 기점이다.

한가위 지나 개천절에는 세상을 떠난 친구 장(章) 선생의 둘째 딸 결혼식에 다녀왔다. 모임을 같이하던 밀양 교사 세 분과 모이니, 모두가 연륜이 지긋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정수리가 듬성듬성해지거나 알게 모르게 나이가 얼굴과 몸피에 쓰여 있었다.

 

불과 몇 해 사이에 부모를 여의고도 아이들은 씩씩하게 살았다. 맏이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고 둘째도 이번에 10월의 신부가 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막둥이 녀석도 실하게 자랐다. 시간은 말없이 세대를 교체한다. 그 예식의 끝에서 우리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비켜줄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은 이제 새로운 일가(一家)를 여미고 꾸려갈 것이다. 우리는 그 세대 순환의 풍경에서 배경이 되어간다. 퇴임은 그걸 더 분명하게 깨우쳐 줄 것이다. 더 이상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지난 세월 동안 쟁여둔 임금을 되새김질하게 되면서.

 

어쨌든 좀 담담해지기로 한다. 어쨌든 시간은 갈 것이고, 온전히 나의 시간이 되기 위해서 새해와 2015학년도는 마감될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준비할까. 굳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시간을 받아들이고, 그 시간 속에서 나의 구실을 받아들기가 될 것이다. 주책 부리지 않고 나이 든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2015.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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