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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된 시골 버스터미널, 팔순 사진가의 ‘갤러리’가 되다

by 낮달2018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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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탑리 버스정류장을 지키는 '독도 사진가' 김재도 선생 이야기

▲ 터미널 간판 아래 ‘해암 김재도 갤러리’라는 간판이 걸렸다. 정류장은 경북 노포 기업에 선정되었다. 오른쪽 원 안은 노포 기업 명패.
▲ 갤러리 겸 대합실 내부. 벽면은 전시 공간으로 이용되고, 오른쪽 앞에 매표창구가 있다. 매표창구는 버스 출발 30분 전에만 열린다.

의성에 귀촌한 벗으로부터 탑리 버스정류장을 갤러리로 쓰는 사진가 한 분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지 한참 지났다. 그러나 나는 딴 데 정신을 팔았는지 그걸 전혀 유념하지 못했다. 지난 16일, 함께 금성면 탑리의 시외버스터미널을 찾았다.

 

팔순 사진가는 67째 운영해 온 정류장에 갤러리를 꾸몄다

 

탑리 버스정류장은 인구 4천5백의 시골 버스정류장으로는 규모가 제법이었다. 대합실에 들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정류장이 갤러리’라는 벗의 얘기가 가늠되었다. 열두어 평쯤의 대합실 벽면엔 빼곡히 사진 작품이 걸렸고, 두 군데 텔레비전 모니터에선 관련 동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출입구 오른쪽의 매표창구, 그 위와 맞은편 벽에 각각 붙은 버스 시간표와 요금표만이 그곳이 정류장 대합실임을 환기해 주었다.

 

매표창구마저 비어 있는 대합실 벽면을 따라 긴 나무 의자가 ‘ㄷ’ 자로 이어져 있었다. 진행 중인 전시는 올 5월에 개막한 <해암 김재도의 조문국 전>이다. 밖으로 나와서야 정면 출입구 위의 ‘해암 갤러리’ 간판과 ‘경상북도 노포 기업’ 명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옆 건물에 있는 ‘사진 문고’에서 사진가 해암(海巖) 김재도(84) 선생을 만났다. 지난 40여 년 동안 고향마을을 찍어온 사진가는 우연한 방문자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사진 문고에는 국내 유명 사진작가들의 작품집과 관련 서적 5천여 권이 소장되어 있다. 그가 소장한 700여 권이 도내의 사진가로부터 기증받으면서 5천여 권으로 는 것이다. 그는 군이 지원해 주면 3층의 빈 사무실을 수리하여 문고를 ‘작은 사진 도서관’으로 바꾸어 열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 해암의 사진 문고. 그간 모은 5천여 권의 사진집, 도록, 관련 서적으로 그는 ‘작은 사진 도서관’을 열고 싶어 했다.
▲ <내 고향 의성>전에 전시한 사진을 흑백으로 인화해 지난해 <내 고향 의성 흑백 전시>전을 열었다. 그때의 흑백 사진들 벽에 걸려 있다.
▲ 전시 중인 카메라. 산 것과 기증받은 것 등 필카와 디카가 각각 200여 대다.

탑리 버스정류장은 1951년에 그의 선친이 열었다. 3년 뒤, 선친이 세상을 떴을 때 6남매의 장남인 해암은 고1이었다. 그가 17살에 ‘정류소장’이 되어 올해까지 67년째 가업을 이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한 그는 취업 대신 어머니와 여동생, 어린 남동생만 있는 집을 떠날 수 없어 다시 정류장에 주저앉았다.

 

67년째 운영 중인 정류장을 못 닫는 까닭

 

다행히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류장은 호황이었다. 금성면 인구가 1만8천에 이르렀던 1970년대에는 하루에 차표를 산 이가 천 명 넘었으니 버스에서 내린 사람도 그만큼이었을 것이다. 군내 환승지 탑리는 대구·안동은 물론 청송 주왕산, 경주, 부산, 울산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 스물몇 차례씩 정류장에 드나들 만큼 승객이 넘쳤다.

 

초가였던 매표소를 슬래브 건물로 짓고, 터도 확장해 버스 10대를 너끈히 댈 만큼 번창했던 정류장은 2000년대 들어 버스 이용객이 급격히 줄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루 이용 승객이 하루 20~30명에 그치고, 들고나는 버스도 여섯 차례가 고작이다.

 

“장삿속이라면 진작 문을 닫았지요. 어쨌든 정류장 수입으로 자식 넷 대학 공부와 결혼까지 시킬 수 있었으니 어렵더라도 지키는 게 도리지요.”

▲ 운행시간표(부분). 한때는 버스가 하루 스물몇 차례씩 정류장에 드나들 만큼 승객이 넘쳤지만, 지금은 상하행 여섯 차례가 고작이다.

소액의 매표 수익금에 군 지원금을 보태 시간제 매표원 급여를 주고, 수도광열비와 공과금은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해결하는 형편이지만, 주민들이 수십 년간 이용해온 터미널을 닫을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주민들의 교통 편의를 유지해야 하는 군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가 하루 스무남은 명밖에 찾지 않는 대합실을 갤러리로 꾸민 게 2018년이다. 그는 자기 작품을 걸거나, 희망하는 작가들에게도 전시 공간을 제공할 생각이었다. 이후 한 해 3~4회씩 갤러리에서 전시를 해 온 덕분에 버스정류장을 찾은 이들은 대합실에서 사진 작품을 감상하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골 사진가, ‘고향’과 ‘독도’를 찍기 시작하다

 

1937년생인 해암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0년, 40대 초반일 때다. 독일 광부로 갔던 후배가 휴가를 나왔다가 독일제 롤라이(Rollei) 카메라를 20만 원에 사라고 했다. 공무원 봉급이 8, 9만 원이던 시절, 망설임 끝에 그걸 사면서 사진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10여 년간 야유회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홀로 사진을 찍던 그가 50대 늦깎이로 읍내 사진 동호회에 가입한 때가 1988년이었다. 회원들과 어울려 일출 사진은 동해로, 일몰 사진은 서해로, 설경 사진은 태백산으로 이른바 ‘출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활동에 회의를 느낀 그는 사진 촬영의 방향을 튼다.

 

“다녀 봐도 큰 의미를 못 느끼겠더라고요. 차라리 내가 사는 의성을 찍어보자고 마음먹고, 군내 행사나 대회 등 사람 모이는 데마다 찾아다녔지요.”

▲ 2000년 10월, 새벽안개 속에 함께 마늘을 심고 있는 노부부를 찍은 이 사진은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한다.  ⓒ 김재도 제공
▲ 해암의 사진 생활이 담긴 도록 <독도>(2020)와 해암 김재도 갤러리에서 연 전시회의 팸플릿들 .

의성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2002년에 군수의 권유로 연 첫 사진전 <내 고향 의성>으로 지역에 알려졌다. 이는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 <조문국에서 의성으로>에 초대 전시되어 큰 호응을 받았다. 이 무렵 그는 우연히 경북경찰청장의 독도 순시에 동행해 독도 사진을 찍게 되면서 ‘독도 사진가’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십여 차례 경찰청의 도움으로 헬기를 타고 독도를 촬영했고, 혼자서도 울릉도에 가서 독도경비대의 지원으로 독도의 정경을 렌즈에 담았다. 독도를 십수 차례 드나들었으나 2013년에야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 개관 기념 초대전 <우리나라 독도>를 열게 된 것은 독도의 사계를 온전히 담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독도 사진을 찍으면서 30대 때 지인에게서 받은 아호 해암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호는 그의 삶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해암의 ‘독도 사진’은 미국 워싱턴 한국문화원 디지털 전시관과 국회의원회관(2013), 의성조문국박물관(2014), 경북도립도서관(2020) 등에 전시됐다. 그는 지난해 독도재단에 독도 사진 66컷을 교육과 홍보용으로 기증했다.

▲ 2010년 8월, 해암이 헬리콥터를 타고 찍은 독도 사진. 이 사진들은 모두 독도재단에 기증하였다.  ⓒ 김재도 제공

취미든 직업이든 사진을 찍는 일은 적잖은 비용이 든다. 그는 2011년 디지털카메라를 들일 때까지 파노라마 카메라 노블렉스(Noblex)나 핫셀블라드(Hasselblad) 등을 썼다. 그리고 소장 20만 컷의 필름 중 15만 컷은 네거티브 필름보다 3배나 비싼 슬라이드 필름을 썼다. 미루어 짐작되지만, 궁금증을 못 참아 사모님은 어떠셨냐고 물었다.

 

“괜찮았습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서 넉넉히 받아주었지요. 물론 돈 들어가는 일이면 좀 덜 좋아하는 기색이긴 했지만요.”

 

그는 2년간 성심으로 구완한 부인을 2013년에 먼저 떠나 보냈다. 대구의 병원과 안동을 오가며 바쁘게 준비한 독도 사진전 개막 사흘 후였다. 자기 아픈 것보다 홀로 남아 정류장을 지킬 남편을 더 걱정하던 부인은 전시회 개막을 기뻐하다가 떠났지만, 고지식한 남편은 아직도 정류장을 지키고 있고 거길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그의 기록 사진을 받아 안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

 

망설이다가 떠나시기 전에 사진은 어디엔가에 맡기고 가셔야 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글쎄, 말이지요, 하고 그는 허두를 뗐으나 말꼬리를 흐렸다.

 

“필름은 스캔해서 파일로 보관할까 했는데, 비용이 엄청나서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의성군과 조문국 박물관에 제안하였으나 여의찮네요. 정말 소중한 기록이고 자료인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 김재도 선생. 부친이 물려준 버스정류장을 지금까지 67년간 운영해 온 그는 고향 의성과 독도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가이기도 하다.

선생은 건강해 보였고, 과거 기억이나 말씀도 명료했다. 그러나 노인의 건강은 알 수 없다. 시골 사진가가 수십 년 동안 찍은 기록물조차 받아 안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마음이 스산해졌다.

 

그는 시종 겸손하고, 친절했다. 자기 사진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았으며,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가 전해준 소박한 삶, 고향과 이웃에 대한 애정 앞에서 우린 고개를 숙였다.

 

혹시 경북하고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의 버스터미널에 오면 갤러리 대합실에서 열리는 사진전을 꼭 보시라. 혹시 날렵한 몸피에 상냥하게 말을 거는 중절모의 노신사가 있으면 그가 바로 해암 김재도 선생이다. 기억해 주시라. 그는 사진가이지만, 67년째 탑리 버스정류장 지킴이면서 소멸 위험 전국 1위의 의성 지킴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2021. 10. 2. 낮달

 

 

67년 된 시골 버스터미널, 팔순 사진가의 '갤러리'가 되다

의성 탑리 버스정류장을 지키는 '독도 사진가' 김재도 선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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