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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초가을, 산, 편지

by 낮달2018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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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북봉산에서 

▲ 고즈넉한 산길을 무심히 걷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 무념무상이 좋지만 얼마간 잡념이 있어도 상관없다 .
▲ 요즘이 나팔꽃 철인 모양이다 . 산어귀 언덕바지에 나팔꽃이 피었다 . 내가 좋아하는 연파랑 빛이다 .
▲ 등산로 입구 쪽에 새로 지은 전원주택 화단에 핀 백일홍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 .

초가을, 산

아직 ‘완연하다’고 하기엔 이르다. 그러나 이미 가을이 깊어지고 있음은 모두가 안다. 그것은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시간을 새삼 실존적으로 환기해 준다. 어쩔 수 없이 가을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기 삶의 대차대조표를 들이대기엔 아직은 마뜩잖은 시간이지만.

아침저녁은 서늘한 반면 한낮엔 아직 볕이 따갑다. 그러나 그것도 ‘과일들의 완성’과 ‘독한 포도주’의 ‘마지막 단맛’(이상 릴케 ‘가을날’)을 위한 시간일 뿐이다. 자리에 들면서 창문을 닫고, 이불을 여며 덮으며 몸이 먼저 맞이한 계절 앞에 한동안 망연해지기도 한다.

늦은 우기에 들쑥날쑥했던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공기가 찬 새벽을 피해 아침 8시 어름에 집을 나선다. 한여름처럼 땀으로 온몸을 적실 일은 없지만, 이마에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아플 때쯤이면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한다.

날마다 길섶을 살피는 것은 꽃 소식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있는 구절초 군락은 이제 막 봉우리를 맺었고, 쑥부쟁이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때가 이르니 물드는 나뭇잎도 없다. 한여름에 비기면 높아지고 맑아진 하늘이 시원하다.

▲ 모르긴 해도 금오산이 저렇게 상큼하게 건네다 보이는 풍경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 쉴 참에 만난 고추잠자리. 어릴 때 무리 지어 마당을 채우던 고추잠자리를 지금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
▲ 산에 자생하는 산초나무. 분디 또는 산초라고 불리는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 금오산 현월봉이 구름에 쌓여 있다 . 맑은 날이 드물어 이런 풍경도 쉽게 만날 수 없다 .
▲ 가을이라도 아직 단풍 소식은 멀다 .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붉은 잎사귀의 붉나무 .
▲ 하산길의 끝. 숲 사이로 아파트가 보인다. 산을 등지고 사는 것은 축복이다 .

건네다 볼 때마다 흐려 보였던 저 멀리 금오산 현월봉도 성큼 가까워진 듯하다. 언제쯤 저 산마루까지 오를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만다. 까짓것, 오르면 오르는 거고, 오르지 못하면 그뿐 아닌가. 간간이 만나는 고추잠자리와 나비 따위를 렌즈에 담으면서 다시 가을을 실감한다.

문병, 한 세대의 황혼

얼마 전에 집안 어른 한 분이 입원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내게 삼종숙(三從叔)이지만 집안에선 가장 가까운 친척이시다. 차일피일하다 어저께 오전에 잠깐 말미를 내어 입원하셨다는 병원에 들렀다. 아저씨는 여든아홉, 돌아가실 때의 내 어머니 연세다.

처음에 나는 아저씨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간병인이 일러주어서 알았다. 인사를 해도 못 알아보는 눈치여서 아무개라고 거듭 일러 드렸는데도 아저씨 눈빛은 무심하기만 했다. 집 밖으로 나오다 넘어져서 생긴 턱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고, 표정 없는 깡마른 얼굴.

그게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는 노인들의 공통된 모습이라는 걸 나는 안다. 잠시 후에 좀 기력을 회복했는지 딸들이 묻는 말에도 간단히 대답하는 걸 보고 나는 마음을 놓았다. 처음엔 가망이 없어 보이더니 어쩌면 고비를 넘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나오면서 멀리 있는 아저씨의 맏이와 통화를 했다. 얘, 처음에 뵈었을 땐 안 되겠구나 싶더니 나중에 기력을 찾는 걸 보고 그나마 안심을 했다. ……그래, 그러나 노인은 모른다,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 두어야 할 게다. 그럼요, 형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노인의 목숨을 두고 우리는 마치 절차를 이야기하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쎄, 기력을 되찾으면 다행이겠지만, 조만간 나는 어른의 부음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저씨는 아버지 세대의 마지막 바깥어른이니, 이러구러 세대는 교체되는 셈인가.

가을 편지


아침에 즐겨듣는 라디오 방송에서 어떤 정치인의 목소리로 ‘가을 편지’를 들었다. 그렇다. 고은 시인이 쓴 노랫말에 김민기가 쓴 곡인데 나는 그 노래를 이동원의 목소리로 기억한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그 노래를 들으며 출퇴근한 게 아마 9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동숭동의 주막에서 대중음악평론가 최경식의 간청으로 고은 시인이 즉석에서 써 준 노랫말이 ‘가을 편지’였다고. 그래서인가, 노래엔 가을의 그리움과 우수가 짙게 배어 있다. 굳이 다스리지 않고 풀어놓은 마음은 물처럼 흐른다.

가을에는 누구든 편지를 하고 싶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그걸 받아줄 수도 있다. 가을의 여자는 외롭지만 아름답다. 알지 못하는 여자, 그러나 가을을 헤맨 여자는 아름답다. 그런 여자에게 편지를 하겠다고 말하는 남자들……. 쓰는 게 아니라 편지를 하겠다는 것은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조그만 감상조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매정하지만, 굳이 편지를 하지 않더라도 잠깐 그런 감상에 흥건히 젖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삶은 고단하고, 어쨌든 가을은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 시간이니 말이다.

 

2017. 9.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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