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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거점’ 창비, 뻔뻔스러워지다?

by 낮달2018 2021.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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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거점’이었던 창비는 어떻게 바뀌었나

▲ 내 서가에 있는 <창작과비평> 영인본. 80년대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창비는 이런 형식으로 대중과 만났다.

계간 <창작과비평> 2015년 가을호가 나오면서 한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신경숙 표절 사건’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는 모양이다. 이번 가을호 머리글에서 백영서 편집주간이 신경숙 표절에 관한 입장을 새로이 밝히면서부터다. (시중에 책이 배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26일 오전 현재 온라인서점에는 이 책이 올라와 있지 않다.)[관련 기사]

신경숙 표절을 바라보는 <창작과비평>의 ‘동어반복’

백 편집주간은 이런저런 ‘의혹’에 대한 창비의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일반의 기대와는 꽤 멀리 떨어진 내용 탓에 문학계의 실망과 비판도 한층 높아지고 있다. 창비의 공식 입장은 일단 ‘표절 의혹’에 대한 사실상의 ‘반박’이다. ‘표절과 문학 권력 논란을 겪으며’라는 제목의 머리글에 나타난 창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관련 기사]

· 저희는 그간 내부 토론을 거치면서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

·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 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 작가가 ‘의식적인 도둑질’을 했고 출판사는 돈 때문에 그런 도둑질을 비호한다고 단죄하는 분위기가 압도하는 판에서 창비가 어떤 언명을 하든 결국은 한 작가를 매도하는 분위기에 합류하거나 ‘상업주의로 타락한 문학 권력’이란 비난을 키우는 딜레마를 피할 길이 없었기에 저희는 그동안 묵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 문학 권력이란 것이 문학장 안에서 일정한 자원과 권위를 가진 출판 기업을 가리키고 그 출판사가 유수한 잡지를 생산하는 하부 구조로 기능함을 의미한다면, 창비를 문학 권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 그간 (창비가) 거둔 사업적 성과는 저희의 공공적 기여와 무관하지 않다.

 

구구절절 사연이 넘치지만 위 입장을 정리하면 간단하다. 신경숙의 해당 작품엔 문자적 유사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걸 의도적 표절이라 보긴 어렵다. 그동안 창비가 침묵한 것은 딜레마를 피해 가고자 한 부득이한 일이었다. 창비를 문학 권력이라 함은 타당한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그간 창비가 거둔 성과는 공공적 기여라 할 수 있다…….

이 입장은 창비가 이번 호 마지막에 실은 윤지관(덕성여대) 교수의, 신씨 옹호 입장을 담은 글을 통해 힘이 실린다. 표절 논란 직후 신씨를 적극 옹호해 온 윤지관은 표절 혐의가 제기된 ‘전설’의 경우 ‘우국’의 일부 문장을 차용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독자적인 문학 세계의 형성에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자기 작품의 맥락 속에 녹여냄으로써 작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비 가을호에는 문화연대의 토론회에 인용된 3편의 토론문이 ‘긴급 기획’란에 게재되었다. 그러나 정작 신씨의 표절 논란을 정면 비판한 글 대신 ‘표절 의혹 제기는 지나치다’거나 이번 표절 사태를 통해 현 한국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중심이다. 결과적으로 창비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논란이 되긴 했지만 그걸 문제 삼을 이유가 있는가’ 정도로 정리할 만하다는 얘기다.

이는 지난 6월 “작가와 논의를 거쳐 독자들의 걱정과 의문을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내부의 시스템을 재점검하고 필요한 후속 조치를 마련하겠다.”라고 한 대표이사의 약속과는 크게 어긋난 내용이다. 창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창비 비판에 참여한 이들은 이른바 ‘주류’가 아닌 사람들 같다. 주류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이 일련의 논란에 기꺼이 참여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또 그 면면 역시 주요 문예지를 빛내는 비평가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결국 ‘문학 권력’으로서의 창비의 위상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원고 청탁, 자기 명의의 시집이나 작품집을 내자고 상의해 올 수도 있는 문예지에 대해서 그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부분을 곧이곧대로 들이댈 배짱을 가진 문인은 많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들이 선택한 침묵은 이 강고한 문학 권력이 행사하는 영향력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 문학평론가 오길영(충남대) 교수의 페이스북에 오른 글.(일부)

뻔뻔스러워진 ‘저항의 거점’

이번에도 창비를 겨누어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은 이들의 면면은 처음 문제가 불거졌을 때 고언을 아끼지 않은 그 사람들이다. 지난 비판을 통해서 창비의 변화와 성찰을 기대했던 이들이었으므로 이들의 비판에서는 훨씬 깊고 참담한 심사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 한마디로 최초 발표된 창비 문학편집부 해명의 반복이다.

· 신씨의 작품은 단지 ‘문자적 유사성’에 그친 게 아니다. ‘베껴 쓰기’고 표절이다. 의도했든 안했든 표절은 표절이다.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품이 독자에게 읽히는 것, 말하는 것, 표현하는 것의 객관적 결과만이 중요하다.

· 창비가 ‘저항의 거점’이라고 자임하는데 60~80년대의 업적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항상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섣부름 자임은 ‘자뻑’으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

· 변명과 해명으로 일관된 권두언을 보며 창비에게 그런 자기 성찰력이 실종된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든다.

· 공공성을 위해 물적 기반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로 상업주의라는 비판을 방어하고 있지만, 물적 기반의 문제와 작가의 표절과 예술적 성취를 평가하는 일은 분리해서 엄정히 따질 문제다.

 

오길영의 비판은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입장은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렇게 번 돈으로 좋은 일도 하니까, 이 정도 표절은 좀 봐주세요’라는 뜻으로 읽힌다.”는 대목이 백미다. 정말 그렇다. 오래된 ‘저항의 거점’도 뻔뻔스러워졌다. 어렵게 얻은 자신의 기득권도 보장받겠다는 결기가 드러나지 않는가.

문학평론가 김명인(인하대) 교수의 비판도 거리낌이 없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창비가 ‘시간벌기, 혹은 버티기’를 기본전술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창비의 태도를 헤집어 보였다.

· 지난 6월 중순 이후 두 달이 넘었건만 이 정도의 기획이 그동안의 침묵의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나태와 무기력이 아니면 의도적인 해태, 시간 벌기, 버티기 전술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 사과나 반성에는 시효가 없고 언제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번 권두언에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고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토론의 장을 마련”하겠다던 약속조차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것일까?

· 만일 내가 창비의 책임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즉각 표절을 인정하고, 통절한 사과의 뜻을 표하고 <창작과비평>의 정간이나 폐간, 아니면 적어도 편집 기획체제의 전면적 개편과 더불어 창비 출판구조와 관행에 대한 전면적 검토를 선언하고 장기간 자숙의 시간을 가지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것이다.

· 내가 만일 창비의 편집위원이었다면, 나는 우선 전 편집위원의 총사퇴를 주장했을 것이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혼자라도 편집위원 직을 내놓았을 것이다. 지금 창비 편집위원들의 양심은 어디로 갔는가? 편집부 직원들만큼의 문제의식도 없다는 말인가?

- 문학평론가 김명인 페이스북

창비, ‘사람들의 길에서 멀어져 온 시간’

오길영이 지적이 아프듯 김명인의 일갈도 아프긴 매일반이다. 김명인은 “지난 20년 동안 창비는 이 황폐한 시대를 고통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상의 열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모두가 견딜 수 없는 그 온도 속에서 창비는 홀로 쾌적하게 지내온지가 너무 오래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창비의 다음 행보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길영이나 김명인의 비판쯤은 ‘감자 한 알’을 축이는 데 그칠 수도 있겠다. 유감스럽게도 창비 측은 오길영도, 김명인도 아니다. 손가락질하는 소수의 문인이나 침묵하고 있는 독자들보다 회사가, 회사가 대표하는 자본과 기득권의 이해가 창비의 주변에는 더 가까이 있다.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였던 창비 편집인 백낙청의 책임을 묻는 오길영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비는 침묵하고 있다. 그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것으로 보호되는 기득권도 안전해질까. 사람들이 이 논란을 잊어갈 때쯤이면 창비가 입은 상처도 아물고 다시 굳건한 저항의 거점의 지위를 회복하게 될까.

▲ 복간된 <창작과비평> 한동안 이 책을 읽는 재미로 나는 80년대와 90년대를 보냈다.

내 서가에는 1980년대에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창비가 발행해 판매한 <창작과비평> 영인본이 스물몇 권이 꽂혀 있다. 나는 그 책을 캠퍼스를 누비던 외판 영업사원에게서 할부로 샀다. 그 시절의 문학도들 가운데, 창비 영인본을 소장한 학생들이 좀 많았던가.

‘상업주의’를 넘어 ‘자본’으로?

그 검정 장정본(하드 커버)의 멋대가리 없는 책을 나는 두고두고 읽었고, 80년대 중후반에 <창작과비평>이 복간되었을 때, 몇 년 동안 그것을 빼놓지 않고 구독했다. 그때야말로 창비가 시방 내세우고 있는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선구적, 도덕적 권위가 창비 주변에 아우라처럼 빛나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표적 문예지로서의 권위와 함께 메이저 출판사로 성장해 중등학교 교과서까지 발행하게 되면서 창비는 바야흐로 ‘자본’의 길로 나아왔던 듯하다. 수십, 수백만 부의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내고, 고정 독자를 가진 유명 작가를 전속처럼 거느린 창비는 이미 ‘상업주의’ 정도가 아니라, 이미 자본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어떤 좌파 논객은 ‘이 극악한 자본의 지옥은 보수라 일컬어지는 수구 기득권 세력과 진보라 일컬어지는 신흥 기득권 세력의 합작품’이라 갈파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진보라는 신흥 기득권 세력‘과 주식회사 창비는, 계간 <창작과비평>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2015. 8. 26. 낮달



* 덧붙임

두루뭉술하고 어정쩡하게 자신의 현안을 비켜 간 <창작과비평>과 달리 <실천문학> 가을호는 문학 권력과 표절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황인찬의 권두언 ‘필요한 것은 진단이 아니다 처방이다 수술이다’를 비롯하여 표절 논란과 문단 권력의 문제를 젊은 작가 좌담과 문학 기자 좌담, 특별기고, 두 개의 특집(Ⅰ.한국문학, 위기와 활로, Ⅱ. 문화생산의 구조변동과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통해서다.

문예지를 사 본 기억이 까마득한데 어제 아침, 나는 온라인서점에 <실천문학>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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