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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흰산 이규배 시인, ‘공무도하가’ 해석을 뒤집다

by 낮달2018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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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배 시인, <어문연구>에 공무도하가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 발표

고대 시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중고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 시가로 가르치는 노래다.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시기의 과도기 작품인데 본격 서정을 다룬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가 있지,만 이 노래를 ‘최고(最古)’로 치는 이유는 시대적으로 고조선 시기의 노래로 보기 때문이다.

 

최초의 서정시가 ‘공무도하가’

 

4구의 한역시로 전하는 ‘공무도하가’는 2세기 후한 말기에 편찬된 채옹의 <금조(琴操>에 실려 있으며, 진나라 최표의 <고금주(古今注)>에 ‘공후인(箜篌引)’이 설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가 인용한 <고금주>의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공후인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涇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외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도 전에 그 사람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箜篌)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는 심히 구슬펐다. 그의 아내는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니, 여옥이 슬퍼하며, 곧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麗容)에게 전하니 일컬어 공후인이라 한다.”

노래의 구조는 단순하다. 한 여인이 지아비를 향해 ‘그 물을 건너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사내는 물 깊숙이 들어가 마침내 물에 휩쓸려 버린다. 지아비를 죽음으로 이별한 여인은 구슬프게 울면서 장차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고 탄식하는 것이 이 노래에 드러난 상황이다.

 

▲ 고전문학 연구자 이규배

문학 교과서는 이 노래의 주제를 ‘임을 여읜 슬픔’, ‘임과의 사별로 인한 슬픔’으로, 어조를 ‘여성적 화자의 탄식과 원망과 애절한 울부짖음과 체념적인 어조’라 가르친다. 워낙 시적 상황이 단순하다 보니 교사나 아이들은 공감하기보단 그런가 보다 하고 말기 마련이다.

 

그나마 아이들은 술병을 들고 입수하는 사내를 황홀경에 빠진 무당이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로, 그의 처는 악신(樂神)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고 하면 흥미를 보일 뿐이다. 어쨌든 단 네 구절의 노래로 내용적 맥락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이규배 논문, 노래를 ‘새롭게 해석’

 

최근 한국어문교육연구회에서 펴내는 <어문연구> 2017년 여름호(통권 174호)에 이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 논문 한 편이 실려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논문 “공무도하가 재고 시론 : 가(歌)·악(樂)·무(舞) 문헌 기록들로부터의 순환적 해석학”을 발표한 고전문학 연구자는 이규배 시인(이하 호칭 생략)이다.

 

지금도 ‘흰흰산’이라는 별명으로 <오마이뉴스> 블로그 ‘시와 삶 이야기’를 운영하고 있는 이규배는 성균관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고전문학 연구자다. 그는 동시대의 문헌 기록 등을 통해 ‘공무도하가’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관련 기사 : 공무도하가새 해석전쟁 결단 뒤 숨진 귀족 기린 노래]

 

삼십여 년 아이들을 가르쳐 왔지만 내게 고전문학 연구자의 논문과 주장을 평가할 만한 안목은 없다. 그 방면에 관한 공부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에게 단편적 지식을 중심으로 그 얼개만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문을 읽어보면 연구자의 주장은 상당한 논거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공(公)’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규배는 ‘공후인’의 배경 설화에서 ‘같은 지시 대상이 서로 다른 기호로 지칭되는 맥락’을 중심으로 노래를 다시 살폈다. 노래와 유래담에서 주인공은 한자어 ‘공(公)’으로 불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수광부’라는 비칭(卑稱)으로 일컬어지는 불균형이 있다.

 

평범한 백성을 ‘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공’은 이 노래가 만들어지던 때와 가까운 시기의 기록으로는 ‘임금, 천자, 주군, 제후’ 또는 그와 비슷한 신분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일반 민중으로 볼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고귀한 신분을 지닌 존재를 가리키는 ‘공’으로 불리면서 한편으로 그는 ‘미친 사내[광부(狂夫)]’로도 불린다. 이 불균형은 이 노래를 지은 이들과 이를 기록한 사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창작된 지역은 중국이지만 고조선 이래로 한인(韓人)들이 살면서 독자적인 문화양식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채록자나 채록 양식은 중국이었다.

 

이규배는 “동일한 인물을 광부라 지시하여 서술하는 시각은 중국 한족인 채록자 시각이고, 공이라고 호칭하는 시각은 그 아내와 조선인 거류민들의 시각”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곽리자고는 뱃사공 아닌 거문고에 능한 악인

 

그럼 ‘공’이라는 경칭으로 불린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규배는 주인공이 일반 민중이라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다. 엄연한 계급사회였던 당시에 일반 백성을 ‘공’이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공’을 높은 벼슬을 지닌 인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이 노래의 주인공들을 목격하고 아내 여옥에게 노래를 전하는 곽리자고는 지금까지 ‘조선진졸(朝鮮津卒)’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급 뱃사공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규배는 이 해석도 뒤집는다. 그는 <주례(周禮)> <예기(禮記)> <국어(國語)> 같은 옛 문헌들에서 ‘졸’이 “백 사람의 군졸 집단” 또는 “300호의 마을”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음을 확인한다.

 

동시에 그는 ‘공무도하가’가 처음 채록된 후한 채옹의 책 <금조(琴操)>에서 도문고(屠門高)와 용구고(龍丘高)가 각각 ‘금인’(琴引)과 ‘초인’(楚引)이라는 노래를 지은 악인(樂人)인 것처럼 “곽리자고 역시 금(琴)에 능했던 악인인 것이지 도선장을 지키는 하급 군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을 건너다’는 ‘전쟁 등 사생결단의 행위’

 

그리고 이 노래의 핵심 어구인 ‘물을 건너다’(渡河)를 국경을 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사생결단의 행위로 해석했다. 이규배는 ‘고조선 어느 지역의 제후로서 왕족’이었으리라 추정하는 ‘공’이 전쟁과 반란 같은 군사적 결단을 내린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공의 죽음 뒤에 그가 떠나간 물가에서 그를 추도하는 제사 의식이 있었을 것이며, 이 제사 의식을 거행하며 그 비(妃)가 공을 추모하는 만가(輓歌)를 지어 공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며 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공무도하가’는 국경을 넘는 사생결단 끝에 목숨을 잃은 제후 남편을 기린 부인의 노래이며, 그 노래를 들은 거문고 예인 곽리자고와 처 여옥이 악기 공후를 연주하며 불러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의 비극적 최후’ → ‘공의 제사 의식과 「공무도하」의 가와 곡의 형성’ → ‘공의 아내의 자결’ → ‘공과 그 비의 제사 의식과 가(歌)·악(樂)·무(舞) 형성과 유포’라는 통시적 전개 속에 실재했던 가·악·무의 전승과 유포가, 한나라 악부의 편찬목적에 따라 「공후인」 유래담으로 축소·변이되어 기록되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이다.

    - 이규배, 위 논문 ‘초록’ 중에서

 

나는 디비피아(DBpia)에서 위 논문을 유료로 내려받아 읽었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를 빼면 본격 논문을 들여다본 건 거의 수십 년 만이다. 논문이 객관적 논거에 따라 학문적 주장이 펼쳐지는 것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면서 31쪽짜리 논문을 쓰기 위해 흘린 연구자의 땀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해 본 결과,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뒤, 어떤 매체에서도 이 주장을 다루지 않은 듯하다. 국문학사에서 그 의의가 남다른 고대 서정시가 따위의 해석보다 더 중요한 사건, 사고가 많았던 탓이었을까.

 

연구자 이규배의 주장은 여러 문헌에 쓰인 단어를 상고하는 가운데 세운 합리적 추론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일은 없어졌지만, 그의 주장에 따라 이제 ‘공무도하가’는 구체적 시적 상황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을 듯싶다. 그의 후속 연구를 기대하는 이유다.

 

 

2017. 8. 7. 낮달

 

 

*덧붙임 :

수십 년 만에 논문을 들여다본 느낌은 새삼스러웠다. 그런데 유감스러웠던 것은 왜 논문은 아직도 1970~80년대의 고리타분한 형식을 벗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글 전용’이 일상이 된 나라에서 아직도 학술 논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 <어문연구>에 실린 논문 PDF.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술 논문은 여전히 국한문 혼용이다.

과문해서 학술 논문이 국한문 혼용으로 쓰이는,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쓰면 훨씬 더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연구자들은 그게 편한 지 모르지만, 국한문이 뒤섞인 글을 읽는 건 꽤 불편했고 한글 문서보다 적어도 1.5배쯤의 시간이 더 걸렸다. 설마 이런 국한문 혼용의 글쓰기가 학문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닐 터이다. 굳이 학문의 대중화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열려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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