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몇 권을 사들이며
올 오월까지만 해도 꽤 부지런히 살았다. 블로그 살림살이 말이다. 4월에 12편, 5월에 13편을 썼으니 한창때의 월 14~15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평년작을 웃돈 성적이었다. 그러나 6월에는 9편, 7월에는 10편, 그리고 중순에 이른 8월은 현재 4편이 고작이다. 열서너 편을 쓰던 때에 비기면 급전직하다.
글쎄, 무슨 까닭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동안 쫓기는 기분까지는 아니었다고 설레발을 쳤지만 늘 머릿속에는 써야 할 글의 목록으로 어지러웠던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글쓰기가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써야 할 글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데다 머릿속을 텅 비워두는 게 뜻밖에 편안하고 쏠쏠했기 때문이다.
편안한 쉼, 혹은 무념
방학이긴 해도 오전만 수업하면 오후는 온전히 빈 시간이었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날씨가 너무 더웠던 탓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온전히 쉬었다. 오후에 한 시간쯤은 반드시 낮잠을 잤고, 프로야구 중계의 이른바 ‘본방 사수’에도 동참했다. 주말에는 열심히 드라마를 보며 지내기도 했다.
뭔가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하루나 이틀쯤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좋은, 무심한 날들을 나는 천천히 즐겼던 것 같다. 보충수업이 끝나고 채 열흘이 안 되는 말미가 주어져 벗을 찾아서 밀양과 부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블로그는 인적마저 드물어 닷새 전인 8월 9일에 올린 글이 먼지를 맞고 있다.
쓸거리가 몇 개쯤 있지만 서두를 일이 없으니 머릿속에서 숙성되도록 내버려 둔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주문했던 책이 도착해 있다. 종이상자를 여는데도 예전 같은 설렘 따위는 이제 없다. 특별히 어떤 책을 읽으리라는 투지도 잊은 지 오래다.
책은, 이웃 녹두님이 쓴 요리책 <싱글을 위한 서바이벌 요리>, 26년이 지나면서 너덜너덜해진 자크 프레베르의 시집 <꽃집에서>, 돌베개에서 낸 답사 여행의 길잡이 가운데 <경남>편과 <가야산과 덕유산> 등이다. 세로쓰기 본밖에 없어서 새로 산 <토지> 제3부 네 권도 있다. 오래 보관함에서 먼지를 맞고 있던 김삿갓 시집<길 위의 시>의 먼지를 털어냈고, 나라말에서 낸 중고생을 위한 박지원 한문소설집 <한 푼도 못 되는 그 놈의 양반>이 반갑다.
무심한 책 읽기를 위하여
사 보마고 여러 차례 맘만 먹다 잊고 있었던 <분노하라>도 이번에 수중에 들였다. 90쪽이 안 되는 얇은 책잔데 값은 6천 원이다. (물론 책의 두께와 정가가 반드시 정비례한다는 건 아니다!) 가격이 민망했던가, ‘분노하라’는 뜻의 프랑스어가 음각된 빨간색 고무 팔찌 하나가 첨부되어 있다.
지상에서 나온 책은 죄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던 젊은 시절에 비기면 요즘 독서는 시간 나면 하고 나지 않으면 안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에 불과하다.
지지난해부터 출판가를 달군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같은 책을 나는 사지도 읽지도 않았다. 동료가 산 책을 잠깐 빌려서 뒤적이다 말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노하라>는 여러 실망스러운 서평에도 불구하고 사서 읽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쯤 이 책을 완독하게 될는지.
그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토지> 제3부 1권을 들자 이내 그걸 새로 읽기 시작했다. 제3부는 최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919년부터 1929년 광주학생운동까지 약 10년여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3·1운동 이후 지식인의 갈등과 좌절, 일제의 자본주의화와 경제적 억압, 이상현과 기화의 불륜 등을 거듭 읽는데 가끔 넋을 잃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곤 한다.
<토지>를 적어도 나는 여섯 번은 읽었다. 이 작품이 처음 쓰이기 시작하던 70년대가 내게는 10대에서 이십사금0대로 넘어가는 성장기의 길목이었다. 그 치기 만만하던 시절과 오십 대 중반을 훌쩍 넘긴 지금 내가 읽은 <토지>의 울림과 깊이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토지>의 인물과 그들이 살아내는 삶은 그런 세월과 연륜의 깊이를 확인케 해 준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건성 넘어갔던, 이용의 아들 이홍의 갈등과 허무를 나는 자신의 그것으로 추체험한다. 오가다 지로를 향해 기울어지는 히토미, 유인실의 아픔을 마치 내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독서의 묘미란 이런 자기 성장과 삶을 바라보는 웅숭깊은 시선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8월도 중순을 넘긴다. 다음 주 금요일이면 개학이다. 2학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도시에 머무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인가. 그러나 이후 내가 꾸려갈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과 거기 우두커니 서 있는 자기 그림자를 곁눈질하면서 나는 잠깐 쓸쓸해지고 만다.
2011. 8.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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