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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미디어 리포트

묵은 신문을 뒤적이면서

by 낮달2018 202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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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 중 신문의 머리기사들

8월 11일부터 나흘쯤 집을 떠났다 돌아왔다. 제천에서의 일박은 혼자였고, 거제도에서의 2박 3일은 아내, 친구들과 함께였다. 한 사흘쯤은 계속해서 비가 찔끔대거나 잔뜩 흐렸고, 마지막 날에만 반짝 날이 들면서 무더웠다.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친구들도 오래된 세월을 함께한 이들이다. 그래서 정작 바다 구경이나, 회를 먹고, 명승지를 도는 일정보다는 펜션에서 부대끼며 끼니를 끓여 먹으면서 나눈 담소의 시간이 훨씬 좋았다. 오래된 친구들 모임이란, 새로운 정보를 나누기보다는 묵은 인연과 우정을 확인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건 저녁 무렵. 아이들이 그동안 배달된 신문을 잘 챙겨두었다. 차례대로 1면의 머리기사를 확인하는데, 며칠간 잊었던 분노와 짜증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뉴스를 보는 게 두렵다’는 아내의 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은 세상이다.

 

신문의 머리기사는 바로 그날을 전후한 이 나라의 현실을 매우 압축해 보여준다. 8월 12일부터 모두 나흘 치의 신문의 1면을 차지한 것은 서글프고 우울한 소식이다.

 

· 쌍용차 64명 무더기 구속 ‘공안 폭풍’ (8/12),

· 군 기무사 민간인 불법사찰 부활 (8/13),

· ‘북 억류’ 유성진 씨 136일 만에 풀려나 (8/14),

· 이건희 전 회장 ‘삼성 SDS 배임’ 유죄 (8/15)

▲ <한겨레> 1면(2009. 8. 12) ⓒ <한겨레> PDF
▲ <한겨레> 1면(2009. 8. 13) ⓒ <한겨레> PDF

쌍용차 노동자가 목숨을 건 파업 끝에 얻은 것은 구속과 해고뿐인 셈인가. 신문은 단일사건으로 1997년 한총련 출범식 때에 이은 두 번째 ‘대량 구속 사건’이라고 전한다. 현 정권의 ‘법치’는 바야흐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인지도 모르겠다.

 

군 기무사가 다시 민간인 사찰을 시작했다고 폭로한 것은 민주노동당 쪽이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은 물론 ‘불법’이다. 1990년,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령부가 해체된 것도 당시 노무현 의원 등 민간인 사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년, ‘선진화’ 시대를 열겠다면서 지금 ‘역사의 퇴행(退行)’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그 아래 기사는 ‘4대강 민생예산 삭감’ 관련이고, 오른쪽에는 ‘쌍용차 파업노조원 보복 인사’ 소식이다. 4대강 관련 예산이 복지 등 다른 분야 예산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대한 정치권의 반발을 전하는 기사다. 쌍용차 파업에 참여했던 ‘비해고 노조원’들에게 무더기 휴업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는 ‘상생 합의’를 깬 노조 와해 공작이라며 노조가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 <한겨레> 1면(2009. 8. 14) ⓒ <한겨레> PDF
▲ <한겨레> 1면(2009. 8. 15) ⓒ <한겨레> PDF

셋째 날의 기사가 그나마 낭보(朗報)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해 방북한 현대그룹의 현 회장의 방북 일정이 또 연장된다는 기사는 개운하지 않다. 그 아래 기사는 다시 입맛을 쓰게 만든다. ‘감세’와 ‘4대강 예산’ 때문에 새해 예산이 빠듯해져서 ‘취약계층 예산 4300억’을 깎는다는 소식이다. 당장 내년에 기초생활 수급자가 7천여 명이 준다고 전한 게 며칠 전이었다.

 

마지막 날의 기사는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의 공판 소식이다. 파기 환송심 재판부는 그에게 ‘BW 저가 발행으로 227억의 회사 손실’을 초래한 ‘삼성 SDS 배임’을 유죄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정작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집행유예’를 선고함으로써 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을 사실상 종결했다는 것이다.

 

권력은 자본에게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더 이상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굳이 시민단체의 논평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법부가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평가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죽음을 불사한 파업 끝에 실낱만 한 희망을 건지긴 했지만,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감옥으로 쫓겨 가고 군의 민간인 불법사찰은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살아나고 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선출직 정치인들에게 위임했지만, 정작 그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인가. 묵은 신문에 담긴, 이 세상과 시절을 읽으며 우울하게 ‘헌법 제1조’의 노랫말을 곱씹어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009. 8.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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