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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아기산과 무실[수곡(水谷)] 마을

by 낮달2018 2021.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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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아기산과 무실마을

▲ 아기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임하호 . 다리 왼쪽은 안동 , 오른쪽은 청송 진보 가는 길이다 .

아기산은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임동면의 진산(鎭山)이다. 높이는 591m. 옛날에는 봉화터로 쓰였으며 가뭄이 심할 때 여기서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내렸다고 한다. 무실마을에서는 이를 마을의 당산으로 모시고 해마다 고사를 지낸다.

 

한자로는 ‘거위 아(鵝)’자나 ‘높을 아(峨)’자에다 ‘갈림길 기(岐)’자를 쓴다고 하는데, 그리 썩 미더운 해석은 아닌 듯하다. 마을 주변의 멧부리가 그렇듯 우리말로 대수롭지 않게 붙인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생뚱맞은 한자 이름을 얻은 경우로 보이니 말이다. (인근의 갈라산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葛羅山’이 된 듯하다.)

 

아기산은 그리 가파르지 않아서 오르기도 수월하거니와 워낙 한적한 곳이다. 어제 오후, 1시간 반쯤 걸린 산행길에서 우리가 만난 등산객은 딱 한 팀뿐이었으니 아기산의 주말은 차라리 쓸쓸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산기슭에 신라 시대의 고찰 봉황사(鳳凰寺)가 있다. 전하기로는 선덕여왕 때 창건했다는 이 절집은 한때 황산사(黃山寺)로 불렸으나 근년에 다시 봉황사가 되었다. 요사채 북쪽 텃밭에 원래가 절터가 있었다 한다. 경북 유형문화재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법당이다.

▲ 봉황사 대웅전 . 정면 5칸, 측면 3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법당이다 . 단청은 18세기 중후반의 것이다 .

전설에 대웅전의 단청은 봉황이 날아와 칠하였다고 한다. 단청을 칠하는 동안 사람이 보아서는 안 되었는데, 전면을 마치고 후면을 시작할 때 이 금기를 어기매, 봉황은 일을 마치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대웅전의 전면과 후면의 단청 솜씨가 다른 것이라나. 이 법당의 단청은 적어도 18세기 중후반에 칠해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니 이 팔작 다포집이 견딘 역사도 만만찮다.

 

안동 인근의 산을 다니면서 확인하는 공통점은 뜻밖에 솔숲이 많다는 것이다. 경북 남부지방의 민둥산만 보고 자란 나는 비록 그리 오래되지는 않으나 골짜기와 등성이마다 곧게 자라나는 적송 군락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약 1억 7천만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난 이 유서 깊은 수종은 원래 곧게 자라는 성질을 갖고 있으니 구부정하게 자라는 것은 척박한 토양 탓이다.

봉황사 뒤편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시간은 30분이면 족하다. 한때, 무실마을의 당산제가 치러졌다는 정상에서는 임하호를 가로지른 두 개의 다리와 저 멀리 안동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안동은 인구야 고작 16만을 넘는 정도지만, 그 면적은 1,520㎢로 서울(602.52㎢)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두 개의 다목적댐을 가질 만한 터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고향을 물속에 묻고 떠나야 했던 이들의 설움과 한이 크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나마 전통 마을은 더 높은 동네로 옮겨서 살아남았다. 산 아래 무실마을은 물론이거니와 근처의 지례 예술촌, 오천 유적지인 군자리, 농암종택 등이 바로 수몰 지구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집이거나 동네다.

▲ 아기산 정상 . 해발 591m. 한때 무실마을에서는 여기서 당산제를 올렸다 한다 .
▲ 수령 250~300년의 적송. 아름다운 여인과 같다 하여 미여목(美如木)이라 불린다.

지방 자치의 과실을 그나마 맛볼 수 있는 곳이 인근의 산이라는 걸 다시 확인한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산행길 곳곳에 나지막한 나무 벤치와 재난 시 좌표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가파른 내리막길에는 의지하라고 말뚝을 박고 줄을 매어놓았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6시가 가까웠다. 날이 아직 한참 남아서 절 아래 무실마을에 들렀다. 아기산을 오르내린 건 여러 번이었지만, 정작 마을에 들어선 건 처음이다. 무실은 ‘물+실’에서 리을(ㄹ)이 떨어져 만들어진 이름인데, 행정구역 이름이 정비되면서 ‘수곡(水谷)’이 되었다. 아기산을 포함, 한자로 쓸 수 있어야만 이름이 된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상상력이 무척 궁금해진다.

▲ 골목에서 바라본 수애당 . 오른쪽에 무실 종택이 있다 .
▲ 무실 종택. 솟을대문 앞의 돌비에는 '기봉구려(岐峰舊廬)라 새겨져 있다 .

무실은 전주 류(柳)씨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6대손 류성(柳城), 무실 문중은 퇴계 학통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류성의 아들 기봉 류복기와 문규를 제정한 그 아들 도헌 류우잠이 기반을 확립하였다 한다.

 

‘기봉구려(岐峰舊廬)’라는 돌비를 앞세운 무실 종택은 앞면 7칸, 옆면 6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1600년 후기 또는 1700년께의 건축으로 추측되니 먹은 나이가 300년을 넘는다. 미음(ㅁ) 자형 정침(正寢) 저편의 중문 너머에 사당이 있고, 사당 앞 잔디밭에서 일흔은 넘겼을 종부가 잡풀을 뽑고 있었다.

 

마당에 검정 고급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걸 타고 온 이가 종손인 듯했다. 마산에 산다는 그는 전지가위로 마당 곳곳의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잠깐 수인사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역시 이 대갓집은 관리가 문제였던 듯하다. 어머니 혼자서는……. 하고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91년에 불이 나 손을 보았다는 사랑채는 몇몇 부재의 빛깔이 달라 보였고, 마루에는 ‘기도유업(岐陶遺業)’과 ‘월회당(月會堂)’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기도는 기봉과 도암, 부자를 가리키고, 월회당은 14세손 류원현의 아호다. 가시오가피나무와 두충나무, 능금나무가 심어진 마당 가녘에 종부가 가꾼 호박이 상큼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 무실 종택 .오른쪽이 사랑채인데 , 91 년 화재로 한 차례 보수하였다 .
▲ 종택의 사당 앞에서 바라본 무실 종택 . 중문이 단아하다 .

오래된 전통 가옥에서 내가 자주 시선을 뺏기는 것은 안채와 사랑채를 경계 지은 낮은 담장과 중문이 환기하는 어떤 정서다. 그 낮지도 높지도 않은 담장은 마치 남녀 간 내외를 넌지시 알려주는 심리적 거리 같고, 반쯤 열린 중문 너머로 엿보이는 안마당의 여백이 마치 장옷을 둘러쓴 여인의 이마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또, 길게 이어진 외곽 담과 그 주변에 선 중키의 나무들이 만드는 묘한 안정감과 쓸쓸함의 조화도 오래 눈길을 끈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긴 담장 길과 그 주변의 실루엣은 얼마나 부드럽고 애잔한지……. 이 마을에서 태어난 시인(류안진)의 감성을 만든 것도 저 같은 분위기일지 모른다.

종택 왼편 집이 수애 유진걸이 1939년에 지은 집, 수애당(水涯堂)이다. 수애당은 앞면 7칸, 옆면 2칸의 길쭉한 팔작집인데 춘양목으로 지어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난 건물이라 한다. 몇 해 전부터 서울서 살던 종손이 내려와 숙식을 제공하는 문화체험 캠프를 운영하게 되면서 일반에는 종택보다 더 많이 알려졌다.

 

내로라하는 반가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것을 아마 문중에서는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듯했다. 수애당에 관해서 물으니 종손이 마뜩잖은 반응을 보인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수애당은 100년이 채 안 된, ‘문화재 자료’에 불과하지만, 나이가 300년이 넘어 한 단계 위인 ‘민속자료’로 지정된 종택보다 유명한 것도 그리 개운한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수애당은 앞면 7 칸, 옆면 2 칸의 길쭉한 팔작집인데 춘양목으로 지었다 .
▲ 수애당에서 바라본 솟을대문 . 중문 너머가 행랑 마당이다 .

그러나 ‘성현도 시대를 따라야 한다’는 걸 문중에서도 알고 있었다. 조만간에 이 마을에는 민박집이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그것은 결코 나쁜 일은 아닐 터였다. 투숙객인 듯 낯선 억양의 젊은 여인이 마당에서 강아지를 어르고 있었다. 뒤란으로 들어가는 중문 앞 조그만 화단에 핀 패랭이꽃이 슬프도록 화사했다.

 

마을에서 나오면 아스팔트 도로에 임하호(臨河湖)가 바투 붙어 있다. 물가의 오래된 정자나무 옆에 있는 마을 서낭당은 말끔한 새 입성이었다. 입향조 류성의 아들 류복기는 아기산의 이름을 따 스스로 아호를 기봉(岐峰)이라 지었고 후손들은 아기산을 당산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고사를 올려 왔다고 한다.

▲ 무실마을의 서낭당 . 대문 앞 왼편에 남근석을 연상케 하는 돌이 서 있다 .

위세 드높았던 선비의 집안에서도 전통 신앙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인데, 뒷날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고사는 아기산 꼭대기에서 마을 앞 서낭당으로, 날은 정월 대보름날에서 ‘풋구’날로 옮겨 치러지고 있다. ‘풋구’란 ‘호미씻이’의 다른 이름인데, 세 벌에 걸친 논 매기를 마치는 7월 중순께 치러지는 마을 잔치를 이른다.

 

고된 농사일을 얼추 마치고 농사의 가닥이 잡혀가 농부들이 한시름을 놓을 때 벌이는 잔치인 풋구날에 사람들은 한바탕 즐겁게 놀면서 농사일 때문에 미뤄 두었던 마을 공동사를 치른다. 장마에 패인 들길과 산길, 마을 길을 닦는 것도 이 무렵이다. 달리 초연(草宴)·풋구·풋굿·머슴날·장원례(壯元禮)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날, 무실 사람들은 서낭당에다 당산제를 올리는 것이다.

 

이태 전쯤 무성한 풀숲에 묻혀 있던 당(堂)은 정비된 물가 쉼터에 말끔하게 보수된 모습으로 조신하게 서 있다. 보도블록을 깐 통로를 따라 오른편 밭둑에는 신식의 말뚝을 박았고, 당의 담장과 지붕의 이음매마다 새로 황토를 이겨 바른 흔적이 선연했다.

 

대문간 왼편에는 언제 만들었는지, 묘한 모양새의 구조물 하나가 지키고 섰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가로로 쓴 ‘수호신’ 아래, 세로로 ‘여게가 무실’이라 적힌 이 돌은 수년 전 서낭당을 정비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 세운 것이라 하는데 내 눈에는 그게 자꾸만 남근석으로 보인다.

▲ 류성의 처 의성 김씨의 정절을 기린 정려각. 김성일의 여동생으로 24세에 남편이 죽자 머리를 자르고 3년간 시묘한 후,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당산제를 올리며 마을 사람들이 기원한 것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일 터이고, 그 점에서는 남근석 또한 다산과 풍요, 그리고 액막이를 기원하는 표지니 그 뜻은 다르지 않다.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넌지시 건네는, 어느 아낙이 한 해 동안 거기다 치성을 드려 생산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돌덩어리 하나에 바치는 민중들의 소박한 믿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방증하는 것이다.

 

기우제를 올리면 비를 내렸다는 산 아기산은 종내 그 오래된 마을을 물에 잠기게 하고 마을 앞에 도도한 물줄기의 인공호를 마련해 가뭄의 물 걱정을 그예 덜었으니, 그 영험은 누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때 진흙탕물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던 임하호 물은 어지간히 맑아졌다. 성큼 내려간 수위를 내려다보며 우리는 다시 무실다리[수곡교]를 건넜다.

 

 

2007. 7.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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